동시대 영상 미술의 최전선,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예술 세계를 탐구하다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는 동시대 미술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상 설치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파도와 차고 세일―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예술 세계』는 이들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조망하는 한편, 이 두 예술가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으로부터 역사, 기억, 상흔과 같이 삶을 관통하는 인류 보편의 주제를 서로 다른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의 기획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대표적인 연례 전시인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이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만남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들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의 모습으로, 이 두 예술가는 다양한 주제를 서로 다른 언어와 문법으로 풀어낸다. 이들의 화면은 때로 너무 이질적이어서 경쟁이나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선택한 개별 주제는 구체성과 지역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적 힘을 드러낸다는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5·18 민주화운동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작품은 전쟁과 테러, 역사와 국가, 초월적 존재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사유한다. 이 책에는 두 작가의 신작 <파도>(임흥순, 2022)와 <차고 세일>(오메르 파스트, 2022)을 포함하여 전시 출품작 열세 점에 대한 작품 해설이 실렸으며, 네 명의 평론가(곽영빈·김지훈·남수영·이나라)와 한 명의 소설가(톰 매카시)의 평론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두 예술가의 예술 세계를 탐구한다. 열세 점의 작품들은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가 창조하는 세계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최근작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두 예술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가 되는 것을 넘어서, 작품을 둘러싼 담론과 매체 연구의 심화된 논의가 일어나는 장이 될 것이다.
1. 우리 삶을 관통하는 열세 가지 이야기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열세 작품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이 펼쳐진다. 역사 속 혹은 지구 반대편 이야기 속에 담긴 세계의 모습은 동떨어진 타인의 삶이 아닌 바로 지금, 너와 나의 이야기다. 다섯 명의 필자는 복잡다단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삶의 단면들로부터 주제가 내포하는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예술이 현실과 연대하며 우리 삶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이야기들을 다시 재구성하여 들려준다.
2. 미술과 영화의 이분법을 넘어 범람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던지는 예술의 도전
오늘날 스크린은 극장과 미술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에 있는 영상 작품의 비교 대상이나 참조점이 단지 영화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TV와 극장, 미술관을 넘어 휴대전화. 태블릿 장치, 컴퓨터 등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모든 곳에 화면이 있는 상황에서, 예술이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 어떻게 유효한가에 대한 담론이 심도 있게 개진된다.
3. 영상 매체에 대한 미학적 통찰
이 책은 두 예술가의 작품에서 출발하여 영상 매체와 장르에 관한 한층 심화된 논의를 펼친다. 두 예술가의 작품을 영상 매체에 관한 기존의 틀에 한정하는 대신에, 확장된 매체로서 이들 작품의 특성을 논의한다. 매체가 주제를 반영하는 양상, 매체의 변화에 따른 수용자의 인지 공간 확대 등 두 예술가의 작품이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매체와 장르의 상호작용에 기반한 영상 매체의 확장 가능성을 짚어본다.
4. 예술이 우리 삶과 맺는 관계를 해석하고 안내하는 길잡이
마블 영화/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등과 같이 감각운동 도식에 충실한 자극적 영상물과는 구분되는, 소위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영상 이미지는 난해하다는 일반의 인식으로 인해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명의 필자는 각각의 작품을 분석하며, 또는 그 작품이 기대고 있는 주제에 관한 해석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우리 삶과 관계 맺는지, 우리는 왜 이러한 작품을 보아야 하는지에 관해 알려준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매체미학 연구자이자 미술평론가인 곽영빈은 「눈먼 과거와 전 지구적 내전의 영원회귀: 오메르 파스트와 임흥순의 차이와 반복」에서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작품이 지닌 개별 주제의 특수성과 지역성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구조적 유사성에 대해 논한다. 두 예술가의 작품은 5·18 민주화운동,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국가와 권력에 의한 사건을 주로 다룬다. 곽영빈은 이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역사적 외상으로서의 사건이 ‘반복’하여 등장함에 주목하며, 이들이 어떻게 기록과 기억,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내는지 분석한다.
영화이론가 남수영은 「전시되는 풍경들의 빛과 공기 … 그리고 뒤따르는 현전의 인식들」에서 《컷》에 전시된 임흥순의 작품을 중심으로 영화관을 벗어난 영상 작품 감상 경험에 주목한다.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영상 작품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미술관 영상’ 또는 확장영화 안에서 임흥순의 작품들이 지닌 독특성을 밝힌다. 특히 최근 영상 매체 담론에서 다루고 있는 ‘풍경’에 관한 논의를 짚어보며, 임흥순의 작품에서 풍경이 전경과 후경의 구분을 해체하고 나아가 영상 예술의 고유한 매체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미지문화 연구자 이나라는 「역사의 운율, 색채의 기미」에서 임흥순의 신작 <파도>를 분석한다. <파도>는 베트남 전쟁, 여순항쟁, 세월호 참사라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고통스러운 역사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알리며 위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나라는 이러한 주제가 어떠한 미학적 형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파도>의 세 화면이 가진 파도와 같은 리듬에 대한 형식 분석을 작품이 지닌 주제 분석으로 확장한다.
영화미디어 학자 김지훈은 「오메르 파스트와 다큐멘터리 불확정성: 미디어, 재연, 디스포지티프」에서 오메르 파스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미디어, 재연, 디스포지티프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개괄한다. 이를 통해 파스트의 작품이 텔레비전에서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에 이르는 미디어의 변화에 긴밀히 개입해왔고, 재연의 기법을 변주하고 심화하여 진실과 사실에 대한 구성주의적 입장을 동시대 정치 및 미디어 문화에 대한 생산적인 논평으로 연장해왔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장치를 확장된 디스포지티프의 방식으로 재창안해왔음을 밝힌다. 이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파스트의 초기 작품은 물론 신작 <차고 세일>을 조명함으로써, 파스트의 작품이 21세기 이후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경향인 ‘다큐멘터리 전환’의 풍부한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예시해왔음을 주장한다.
소설가 톰 매카시는 「결혼의 신과 축혼가」에서 오메르 파스트의 신작 <차고 세일>을 분석한다. 오메르 파스트의 <차고 세일>은 얀 반 에이크의 회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에서 시작하여, 화자의 이야기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와 기억을 중첩한다. 톰 매카시는 신화와 문학의 오래된 소재로서 방해받은 결혼식,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와 그로부터 유래된 처녀막hymen의 막과 스크린이라는 겹 등의 소재를 잇고 풀어내며 <차고 세일>의 이면을 펼쳐낸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전시 기간 중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의 녹취록이 실렸다.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는 각각 이나라, 곽영빈과 작품 및 전시에 관한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작품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면적인 생각을 관객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예술가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대화를 통해 이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질 것이다.
■ 책 속으로
두 작가의 작업에서 역사적 외상의 기억은 이렇듯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민간인과 군인이 구분 불가능해진 결과로 발생한 ‘양민학살’과 내전의 기억이 9·11이 촉발한 전 지구적 내전과 겹치는 과정은, 이후 전쟁이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경우에서조차 수많은 경계가 무화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렇게 이들의 작업에서 일과 노동, 과거와 현재, 인간과 비인간,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꿈, 진실과 거짓은 서로 삼투하며 경계를 넘나든다. (곽영빈, 「눈먼 과거와 전 지구적 내전의 영원회귀」, 81쪽)
영화관의 스크린은 현실 세계를 향한 ‘창’인 동시에 우리가 그 창을 바라보고 있음을 ‘투명하게’ 비춰주고 있다. 스크린은 닫힌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가상의 창문이다.
그러나 갤러리는 항상 열려 있다. 영상 작품이 전시될 때는 적당한 어둠이 조성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기와 빛이 흐른다. 들어오는 자와 나가는 자가 교차되고, 안과 밖이 뒤섞인다. (남수영, 「전시되는 풍경들의 빛과 공기 … 그리고 뒤따르는 현전의 인식들」, 192쪽)
1948년 여수, 1966년 남베트남, 2014년 진도 맹골수도, 세 개의 시간, 세 개의 장소, 세 사람을 파도로 연결한다. 세월호를 집어삼켰던 진도 앞바다,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람들을 집어 던졌던 여수 앞바다,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남베트남 앞바다, 이곳에는 한결같이 파도가 일렁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흥순은 제목을 정하지 않고 따로 있는 세 인물을 잇는 작품을 만들어 가던 중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파도』(1931)를 알게 되었고, ‘파도’라는 제목이 이 작품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나라, 「역사의 운율, 색채의 기미」, 227쪽)
과거의 사건을 다른 미디어를 통해 다시 구성하는 기법을 포괄하는 재연은 파스트의 많은 작품에서 활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재연은 특정 사건에 대한 미디어 자료가 부재하거나, 심리적 여파가 너무나 강력하여 자료의 재현을 벗어나는 사건을 다룰 때 활용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불확정성의 맥락에서 볼 때 재연은 자료의 부재 또는 사건의 재현 불가능성을 보충하는 기능을 넘어 자료, 증거, 사실, 진실의 부분성, 불완전성, 개작 가능성을 표현하거나, 기억을 전달하고 구성하는 발화자와 매개자의 주관적인 차원을 전제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폭넓게 활용되어 왔다. 파스트의 작품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 놓이지만, 초기 작품부터 그의 재연 활용 방식은 과거 사건의 단순한 극화나 실제 당사자를 배우로 대치하는 것을 넘어선, 훨씬 섬세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다. (김지훈, 「오메르 파스트와 다큐멘터리 불확정성」, 322~323쪽)
거울은 쌍을 만든다. 여러 거울을 함께 설치하면 증식하여 종잡을 수 없는 미로를 생성하니, 단 두 점의 거울로도 사물을 무한히 배로 늘릴 수 있다. 오메르 파스트의 신작 〈차고 세일〉(2022)은 진정한 거울의 방으로, 차고 안과 주변을 배경으로 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결혼에 대한 이중의, 이원화하는, 도플러 효과가 입혀진 연구다. (톰 매카시, 「결혼의 신과 축혼가」, 356쪽)
예전에 작업 초기에는 미술계 선배들한테 작업이 ‘멜랑콜리하다’ ‘소박하다’ 또는 ‘체념의 미학이냐’ 같은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게 저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서 10년은 좀 더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의 작업을 했는데, 그게 좋은 면도 있지만 저한테 맞는 옷은 아닌 것 같았어요. 감정, 마음에 대한 기록의 측면도 있는 것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 저는 소박한 게 좋거든요. 나중에 돌아보면 이 소박한 것들이 쌓여서 또 하나의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임흥순과의 대화」, 380쪽)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실이라는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을 키워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진실이란 근본적으로, 즉각적으로, 항상 깨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메르 파스트와의 대화」, 411쪽)
■ 차례
책머리에
2022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 — 송가현
눈먼 과거와 전 지구적 내전의 영원회귀: 오메르 파스트와 임흥순의 차이와 반복 — 곽영빈
임흥순
작품 소개
전시되는 풍경들의 빛과 공기 … 그리고 뒤따르는 현전의 인식들 — 남수영
역사의 운율, 색채의 기미 — 이나라
오메르 파스트
작품 소개
오메르 파스트와 다큐멘터리 불확정성: 미디어, 재연, 디스포지티프 — 김지훈
결혼의 신과 축혼가 — 톰 매카시
아티스트 토크
임흥순과의 대화
오메르 파스트와의 대화
글쓴이 소개
전시 크레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