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가장 젊은 고전의 탄생!
충실한 원본 검증, 세련된 장정
문학과지성사가 펴내는 한국 현대문학 명작 시리즈
시대가 원하는 한국 현대소설 시리즈 〈문지클래식〉.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도서 중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들로 구성된 〈문지클래식〉은 ‘고전classic’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동시에 현세대가 읽고도 그 깊이와 모던함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시리즈이다. 한국전쟁 이후 사회의 모순과 폭력을 글로써 치열하게 살아내며, 한편으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인류사적 과제를 놀라운 감각으로 그려낸 한국문학사의 문제작들이 한데 모였다. 의미적 측면에서도 대중적으로도 폭넓게 사랑받으며 지금까지 중쇄를 거듭해온 문학과지성사의 수작들로, 그간 우리 문학 토양을 단단하고 풍요롭게 다져온 작품들이다. 현대적 가치를 새롭게 새기고 젊은 독자들과 시간의 벽을 넘어 소통해낼 준비를 마친 〈문지클래식〉이 앞으로 우리 사회 가장 깊은 곳에 마르지 않는 언어의 샘을 마련하리라 기대해본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란 다 그렇게
참혹하고 추악하고 끔찍한 것들이어야만 했을까?”
폭력으로 훼손되고 환상으로 기워진
우리 모두의 1980년
“여전히 분노 자본을 간직한 몇 되지 않는 현직 작가”(김형중)로서 특유의 파괴적인 작품 세계를 직조해온 백민석의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가 아홉번째 〈문지클래식〉으로 출간되었다. 1995년에 초판 발행된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작가의 첫 소설로,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플라스틱맨』 등으로 이어지는 이후 작품들의 뿌리가 되었다. 발표 당시 “썩은 세상에 대한 속임 없는 드러냄과 현란한 젊은 문체, 발랄한 감수성”으로 주목받았던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실험적인 형식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폭력이 개인의 영혼에 어떻게 끼어드는지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 전래의 문학적 풍속을 일거에 일그러뜨”(김병익)렸으며, 2021년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50편에 꼽히기도 했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주인공들은 1980년 철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때 ‘1980’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는 “한 사회, 한 나라 구성원 전체에 작용하는 훼손, 결핍”인 5‧18을, 철거촌이라는 공간은 가난과 계급 차별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소설 속 인물들은 폭력적인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부도덕과 비합리로 얼룩진 1980년을 통과하며 자라나고, 그 기억을 ‘태생’처럼 새긴 채 어른이 된다.
1980년은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흑백 화면만을 접해온 사람들에게 화려한 빛깔을 뽐내는 유색 만화영화의 등장은 실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이, 우리 소풍 간다』 속 인물들은 컬러텔레비전이 송출하는 만화영화 이미지에 단순히 매료되고 빠져드는 차원을 넘어 아예 이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며, 실제 이름 대신 ‘샐리’ ‘딱따구리’ ‘벅스버니’ ‘일곱난쟁이’ ‘뽀빠이’ ‘마이티마우스’ ‘집없는소년’ ‘손오공’ 등 만화영화 캐릭터의 이름에서 따온 별명으로 불린다. 이들의 삶 구석구석에 만화영화 이미지가 엉겨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허상에 기대어야만 할 정도로 암울했던 당대의 현실을 환기한다. 형형색색의 만화영화 이미지로 구축된 이들의 환상은 잠시 놀다 떠나가는 놀이터라기보다는 절실하게 찾아낸 도피처에 가깝다.
그러나 컬러텔레비전이 펼쳐 보이는 세상은 “브라운관 안의 전자총으로 쏘아대는 전자빔이 만들어낸 수많은 휘점, 즉 빛의 점들에 불과한” 허구다. 요술 봉, 망토, 시금치 등만 있으면 얼마든지 격랑을 몰아낼 수 있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느닷없이 닥쳐오는 부조리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만화영화 속의 환상은 잔인한 현실에 얽혀 들며 기괴하고 무질서한 환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름답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그곳으로
헤이, 우리 소풍 간다
21세기는 언제나 환함과 매끄러움을 추구하며 부족함도 흠결도 없는 양 깔끔하게 정돈되길 원하고, 이에 오늘날의 풍경은 언뜻 아프고 구지레했던 과거와 영영 작별을 고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친구들’은 차를 몰아 “씹고 난 껌처럼 버려지고 누군가의 구두 밑창에 붙어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져버린 곳”으로, 아름답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소풍을 떠나며 현재를 가로지른다. 난폭한 차바퀴는 “기름지거나 고상한 대상,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 안전 강박적이고 규칙 강박적인 평균의 삶”(김형중)에 균열을 내 시대의 살갗을 찢어 환부를 열어젖히고, 이렇게 다시 되돌아온 “망각된 과거”는 작가가 산문집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말했듯 “그리 희극적이지도, 여유롭지도 않다”. 생채기를 매만지며 우리는 현재가 과거로부터 ‘건너온’ 것이 아니라 ‘흘러온’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책의 끝머리에서 작가가 밝힌 대로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과잉의 소설”이다. 다만 이 과잉은 필연적이다. 부정과 폭력으로 과잉되어 있던 시절의 이야기는 과잉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오롯하게 발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으로부터 43년이 지나 또다시 돌아온 5월, “민중도 리얼리즘도 시민도 모더니즘도 그 위력을 잃어가던” 1995년을 강타했던 『헤이, 우리 소풍 간다』가 지금 여기의 한국문학장으로 다시 “온다. 온다. 오고 있다”(김형중).
■ 책 속으로
되새김질하고 싶지만 되새김질할 만큼 좋았던 시절이 우리에겐 존재치 않는다는 걸, 우리 삶이 더는 어찌할 수 없을 만치 헐렁해져버렸다는 걸, 알아,
그래, 알아, 이 모든 앎 뒤에 찾아오는 것, 바로 그것을 알아,
모든 앎 뒤에 찾아오는 바로 그 빌어먹을 것들, 딱따구리들을 알아, (pp. 99~100)
……헐린다고 해서 뭐든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걸까?
응?
K가 희의 두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다시 묻는다, 응?
그냥……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곳인데도 걸어 올라오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 왜였을까?
아프고…… 왜 이렇게 이곳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p. 165)
알겠어? 문 안쪽의 얼굴은 광기와 폭력으로 일그러져 있고
문 바깥의 얼굴은 적의와 세상의 모든 악덕으로 찌그러져 있어, 알겠어?
바로 딱따구리들처럼
이 딱따구리, 바로 나처럼
우린 선택할 여지가 없는 거야, 문을 열고 어느 쪽을 향해서더라도 비명을 지를 수밖엔 없는 거야, 바로 우리 자신의 얼굴을 향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모두 같은 쪽의 다른 표현일 뿐이야. (pp. 173~34)
오늘 하루의 딱따구리 순례는 끝났지만 또 알아? 어느 한순간 이 거대 도시의 심층에서
불쑥 또다시 튀어나올지! 콧물을 질질 흘리고 눈곱을 뚝뚝 떨구며 딱─ 딱─ 재치와 광기로 번뜩이는 부리를 맞부딪치면서.
바로 우리 퐁텐블로 코앞에, 우리 퐁텐블로 면상 앞에! 내일 혹은 바로 모레에. (p. 305)
■ 차례
산책하는 사람들
장화 신은 토끼
앰뷸런스가 온다
고아들의 노래
태생들
꿈, 퐁텐블로
잊힌 만화의 주인공들을 위해
물댄동산
슈퍼아빠 슈퍼엄마
저택(低宅)
해설 / 그것이 온다_김형중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