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없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83

응우옌후이티엡 지음 | 김주영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3월 16일 | ISBN 9788932041414

사양 변형판 130x200 · 468쪽 | 가격 18,000원

책소개

“망할 놈의 인생이지만 기막히게 아름답네요”

베트남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응우옌후이티엡
짧은 문장에 담은 절제된 표현과 대담한 묘사
근대적 개인에 천착한 불온하고 도전적인 작품들

20세기 베트남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응우옌후이티엡의 소설집 『왕은 없다Không có vua』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83번으로 출간되었다. 『왕은 없다』는 베트남 전후 문학을 대표하며 개혁 ․ 개방 시대의 베트남 문학을 견인한 작가로 손꼽히는 응우옌후이티엡의 단편소설 15편을 모은 것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집이다.
돈 잘 버는 가장이지만 밥 먹듯이 사람들과 다투고 며느리를 훔쳐보는 끼엔 영감(「왕은 없다」), 예편 후 돌아온 집에서 목격한 비인간성에 무력감을 느끼는 퇴역 장군(「퇴역 장군」), 원숭이 사냥에 나섰다가 암컷 원숭이의 집요한 추격에 쫓기며 인간의 이중성에 시달리는 노인(「숲속의 소금」) 등. 전쟁과 민족 같은 거대 담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벗어나 마침내 발현된 응우옌후이티엡의 소설 속 ‘개인들’은 급변하는 세상을 방황하며 욕망, 고독, 권태, 부조리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어부, 농사꾼, 소수민족, 군인, 거지, 사냥꾼, 유랑인, 벌목꾼, 교사, 시인, 똥 시장 주인 등, 작가는 정형화되지 않은 인물들과 그들 사이의 갈등, 양면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잃어버린 개인과 인간성 회복의 시작을 보여준다.

“응우옌후이티엡의 「퇴역 장군」을 얻을 수 있다면 내 인생을 모조리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_응우옌카이(호찌민상, 동남아문학상 수상 작가)


불온한 문학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작가, 응우옌후이티엡

“1986년에 문학 ․ 예술 분야의 개혁 ․ 개방 정책이 시행된 후 새로운 작가들이 다수 등장하여 독창적인 작품들을 속속 발표했지만, 그들 중 문학적 완성을 이룬 걸작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작품은 응우옌후이티엡의 작품이 유일하다.” _라응우옌(문학평론가)

응우옌후이티엡은 기나긴 사회적 암흑기에 억압되어온 개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하면서 제도권이 아니라 시대에 부응한 ‘불온한 문학’을 선보였다. 등단 다음 해인 1987년에 발표한 「퇴역 장군」은 민족 해방 전쟁의 주역이었던 한 장군이 퇴역 후 시장경제 사회로 돌아와 목격하게 되는 비인간성과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전장으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응우옌후이티엡 현상’을 불러올 정도로 반향이 컸다. 표제작인 「왕은 없다」 또한 전통적인 가족의 붕괴와 무너져가는 가장의 권위,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풍자적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여러 차례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 이 외에 「숲속의 소금」은 원숭이라는 대상을 쫓아 사냥에 나서면서 선과 악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복잡한 내면을 잘 보여주고, 「강 건너기」는 함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승려 · 연인 · 모자 · 골동품 상인 · 교사 · 시인 · 도둑 등 인물 각각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며, 「도시의 전설」은 복권 당첨에 집착하다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가난한 청년의 심리를 밀도 있게 그려내며 도시인들의 욕망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응우옌후이티엡의 이와 같은 불온하고 도전적인 면모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정치 · 사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베트남 문학이 잃어버린 개인, 붕괴된 인간성의 회복을 향한 시작을 열어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예리한 통찰과 비판적 사유,
짧은 문장 속 절제된 표현과 대담한 묘사

응우옌후이티엡의 작품들은 짧은 문장 속에 절제된 표현과 대담한 묘사가 돋보이며, 이야기 속 배경과 등장인물 및 소재가 무척 흥미롭고 다양하다. 농촌 · 산간 · 도시를 가리지 않는 작품 속 배경과 어부 · 농사꾼 · 소수민족 · 군인 · 거지 · 사냥꾼 · 유랑인 · 벌목꾼 · 교사 · 시인에 똥 시장 주인까지 다양한 인물 군상을 등장시키는 한편, 민간 신앙 · 불교 · 유교 · 천주교를 넘나드는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 베트남의 전통 풍습 · 문화 · 역사 등이 어우러지는 이야기, 작가의 의도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짧은 시 등, 작가는 다채로운 ‘개인’을 문학 속에 발현하면서 독자들이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사람이 되지 못한 남자의 짧은 생을 그린 「꾼」, 늘 ‘사는 건 참 쉽다’고 말하던 교육시찰관의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을 보여준 「사는 건 참 쉽지」는 ‘사람’의 의미와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흘러라 강물아」에서는 신비한 검은 물소를 찾아 나서지만 냉소와 잔인함만을 마주하게 되는 소년의 절망을, 「수신의 딸」에서는 세상을 구원할 성모와 같은 존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결국 사회의 모순과 암울함을 깨달으며 길 위에서 헤매는 주인공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을 표류하는 고독한 개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응우옌후이티엡의 작품은 이처럼 인간이라는 보편성에 닿아 있기 때문에 베트남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각 작품마다 짧은 문장 속에 녹여낸 예리한 통찰과 비판적 사유가 진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할 것이다.


■ 책 속으로

“내가 들고 있는 이 술잔은 바로 인생입니다. 술은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죠. 인생을 받아들인다면 잔을 들어주십시오. 망할 놈의 인생이지만 기막히게 아름답네요. 저기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하여, 녀석의 미래를 위하여.” (54쪽)

“저는 못생겨서 아무도 혼인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남의 말도 쉽게 믿어버리는걸요.” 아버지는 목이 메었다. “얘야, 너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는 게 바로 살아가는 힘이라는 걸 모른단 말이더냐?” 그러한 것들이 아버지가 이 길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전조였다는 사실을 나 역시 알지 못했다. (80쪽)

내가 살던 시대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전쟁은 지나갔고, 모두들 새 삶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오랜 상처들은 점차 아물었고 새살이 돋아났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일거리를 찾았고 희망을 찾았다. 사람들의 물결은 농촌에서 도시로 셀 수 없이 많이 흘러넘쳤고, ‘표산민漂散民’ 계층을 만들어냈다. 나는 자기 운명에 대한, 그리고 몇몇 농민의 운명에 대한 불안하고 걱정스럽거나 또는 가장 궁핍하거나, 가장 갈망과 환상이 가득한 마음을 품고 이 사람들 속에 섞여서 갔다. 저기 등 뒤에 남겨두고 온 것들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말 없는 고향의 강, 마을 입구에 늘어선 대나무들, 이끼 덮인 홍토 조각상 그리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오후의 햇살 속에 쓰러질 듯 비스듬히 찍혀 있었다. 제기랄! 나는 추억에 대고 토악질을 했다. 그것은 재물을 낳지도 못했고, 나에게 아무 미소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곳에는 희망이 없었다. (177~78쪽)

나는 숲속으로 들어가 씻을 물을 찾았다. 샘은 말라 있었다. 돌 틈에서 흰나비의 날개가 어릿하게 흩날렸다. 샘을 따라 거꾸로 계속 올라가다 겨우 몸을 씻을 수 있는 물구덩이를 찾았다. 나는 벌거벗은 채 물소가 몸을 담그는 것처럼 물속에 몸을 담갔다. 물 밑바닥에 썩은 잎사귀들이 많아서 물빛이 짙푸른 색이었고 약간 끈적거렸다. 나는 아플까, 열병에 걸릴까 두려워 오래 씻을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이 되어 죽는다면 정말 인생이 아까웠다. 살아야만 했다. 비록 인생이 수천 번 비참하고, 추악할 뿐 아니라 고달픔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213쪽)

“[……] 배운 자들의 어리석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어리석음보다 만 배는 더 역겹죠.” 내가 물었다. “왜요?” 찌에우 씨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변장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것들은 양심, 도덕, 미학, 사회질서의 이름을 취하죠. 심지어는 민족의 이름까지 취하기도 해요. [……]” (252쪽)

가난한 이들이 먼저 죽고 나서 부자들이 죽었다. 착한 이들이 먼저 죽고 나서 비열한 자들의 차례가 왔다. 반달 동안 후어땃 마을에서 서른 명이 죽어 나갔다. 사람들은 서둘러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묻은 후 그 위에 석회 가루를 뿌렸다. 저승사자가 황토빛 달무리 아래에서 쏘애춤 잔치를 여는 밤이 찾아왔다. 후어땃 사람들은 강한 술과 잘게 찧은 생강에 마늘과 고추를 섞은 것으로 콜레라에 저항했다. 사람들은 엄마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입에 그 물을 몇 그릇씩이나 들이부었다. 아이들은 간과 창자가 긁히고 찢어지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쨌든 삶을 살다 보면 간장이야 여러 번 긁히고 찢어지지 않던가. (313쪽)

“그날도 오늘처럼 월초였어요. 초승달이 마치 참담한 그림처럼 공중에 차갑게 매달려 있었죠. 지금 아름다웠겠다고 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헛된 아름다움과 거짓 풍경만 생각하세요? 선생님은 높은 분이시라 충분히 먹고 잘 입는 데 익숙해서 그런 식의 감정이 생겨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요, 아름다움이란 번식 같은 거예요. 달은 반드시 둥글어야 하고 나무에는 열매가 가득해야 하고 주머니에는 돈이 두둑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뭐든지 이 맥주잔처럼 꽉 차야 하는 거라고요.” (432~33쪽)

목차

■ 차례
흘러라 강물아
왕은 없다
퇴역 장군

숲속의 소금
강 건너기
수신의 딸
벌목꾼들
농촌의 교훈들
후어땃의 바람
도시의 전설
핏방울
사는 건 참 쉽지
몽 씨 이야기
우리 호앗 삼촌

옮긴이 해설·왕이 없는 땅에서 인간을 돌아본 작가 응우옌후이티엡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작가 소개

응우옌후이티엡 지음

베트남 하노이의 타인찌현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프랑스 식민군대의 폭격을 피해 피란길에 올라 열 살 무렵까지 어머니, 외조부와 함께 북부 평야 지대의 농촌 마을을 유랑하며 살았다. 외조부에게 학문과 시를 배웠고, 수년간 천주교 마을에서 지내며 천주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했다. 1970년에 하노이 사범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노이 북서쪽 산간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80년 이후부터 교육양성부와 지도국의 지도측량기술회사에서 근무했으며, 하노이에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1986년 서른여섯의 늦은 나이에 첫 단편을 발표했고 한 해 뒤인 1987년에 「퇴역 장군Tướng về hưu」을 발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이른바 ‘응우옌후이티엡 현상’을 일으켰다. ‘베트남 단편소설의 왕’이라는 별칭답게 50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 프랑스의 ‘예술문화훈장’(2007), 이탈리아의 ‘노니노문학상’(2008)을 받았다.
2021년 3월,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중에 작고했다. 2022년 ‘베트남 문학예술 분야 국가상’과 ‘하노이 작가 협회 평생 문학 공로상’을 수상했다.

김주영 옮김

1939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 서라벌예대를 졸업했으며, 1971년 『월간문학』에 「휴면기」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집으로 『객주』(전9권, 1981), 『아들의 겨울』(1981), 『천둥소리』(1986), 『활빈도』(전5권, 1987),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1988), 『외설 춘향전』(1994), 『화척』(전5권, 1995), 『야정』(전5권 1996),d 『홍어』(1998) 등의 장편소설과 『겨울새』(1983), 『새를 찾아서』(1987) 등의 소설집이 있다. 1983년 단편 「외촌장 기억」으로 한국소설문학상, 1984년 장편대하소설 『객주』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 198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6년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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