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가 그려내는 봄의 소설적 풍경
독자에게 늘 기대 이상의 가치를 전하는 특별 기획, 『소설 보다: 봄 2023』이 출간되었다.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로 2018년에 시작되었다. 선정된 작품은 문지문학상 후보로 삼는다.
지난 5년간 꾸준히 출간된 ‘소설 보다’ 시리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물론 선정위원이 직접 참여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수록하여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도 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 보다’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독자를 가장 신속하고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소설 보다: 봄 2023』에는 2023년 봄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인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김나현의 「오늘 할 일」,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 총 3편과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해당 작품은 제12회 문지문학상 후보가 된다. 선정위원(강동호, 소유정, 이희우, 조연정, 최선교, 홍성희)은 매번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작품을 선정한다. 심사평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봄, 이 계절의 소설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결코 설득할 수 없는
‘나’라는 타인을 마주할 때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건 언제나 자기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 누구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만큼은 깊이 이해받길 바라는 마음. 그 모순된 지점이 드러날 때 우리는 “구별 짓고 또 구별지어지기 위해 얼마나 빼곡하게 애쓰고 있는가”(문학평론가 홍성희) 소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화자 ‘나’는 스스로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던 과거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발리의 우붓으로 떠난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선택한 모습만을 선택적으로 마주하면 되기에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40대 여성, 미혼,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 그 언저리. 소설은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나에 대한 정보보다는 일상과 비일상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타인에 대해 더 내밀하게 묘사한다.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재단함으로써 개인의 취향과 기호는 물론 인정 욕구까지 드러내는 것이다.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티니안에서」부터 이국의 정취와 분위기를 생생한 묘사를 통해 보여준 강보라는 이번 작품에서 역시 낯선 공간과 모순된 개인의 심리 이 모든 상황을 오묘하게 비트는 풍자의 해학까지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들도 소설에서는 하나의 허영이 되고 그 화살은 독자에게로 가닿는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모순인가.
“삶의 터전이 단단할수록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것이 모순으로 느껴졌고 일탈마저 특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새삼스럽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 어쩌면 저의 이번 ‘과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인터뷰 강보라 × 최선교」에서
김나현 「오늘 할 일」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닐라라테를 마시는 것뿐
오늘의 다짐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어쩌면 아예 해답이 없는 일처럼 느껴질 때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른 채 방향을 잃고 만다. 소설 「오늘 할 일」의 ‘나’와 ‘선일’은 일상의 균열을 만들지 않기 위해, 결혼할 때 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각자의 다이어리에 적힌 ‘투 두 리스트’를 점검한다. ‘나’의 할 일은 “출근길에 책을 읽는 것, 바닐라라테를 마시는 것, 그리고 일을 맡아줄 업체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현 가능해 보이는 거라곤 ‘바닐라라테’를 마시는 계획뿐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웹소설을 쓰는 ‘선일’ 역시 “원고지 30매”는커녕 그럴싸한 문장 하나 쓰지 못한 채 집 앞 공원을 맴돌며 오후를 보낸다.
신혼부부에게는 아득하기만 한 집 대출금부터 당장에는 계획이 없는 임신 그리고 이제 막 이사 온 집의 소음 문제까지. 이렇듯 두 사람은 그날그날의 다짐을 실천하기도 전에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번번이 실패하고 때때로 타인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식탁 위에 마주 앉는다.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는 일상에도 오도로초밥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재미와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신예 작가 김나현의 탁월한 유머 감각 때문이다. 나와 다르지 않은 소박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당장 다이어리를 펼치고 써야 할 결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조연정 문학평론가)을 통해 올해 봄에는 이루지 못할 결심을 마구 적어보는 건 어떨까.
“저는 그런 인물에 관심이 가고 흥미를 느껴요. 당장 내일부터 안 보더라도 섭섭하진 않은데 어느 날 헤어진 애인처럼 불쑥 떠오르는 사람, 불쾌하면서도 애틋한 사람이요. 앞으로도 소설을 통해 그 사람을 잘 관찰해보고 싶어요.”
「인터뷰 김나현 × 소유정」에서
예소연 「사랑과 결함」
그 애달픈 사랑이
설령 나를 불행하게 할지라도
어떤 사랑은 너무 크고 견고한 나머지 불행이 되어버리고 만다. 소설 「사랑과 결함」은 제목에서부터 사랑이 지닌 한계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더 쉽게 감염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 피를 이어받은 형제자매 간의 사랑 역시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휩싸인 채 사랑 안에 갇혀버린다.
아버지의 누이 고모가 주는 사랑은 어떠한가. 화자인 ‘성혜’는 고모 ‘순정’이 “흠뻑 주는 사랑”을 감당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자신의 엄마를 질투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모를 표면적으로나마 이해하려 하고,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며 집착하는 고모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이내 ‘순정’의 우울과 외로움을 스스로 체화하기에 이른다. “「사랑과 결함」은 여성적 상속과 계승, 그리고 증여에 대한 탁월한 형이상학적 알레고리”(강동호 문학평론가)로 결코 완벽에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랑의 한계를 말하는 동시에 그 본질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의 사랑이 아까울 정도로 불행하고, 또 아름다운 이유는 일상을 지키는 이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고모와의 일화를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예소연의 문장에는 그 어떤 단정이나 확신을 찾기 어렵다. 그저 찰나의 사랑을 흠뻑 만끽했던 순간에 대해 자분자분 꺼내놓을 뿐이다.
“불행한 와중에도 소소하게 삶을 지키는 사건들에 매료되는 편이에요. 행복한 순간은 너무도 짧게 지나가고 마는데, 불행한 순간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지 않나요? 저는 제 마음과 성격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이 불행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예소연 × 이희우」에서
■ 책 속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내는 것은 그 시절 현오와 나 사이에 통용된 은밀한 놀이였다. 우리는 습관처럼 그들을 의심하고 분류하고 비판했다.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친 사람인지, 시대의 흐름 덕에 과대평가받고 있는 건 아닌지, 애초에 부자여서 모든 게 가능했던 경우는 아닌지 꼼꼼히 살폈다. 처음에는 우리와 가까운 문화계 인사들이 주된 대상이었지만 어떤 때는 일종의 반작용으로, 그저 교양 없고 몰취미한 사람들이 심판대에 오르기도 했다.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그를 보고 있으면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게으른 듯 하지만 어느새 주어진 일을 능청스럽게 해내고,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농담을 던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고 싶다 한들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 자명해 보였다.
―김나현, 「오늘 할 일」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성체를 받을 수 없어. 나는 순정의 단호한 목소리에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순정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어린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절제된 위압감. 하지만 다음 미사 때부터 순정은 눈치를 좀 보다가 자기 입에 넣었던 영성체를 재빨리 꺼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눅눅해진 영성체는 한순간 혀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순정은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자기 입에서 내 입으로 옮겨 죽었고 나는 잘도 받아먹었다.
―예소연, 「사랑과 결함」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인터뷰 강보라 × 최선교
「오늘 할 일」 김나현
인터뷰 김나현 × 소유정
「사랑과 결함」 예소연
인터뷰 예소연 × 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