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를 펴내며
기만의 무해함을 믿지 않기 위해서
이상적인 이야기에서, 기만당한 사람은 진실을 찾아 나아간다.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은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기억과 사람들의 진심 어린 걱정이 자신을 세트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장치였음을 알게 된 후, 온갖 고난 끝에 세트장 문을 열고 진짜 현실을 향해 나간다.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 미셸은 교통사고를 당한 자신을 구하고 벙커로 데리고 왔다고 주장하는 하워드가 외계인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벙커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믿으며 지내다, 가까스로 벙커를 빠져나와 진실을 마주한다. 이때 진실은 정말로 외계인이 침공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워드가 미셸을 구조한 것이 아니라 납치한 것이라는 정황이기도 하다. 하나의 진실을 진실로 확인하는 일은 다른 진실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하는 일과 맞물려 기만의 겹을 명확히 들여다보게 하고, 그 선명한 구도 속에서 진실의 세계를 회피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서게 한다. 세트장 밖 현실이나 벙커 밖 세계가 안락하거나 안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곳은 더 이상 기만이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더 나은 곳이고 더 바람직한 곳이다.
현실에서도 기만이 없는 세계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기만이라는 단어는 흔히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속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할 때 그 ‘가해’의 고의성을 겨냥하여 쓰인다. 그러나 그렇게 한정된 맥락 안에서 이 단어를 마주하는 일은 우리가 매 순간 스스로 참여하고 있는 ‘무해한’ 기만의 메커니즘을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기실 우리의 삶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각종 제도들은 많은 경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에도 동의하도록 유도하고, 그런 방식으로 연루되기를 약속할 때에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서비스와 이득을 제공한다. 법은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의무를 가지지만 데리다가 말하듯 근본적으로 법 수행적 폭력을 행사하며, ‘시민’의 범주를 선명하게 제한하여 법이 배제한 자리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한 제도와 법의 작동 범위 안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기만을 용인하거나 모르는 척 그것에 길들여지며 살아간다. 공적이고 사적인 공간에서 유무형의 자본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전시가 자신을 보여주는 일과 자신을 보이게 만드는 일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자기기만에 근거한 자존감을 주조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겹겹의 층위에서 기만은 아마도 열고 나갈 문이 없는 세트장이거나 벙커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나은 곳, 더 바람직한 곳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곳이 기만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바깥 없는 폐쇄가 문제가 된다.
언뜻 ‘중립적’인, 그러나 수정과 교정 과정을 거쳐 공표한 것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중립적’일 수 없는, 특히나 그 말을 교체하는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다면 ‘중립’일 수 없는 말과 조치 들이 기어이 ‘이후’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침통했던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통치가 기억될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중립’과 ‘애도’라는 말에 새겨진 기만을 지적하고 기만당하지 않는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억은 ‘국가애도기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범위에 묶여버리지 않을까. ‘애도기간’이기 때문에 준비해둔 핼러윈 옷을 입을 수 없었던 기억, ‘애도기간’이어서 검은 옷을 골라 입고 학교에 갔던 기억으로 그 ‘기간’을 떠올리는 아이들에게 애도라는 단어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기 이전에 정해진 시간과 행동 양식에 동참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 잡게 되지는 않았을까. 의도된 기만이 은닉되거나 지워진 채로 켜켜이 쌓여갈 시간을 우려하게 되는 것은, 결국 바깥이 없다는 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 우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듯한 말들의 폭력성과 그 뒤에 숨어 있는 태도를 계속해서 지적하여 말하는 일은 기만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기만의 ‘무해함’을 믿지 않기 위해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 것은 아닐까.
이번 호의 『문학과사회 하이픈』 기획은 최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말의 훼손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하면서 언제나 언어로써 탄생하는 문학의 자리에서 어떤 언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나누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말이 훼손되었다는 감각은 훼손되지 않은 말은 무엇인가, 언어를 오염시키지 않는 말하기 혹은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 물음 앞에서 정치와 법의 언어와는 구분되는 곳에 문학 언어의 자리를 만들고 훼손에 저항하는 언어로서 그것에 전적으로 기대를 걸게 될 때, 우리는 문학의 언어 역시도 기만의 방식으로 작동해왔음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을 다시금 외면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번 기획에서는, 언어라는 공통의 조건과 현실을 들여다보는 여러 시선들이 만나는 자리가 이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분야에서 언어의 힘과 그 훼손 가능성을 상대하며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필자 열한 분께 글을 청하게 되었다.
김동인의 글은 2022년 10월 30일 새벽부터의 기억을 세심히 기록하면서 정치의 장이 참사를 겪고 애도하며 기억하는 방식을 언어적으로 제한해버린 궤적을 꼼꼼히 추적한다. 그는 정치의 언어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쉬지 않고 그 언어의 배면을 경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은의 글은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드러냄과 닫음 두 가지로 세분하면서, 정치의 언어는 공적인 자리에서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발화된다는 점에서 두 작동 방식이 가진 힘이 동시에 강하게 발휘된다고 지적한다.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정치의 언어가 어떤 어휘들을 점유하고 있는가를 진단하는 가운데, 오은은 그 언어의 편협 앞에 마주 서 그것을 견제하는 시민의 언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황호덕은 언어의 현시점을 ‘꿀벌의 언어’와 ‘검사의 언어’로 구분하여 살핀다. 언어가 이해 실현과 권력 행사의 매체가 되어버린 현실을 진단하는 것에 이어 그의 글은, 언어가 그 자체로 한 존재의 생명의 무게를 짊어지는 현실을 전설처럼, 기억처럼 이곳에서 다시 “답사”해봄으로써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움켜쥐고자 한다. 그 믿음은 문학의 언어에 대한 믿음과 가까이 닿아 있지만, 문학의 언어와 작금의 달콤하고 폭력적인 언어의 뿌리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모든 언어의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기능과 역할의 측면에서 오늘의 언어가 훼손되어 있다는 진단하에 어떤 언어를 그 앞에 맞세울 것인가를 적극 고민하는 세 필자의 글은, ‘오염되지 않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들과 굳건히 연결되어 서로를 지탱하는가를 깊이 숙고하게 한다.
다른 한편 정한아의 글은 말이 사용되는 맥락이 변화하기도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직시하면서, 그러한 언어의 사태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의미에 ‘훼손’이 가해졌다는 판단이기보다 단어의 무게가, 가치가, 단어에 담긴 고민이 얼마나 가벼워졌는가 하는 무게의 문제일 것이라고 말한다. 가벼운 말에 맞서 함부로 꺼내어지지 않는 말 속에서 비로소 발화될 언어들을 기다릴 때, 정한아의 글은 언어를 세공하는 자의 태도로 문제의 방점을 옮긴다. 서동진은 최근 감각적 경험의 언어, 신선함을 무기로 하는 신조어나 솔직함을 표방하는 새로운 세대의 언어들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발화 자체를 미학적 방법으로 삼음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언어만큼이나 물신화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자극치만을 극대화한 말들의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말하는 그의 글은 “진실에 대한 의식과 결합하는” 언어를 언급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장-뤽 고다르의 영화 세계를 가로지르며 언어가 그 물질성 자체로서 물리적 공간에 파동을 만들고 세계에 영향을 미쳐가는 일이 반복되는 생생한 현장성을 세심히 살피는 김은희의 글은 의미의 구도를 만들어내려는 욕망 안에서 외려 언어가 ‘오염’된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언어의 순수한 파동이 가지는 힘이 오늘날 어떻게 가시화되고 언어의 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적극 내다보지는 않지만, 그는 언어를 맥락의 논리로 환원하여 보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충분히 드러낸다. 무엇을 중심으로 언어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중점을 두는 이 글들과 나란히 놓이는 이미상의 글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말의 훼손 앞에는 분명 말이 오염되어버린 과거의 흔적이 있고, 기억과 현재 사이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마땅히 말을 아끼게 되기도 하지만, 신중하고 진중한 태도만큼이나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꾸자꾸 말하여 이곳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려는 태도일지 모른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말을 나누는 것, 나누면서 말을 바라보고, 기억하고, 말을 이어가는 자리에 같이 있는 것, 더 많은 말이 나누어지는 자리를 만들어 그 자체로 말을 부르는 자리가 되려는 일종의 속도전은, ‘어떤’ 말이 필요한지와 더불어 말이 ‘계속’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논의가 ‘훼손’과 그 ‘이전’을 생각하는 일에 머물기보다 계속되기 위한 ‘동력’을 만드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할 것이다.
관련하여 정지돈의 글은 언어가 하나의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이동하며 다르게 전유되어가는 과정을 살피면서 본질적인 것과 훼손된 것, 깨끗하고 예쁜 것과 오염되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방식 자체가 전유의 역사를 이루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훼손이 아닌 곳에 정박하기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옮겨 다닐 이 ‘바이러스’ 같은 언어가 지금까지 그랬듯 더 많은 복잡성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이 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역사의 투영으로서 말을 전유하기를 멈추지 않을 시간을 긍정하게 해준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정의가 힘을 가질 때 그것이 마찬가지로 “얼마간 정의를 상실”한 채 배제와 억압의 폭력이 될 수 있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훼손된 것과 훼손되지 않은 것, 폭력과 정의와 같은 대립항을 만들고 둘 중 한쪽에 동일시하는 방식을 반복하지 않는 ‘탈동일시’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훼손’을 말하는 동일시의 지점에서 벗어나 그러한 동일시가 배제하는 장소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곳에서 언어를 발명해나가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바이러스’ 같은 언어의 이동을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한 이동 가능성을 스스로 믿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언어를 어떤 구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외려 그 관계성에 결박해버리지 않으려는 자세일 것이다. 김소연의 글은 그 힘의 방향이 어느 쪽을 향해 있든 언어의 목적이 패권을 잡는 것으로 설정될 때, 거기에 바로 훼손된 말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향해 휘두르는 것으로 언어의 역할을 고정하기를 반복하기보다, 그 반복을 중단시키기 위해 외려 선명하게 말하기에 실패하는 자리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이다. 더불어 김지은의 글은 세 편의 어린이 책을 소개하면서 언어가 언제나 어떤 높이와 경계 안쪽에서 말해지는 것임을 명확히 기억할 때 새로운 언어적 상상력을 펼쳐가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믿고 가치를 부여하는 언어란 결국 세계를 번역한 번역어이고, 그 번역의 과정에서 훼손이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불가피한 훼손의 복판에서도 핵심적인 무엇을 지키려는 마음이 언어를 끝없는 가능성 앞에 놓아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때 그 ‘무엇’이란 말을 권력화하거나 위계화하지 않으려는 반성적 마음일 것이다.
오늘의 언어를 ‘훼손’이라는 감각 속에서 마주하게 된 배경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작업과 ‘훼손’ 다음의 언어를 전망하는 작업 그리고 한 번의 다음이 아니라 계속되어갈 다음들을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는 작업이 나란히 놓여 있는 이번 기획 지면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그러므로 지금 나는 어떤 언어를 쓸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각자의 답일 것이다. 언어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더 많은 말을, 더 다양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 그 많음 속에 무시로 뛰어들 것이다. 그때 내가 믿는 나의 말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말이기를 원하는지 더 꾸준히 이야기해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어려운 시간에도 흔쾌히 언어를 나누어주신 필자분들께 마음 다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언어를 돌아보는 일이 계속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들의 글이 언제나 그 용기를 보여주고 또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에는 나희덕, 이민하, 최하연, 김이강, 김복희, 김리윤, 고선경, 백가경, 차현준의 시와 남현정, 김기태, 주이현의 소설이 엮였다.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난 호까지 두 회에 걸쳐 연재된 황정은의 소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덧붙여 전한다. 소설을 기다렸을 많은 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추후 작가의 품에서 완성된 원고를 단행본으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리뷰란은 지난 계절에 출간된 신간들로 풍성하게 꾸려졌다. 강계숙, 송현지, 정기석, 최가은, 최선교, 강도희, 김대산, 백지은, 전기화, 전청림 평론가의 정성 어린 글은 책을 함께 읽는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다가오는 봄, 작품과 함께 리뷰에 담긴 세심한 시선들을 일독해주시기를 바란다. 평론가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거듭 전한다.
이번 호 지성란은 조민서의 번역으로 미셸 페어의 논문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열망」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의 내부로부터 그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찾아가기를 시도한다. 자유주의적 ‘자유로운 노동자’ 개념과 신자유주의적 ‘인적 자본’ 개념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살피면서 ‘인적 자본’을 둘러싼 주체 감각이 가지고 있는 전과 다른 예속적 성격을 파악하는 논문 전반부의 작업은, 그 예속의 논리를 전유하는 것이 역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저항하는 운동들에 정당하고 유효한 논리적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함께 실리는 번역자 조민서의 글은 미셸 페어의 이러한 작업이 어떤 점에서 독창적인 지점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세심하게 짚어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얼굴을 마주 보게 함과 동시에 ‘전유’라는 방법적 논리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두 글이 독자에게도 울림 있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2004년 제정되어 19회를 맞은 ‘마해송문학상’에는 오늘의 「나 혼자 사춘기」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5월에 있을 시상식에 앞서 심사위원들의 사려 깊은 심사평과 수상자의 다정한 수상 소감을 전할 수 있어 기쁘다. 수상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해 12월 25일 조세희 작가가 작고했다. 한파로 강이 언 날이었다. 1965년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78년 발행한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조세희는, 펜과 카메라를 든 몸으로 ‘난장이’의 현실에 걸어 들어가 ‘낮음’을 강요받는 자리들을 돌올하게 비추고 기울어진 세계의 낙관의 뒷면을 직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남긴 언어들의 곁에 어떤 언어를 나란히 놓을 것인가는 현실의 기만을 꿰뚫어 보아야 할 우리에게 남겨진 물음이고 과제일 것이다. 우찬제의 글 「작은 몸, 큰 고통─묻지 못한 것들에 관하여」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되짚으며 미처 답해지지 않은 물음들을 통해 작가의 빈자리를 가슴 깊이 끌어안는다. 정주아의 「난장이 작가의 꿈과 작은 연못의 미래」는 한국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해왔다고 이야기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작금의 풍경 속에서 다시 읽으며, ‘공감’이라는 말에 깃들어 있어야 할 정직한 눈과 책임에 대해 말한다. 두 글은 작가가 남기고 간 것이 작품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재차 마주 보려는 의지와 용기라는 것을 되새겨준다. 고인이 평온하시기를, 우리의 용기와 함께 그러하시기를 바란다.
편집동인 홍성희
| 하이픈 | 훼손 – 말
김동인 참사가 드러낸 언어의 훼손 ―정치가 망친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김소연 기대어왔던 것들에 기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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