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부재도 의사소통엔 필요한 법입니다.
부재하는 감각은 언제나 실재하는 감각을 욕망하기 마련이니까요.”
직선의 희생자들이여, 마음껏 길을 잃어라
가능성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작가, 나일선 두번째 신작 소설집
2023년 문학과지성사의 첫 한국 소설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상상력을 꿈꾸게 하는 작가 나일선의 두번째 소설집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가 출간되었다. 2016년부터 독립 문예지와 웹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온 나일선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으로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소설의 영역을 발굴해내고 있다.
이 소설집의 제목은 니컬러스 레이의 미완성 유작으로 알려진 동명의 영화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We Can’t Go Home Again」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두 개 이상의 화면을 겹쳐 하나로 만드는 이중 인화 기법을 사용한 실험 영화로서, 시간의 축을 뒤흔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교차를 시도하는 나일선의 소설과 닮아 있다. 작가 소개를 생략하거나 최소한의 정보를 제시하는 나일선의 특징 또한 이른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으나 스스로 잊히기를 택한 니컬러스 레이의 삶을 연상시킨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수록작은 수많은 이름과 그 이름들의 말을 인용하고, 그 사이에 허구를 뒤섞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작가의 존재감을 지워내는 듯한 서술 방식, 뚜렷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장의 나열로 이루어진 그의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 장면에서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게 되거나,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지거나, “본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일선의 소설은 “쓰기로 계획한 글과 아직 보지 못한 영화로 이루어져 있”(작가의 말)으며, 그의 말마따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 머물다 가면 사람에게 남기는 것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 읽을 수는 없지만 계속 보게 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근데 생각해보면 새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우고 싶은 마음 같아요.”
-『소설 보다: 봄 2022』 인터뷰에서
“어떤 이름엔 불을 붙였다
불타는 이름들을 바라보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불완전한 인용이라 맥락이 잘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모든 인용은 불완전하니까, 그런 게 진짜 인용이고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요? 맥락을 절단시키는 거요. (「토요일의 영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소설집 제목과 더불어 수록작의 제목 또한 과거의 작품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것들을 직접 보지 않은 채 언젠가 볼 수 있으리란 믿음과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영사기사를 쏴라!」는 데라야마 슈지의 영화 평론집 제목에서 따온 것이며,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는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가 만든 동명의 영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이다」는 오쿠하라 히로시의 영화가 보고 싶어 쓴 것이지만 그 제목은 다네 콤렌의 작품에서 가져왔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이름 또한 같은 방식을 따른다. 루이스 부뉴엘, 허우샤오시엔, 로베르트 발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마야 데렌, 장뤼크 고다르로 이어지는 파다한 이름들…… 이러한 이름에는 뚜렷한 목적도 특별한 위계도 없다. 작가는 첫번째 소설집 ‘작가의 말’을 대신해 쓴 글에서 “그때는 그렇게 썼지만 지금이라면 이렇게 쓰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소설집 역시 발표 당시 읽고 있던 책이나 보고 있던 영화,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작품 속에 두서없이 출현하고 또 사라진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서평가 금정연은 “어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거라고, 마치 풍경처럼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상우가 말하길」)는 상우의 말을 빌려, “보지 않고도 나일선의 소설을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나일선의 소설은 총을 보면 으레 총소리를 기대하게 하는 개연성을 따르는 대신,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게 “총은 언제든지 쏘아지거나 쏘아지지 않을 수 있고, 총소리가 들리기 위해서 반드시 총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도달한다.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로, 앞 문장에서 뒷문장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롤 책장을 넘기는 익숙한 독법 대신, “건너뛰거나 되돌아가거나 반복하거나 틈에 걸려 넘어지”며 이번 소설집과 조우할 때 더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만났고 얘기를 하고 있다”
삶과는 무관한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도 삶과는 무관할 수 없고 말하자면 그것은 집착인 것만 같고 날씨와는 가끔 대화하는데 날씨는 아무런 말이 없다고 모르는 사람과는 자꾸 약속을 했다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이제는 약속들이 나를 알아본다 (「산책하는 자들은 약속하지 않는다」)
의미를 찾으려 들지 않는 문장에 결국 붙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의해지려는 모든 말이 결국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이 두렵다는 감정은 곧 의미가 생기리란 예감에서 출발한다. 나일선의 소설은 “영화를 이해하는 일 혹은 음악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인데 그 부분에서 항상 실패”(「남국재견에서」)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구어체 혹은 대화체가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의문문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대화’야말로 세계를 거대한 수수께끼로 느끼는 이들이 타인의 존재를 실감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쓰고 보고 듣고 만들다가 이윽고 길을 잃는다. 따라서 그들이 무언가를 예고하는 대목은 그것을 이뤄내리란 각오, 해내겠다는 약속보다 미래를 가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남국재견에서」의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그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발화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 실제로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영사기사를 쏴라!」에서 ‘나’는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한 사람이 오랫동안 시를 쓰려고 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실제로 시를 썼는지, 또는 지금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일선이 축조한 세계에선 “미래가 필요 없는 이야기”(「남국재견에서」)만이 지속될 수 있다.
「토요일의 영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의 ‘나’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이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어디서든 관광객이 될 수만 있다면 장소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관광객의 기분으로 눈을 감고 이 책을 펼쳐 드는 일이다. 나일선의 소설은 첫 장으로 시작해 마지막 장에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각자의 픽션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가깝다. 과거의 나일선이 말한다. “텍스트라는 장소, 그러나 꼭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걸어도 좋다, 걷는 것은 읽는 일이다”(「토요일의 영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일선이 답한다. “길은 스스로 길을 찾게 되는 법이지, 이제는 혼란을 존중해야 해, 그럴수록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아무도 그와 함께 점심을 먹지 않는다」, 『현대문학』 2023년 1월호). 물론 이건 지금으로선 모두 과거의 일이다. ‘산책하는 자’ 나일선은 지금도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 책 속으로
루이스 부뉴엘에게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 스페인에서의 부뉴엘, 멕시코에서의 부뉴엘, 프랑스에서의 부뉴엘. 그리고 이 세 명은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직후 미국의 영화 비평가 리처드 라우드에게 부뉴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가 그의 관점이 되며 결국은 관점이 이끄는 곳으로 가게 되기 마련이죠. 이미지의 무게는 결국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의 무게입니다. 논리적 연결에 필요한 장면일수록 배제하는 편이 좋고 그래야 비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닫혀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으니까.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 산다」
나는 지금도 사람을 잘 모르며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언제나 수수께끼다. 영화를 이해하는 일 혹은 음악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인데 그 부분에서 항상 실패한다. 그런데 결과물은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 그 실패에서 난 얼마나 멀어졌나. 매번 작업이 끝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 실패를 볼 수 있었으면. 그들이 보려고 시도할 때 내가 그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남국재견에서」
극장에 불이 켜졌을 때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노인뿐이었는데 움직이지 않았기에 기도하는 것 같았고 어쩌면 정말 기도였는지도 여기서 곧 영화가 시작되는 게 맞는지 큰 목소리로 물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스러운 듯 자리로 돌아갔다 맹인일지도 몰라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되는 것일까 꼼짝도 하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빛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어 누가 내 뒷모습을 오랫동안 봐줄 것인가 그런 생각은 가능했고 아무도 봐주지 않을 내 뒷모습을 생각하며 그를 한동안 시선 속에 담은 뒤 밖으로 나왔다 그를 깨웠어야 했을까 아니 우린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 「산책하는 자들은 약속하지 않는다」
저와 비슷하네요. 저는 번역자입니다.
반역자다! 반역자는 처음이에요. 여기서 뭘 하고 있죠? 혁명 중인가요?
반역이 아니라 번역을 하고 있어요.
번역이라면 어떤 거죠? 그건 뭘 의미하는 건가요?
단순하게 말하면 삶을 왜곡하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저를 번역해주실 수도 있나요? 「영사기사를 쏴라!」
너 말고 누구도 다신 나를 찾지 않을 거란 생각만이 확고하게 날 붙잡아주는 것 같아, 무언가를 간직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닐까, 그래서 잃은 건 시간보다도 내가 아니었을까, 질문하다 보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기보단 이게 질문이라는 걸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라는 게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고만 싶었지, 사물이 이름이 되는 순간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해,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이다」
■ 차례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 산다
남국재견에서
상우가 말하길
산책하는 자들은 약속하지 않는다
영사기사를 쏴라!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이다
토요일의 영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참고 문헌
해설 | 사물들의 극장·금정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