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저 공허 속 어두운 밤의 내습에 항거했소,
방패 뒤도 똑같이 공허 속의 어두운 밤이었지만.”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의 핵심을 관통하는 시와 산문
「아Q정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가이자,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 「광인일기」 등을 통해 중국문학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 작가로 평가받는 루쉰의 시·산문선 『부엉이의 불길한 말』(성민엽 옮김)이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기존의 모든 권력과 질서를 문제 삼았던 그는 소설가이면서 산문가, 시인이기도 했다. 이 책은 루쉰이 남긴 방대한 양의 산문 가운데 10편을 선별, 그의 유일한 시집 『야초』에 수록된 시 전편을 함께 묶었다. 무엇보다 루쉰 문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루쉰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에 두고 “깔끔하고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문학평론가 성민엽(서울대학교 중문과 명예교수)이 도맡아 엮고 옮긴 이 책은, 루쉰 언어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의 제목인 ‘부엉이의 불길한 말’은 산문시 「희망」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루쉰은 부엉이를 좋아해서, 직접 그린 부엉이 그림을 자신의 책 표지에 쓰기도 했다. 그에게 부엉이는 이미 벌어진 일을 뒤늦게 알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는 존재다. 부엉이를 흉조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존재인 것이다. 루쉰은 이 울음소리를 자신이 추구하는 악성惡聲, 즉 부정적인 세계에 저항하는 비판적이고 전투적인 위악적 언술과 동일시했다. 루쉰의 글쓰기와 문학 창작은 이 부엉이의 울음소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똑같다.” 19세기 헝가리 시인 페퇴피 샨도르가 남긴 이 말을 루쉰은 「희망」에서 두 차례 인용한다. 루쉰을 논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말을 중시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희망은 루쉰의 시와 산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주제로서, 이 시에서는 루쉰이 ‘절망도 허망하다’라는 인식을 통해 절망에 반항하고, 한발 더 나아가 변증법적으로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는 비관적이고 엄혹한 중국의 현실과 대결하면서 비판과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루쉰 자신을 증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말이오,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칩시다,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오.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요. 하지만 혼수상태 속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당신이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깨운다면 말이오,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 텐데, 당신은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소?”
“하지만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죠.” (57쪽)
1904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간 루쉰은 센다이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중국인의 목을 베는 일본군 사진을 보게 되면서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쇠로 만든 방’에 갇힌 중국인의 병든 정신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안은 채 문학에 뛰어든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산문 쓰기는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이어졌다. 전체 작품에서 산문이 차지하는 비중만 보더라도, 루쉰 자신에게 큰 의미를 갖는 장르는 산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의 사상이 변모하는 양상에 따라 이 산문들은 크게 낭만주의 시기(1907~1908)-비판적 리얼리즘 시기(1918~1927)-전환기(1927~1930)-좌익작가연맹 시기(1930~1936)까지 네 단계로 나뉘며, 이 책 『부엉이의 불길한 말』은 이처럼 30년에 걸친 루쉰 사상의 변천사를 조망할 수 있게끔 산문을 선별했다. 그중에서도 이 책이 주목하는 시기는 비판적 리얼리즘 시기로, 수록 산문 10편 가운데 6편이 이 시기에 쓰였다. 당시 루쉰은 과거 자신이 되고자 했던 “영웅이 결코 아니었”(「『외침』 서문」)다며 적막과 허무를 토로하면서도, 여성의 균등한 경제권을 논하는 등(「노라는 집을 나온 뒤 어떻게 되었는가」) 중국의 현실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사람들이 부르짖는 공정한 도리 역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착한 사람을 구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나쁜 사람을 보호해주기까지 한다”(「‘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라는 루쉰의 일갈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때로는 밝은 앞길로 나아가고 때로는 빛나는 과거를 되새기며,
새로운 것은 날로 더 새로워지고 옛것 또한 죽지 않는 것이다”
한편 『부엉이의 불길한 말』에 수록된 루쉰의 시집 『야초』(1927)는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잡지 『어사』에 발표된 산문시 23편에 「제사題辭」를 더해 펴낸 것이다. 루쉰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비판적 태도’를 무엇보다 더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루쉰 문학의 예외가 아니라 핵심이라 할 만하다. 이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이항 대립으로, “친구와 원수, 사람과 짐승,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제사」)와 같이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절망과 희망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 이항 대립은 권선징악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에 승리하거나, 대립이 한없이 이어지거나, 또는 서로 다른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순어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시어들의 긴장과 ‘놀이’ 속에 루쉰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초』를 시로 읽어내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루쉰의 산문시를 산문의 일종으로 여기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는 데 있다. 『야초』에 대해서는 왕후이와 쑨거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이들은 시적 측면보다는 철학적 측면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이 책 『부엉이의 불길한 말』은 『야초』를 시로서 읽을 수 있게끔, 원문의 압운과 리듬, 구두점이나 단어가 배치되는 위치까지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또한 각 시편마다 옮긴이의 해설을 간략하게 덧붙여 시 감상을 돕고 있다.
■ 책 속으로
무릇 한 사람의 주장이 찬성을 얻으면 그 전진을 촉구하게 되고 반대에 처하면 그 분투를 촉구하게 되지만,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그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찬성도 반대도 없으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선 것처럼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하여 나는 내가 느낀 것을 적막이라고 생각했다.
그 적막은 날로 자라나서, 마치 큰 독사처럼 나의 영혼을 휘감았다. (54쪽)
그러므로 노라를 위해서는 돈이,─고상하게 말합시다, 즉 경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유는 물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돈 때문에 팔아버릴 수는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큰 결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늘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이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목전의 사회에서는 경제권이 중요해 보입니다. 첫째, 집에서는 먼저 남녀 간의 균등한 분배를 획득해야 합니다. 둘째, 사회에서는 남녀 간의 대등한 세력을 획득해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이 권력을 어떻게 취득하는지 모르고, 단지 여전히 전투가 필요하다는 것만 압니다. (65~66쪽)
근본적인 문제는 작자가 하나의 ‘혁명인革命人’인가에 달려 있고,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일을 쓰든, 무슨 재료를 사용하든, 모두 다 ‘혁명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샘에서 나오는 것은 다 물이고, 혈관에서 나오는 것은 다 피다. “혁명을 제목으로 쓴 시험 답안지”는, 눈먼 시험관이나 겨우 속일 뿐이다.
그러나 ‘혁명인’은 드물다. 〔……〕 분명한 예는 시인 예세닌의 자살이고, 소설가 소볼도 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더 살아갈 수가 없다!”였다.
혁명 시대에는 “더 살아갈 수가 없다”라고 크게 외치는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혁명문학을 할 수 있다. (114~115쪽)
아직까지 아무도 유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한 장 남기는 게 좋겠지. 그때는 꽤 이것저것 생각해서 결정했던 것 같은데, 모두 집안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었고,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상사喪事를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한 푼이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단, 오랜 친구들만은 예외임.
2. 빨리 입관하고 매장하고 끝내버릴 것.
3. 기념행사는 어떤 식의 것이든 하지 말 것.
4. 나를 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그러지 않으면 진짜 멍청이다. 〔……〕
7.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복수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 것. (133쪽)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이오, 친구─
나 홀로 멀리 가는 것, 당신이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다른 그림자도 없는 암흑 속으로. 오직 나만이 암흑 속에 잠기고, 그 세상이 전부 내 것이 되는 것. (148~149쪽)
많은 꿈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몇몇 친구들은 나의 안락을 빌었고, 몇몇 적들은 나의 멸망을 빌었다. 하지만 나는 안락하지도 않았고, 멸망하지도 않은 채 이도 저도 아니게 살았으니, 어느 쪽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또 그림자처럼 죽어버렸다, 적들조차 모르게, 그들에게 공짜로 누릴 기쁨을 조금도 주지 않으려고.……
나는 흐뭇함 속에서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이것은 아마 죽은 뒤의 내 첫번째 울음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끝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단지 눈앞에 불꽃이 번쩍이는 것 같았고, 이에 나는 일어나 앉았다. (228~229쪽)
■ 차례
산문
악마파 시의 힘
작은 사건 하나
『외침』 서문
노라는 집을 나온 뒤 어떻게 되었는가─1923년 12월 26일 베이징 여자사범고등학교 문예회 강연
눈을 뜨고 보는 것을 논함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
「아Q정전」을 쓰게 된 원인
혁명문학
좌익작가연맹에 대한 의견─3월 2일, 좌익작가연맹 성립 대회에서의 강연
죽음
야초─산문시집
제사題辭
가을밤
그림자의 고별
구걸하는 자
나의 실연─의고체의 새로운 해학시
복수
복수 2
희망
눈
연
좋은 이야기
길손
죽은 불
개의 반박
잃어버린 좋은 지옥
묘갈명
퇴패한 선의 떨림
입론
죽은 뒤
이런 전사戰士
똑똑한 사람과 바보와 노예
석엽
희미한 핏자국 속에서─몇몇 죽은 자와 산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기념하며
한잠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