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장문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1월 3일 | ISBN 9788932041124

사양 변형판 128x187 · 252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모든 길은 토리노로 통한다, 적어도 20세기에는”

멜랑콜리에 사로잡힌 도시
혹은 그 자체 거대한 사회정치적 실험실이었던
토리노의 장대한 초상

“이 도시의 본질적인 성격은 멜랑콜리이다.” 이탈리아의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자신이 성장하고 생활했던 도시 토리노에 대해 한 말이다. “한낮인데도 황혼 녘처럼 느껴지는 잿빛 도시,” 멜랑콜리가 항상 안개처럼 감싸고 있다는 토리노는 대체 어떤 곳인가? 누군가에게 이곳은 철학자 니체가 마부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말을 부둥켜안고 정신을 잃은 장소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시인 파베세와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리노는 100년 동안 자본과 노동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 도시, 반파시스트 지식인들이 자유를 위해 위대한 싸움을 벌였던 도시였다. 20세기의 부유하는 기표들인 기업가와 노동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계급투쟁과 혁명, 이윤과 착취가 토리노만큼 깊고 굵게 역사에 기입된 사례는 흔치 않다. 이탈리아사 및 유럽현대사를 연구해온 서울대 서양사학과 장문석 교수는 『토리노 멜랑콜리』에서 20세기 역사의 강렬한 발전과 투쟁의 경험을 응축하고 있는 토리노의 들끓는 모습을 서사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한편, 이탈리아 변방에 자리한 한 도시의 과거를 지금 되새긴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을 던지며,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반추해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모든 것을”
이탈리아의 디트로이트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 토리노
20세기 토리노는 장대한 산업과 장렬한 혁명이 공존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디트로이트” 또는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라고 불리며, 거대한 자동차 기업 피아트가 포드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생산 조직을 실험하고 있었고,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볼셰비키를 우러러보며 혁명적 선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토리노는 혁명이 있는 디트로이트이자 산업이 있는 페트로그라드였다. 20세기 초반 토리노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정치적 실험실과도 같았다. 토리노는 ‘빈민’에서 새롭게 솟아 나왔던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기업가의 계급투쟁이 전개되는 과정, 즉 자본가들도 독자적인 정당처럼 행동하면서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고, 내부 노선 논쟁을 벌이고, 국가와 특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구체적인 전술을 통해 투쟁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사회의 비전을 갖고 있던 혁신적 기업가들과 혁명적 노동자들은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토리노는 격렬한 계급투쟁과 노사갈등의 무대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 토리노를 특징 짓는 것은 토리노 지식인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되는 고베티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반파시즘의 도시라는 토리노의 이미지는 토리노의 자유주의 전통을 로마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와 대질시키며 파시즘에 대한 반대의 기치를 선명하게 내세운 일군의 토리노 지식인들이 보여준 비타협성에서 솟아 나온 것이었다. 자유주의적인 만큼이나 혁명적이었고, 새로운 변화와 모순을 환대하며 도덕과 진실을 추구했던 이들은 “큰 자유”라고 불리는 자율적이고 혁명적인 자유의 개념이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동맹” 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혁명”이라는 형용모순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베티와 사회주의자 그람시가 연결되고, 자유주의 지식인과 노동자가 결합하여 공장평의회 운동을 벌인 것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토리오 포아는 이탈리아 체스에서 놀라움과 찬탄을 낳는 것이 카발로(기사 말)라고 말하며, 상대방이 예측할 수 있는 직선의 움직임이 아니라, 일상과 관례에서 벗어나 비스듬하게 이동하는 카발로의 움직임이 더 혁명적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토리노의 지식인들이야말로 혁명적 카발로처럼 움직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에는 그 밖에도 긴츠부르그 부부와 레비 가족, 카를로 레비, 에이나우디, 칼비노 등 토리노를 대표하는 걸출한 지식인들의 이름이 등장하여 토리노의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들려준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소.
위기와 멜랑콜리여 안녕.”
망각에의 저항과 기억의 역사로의 변환
우리는 오늘날 토리노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토리노는 더 이상 피아트의 도시가 아니며, 공장이 “투쟁의 대학”으로 기능했던 시절을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곳은 ‘낡은 공간은 죽고 새로운 공간은 태어나지 않은’ 현대 도시의 비극적 참상을 공유하며, 일종의 게토-도시로 전락했다. 어떤 의미에서 멜랑콜리만이 과거의 열정에서 깨어난 토리노의 긴 숙취로 남을 터였다. 토리노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는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일지 모른다. “트라베르소는 이른바 ‘좌파 멜랑콜리’의 창조성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상실한 것을 애도하는 한편, 애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 공간을 회복된 전투성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멜랑콜리가 결여를 응시하며 실패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결여를 채우고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려는 욕구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기억
격렬한 사회적 성장과 진지한 도덕적 성장이 대위법을 이루며 전개된 한 도시의 20세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와 관계된 “최소의 것”을 요구하고, 분산되고 분리된 투쟁만이 이어지고 있는 오늘날, 저 먼 도시의 외침은 하나의 우화로만 남게 될 것인가? 저자는 도시 토리노가, 이탈리아의 성당을 밝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문맹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20세기 역사의 강렬한 발전과 투쟁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문맹자들에게 근대성의 성경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토리노라는 스테인드글라스는 20세기 역사에 내재하는 전형성과 다양성, 그 예외적인 성공과 실패를 환히 비춰줄 것이다. 자본주의가 재편되고 계급이 해체되는 길고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새로운 존재 방식이 등장하게 될 과정을 이해하고 추론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채석장 그라운드 소개
문학과지성사 ‘채석장 그라운드’는 에이젠슈테인의 작업 노트에서 뒤라스와 고다르가 나눈 대화에 이르기까지,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는 해외의 정치·사회·예술 에세이를 소개해온 ‘채석장’ 시리즈를 잇는 새로운 시리즈로, 국내 필자들의 에세이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 소개한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1차분은 『토리노 멜랑콜리』 『경험이 언어가 될 때』 『장소의 연인들』 세 권이다.


■ 책 속에서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이탈리아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Natalia Ginzburg는 자신이 성장하고 생활했던 도시 토리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도 같은 곳에서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한다. “이 도시의 본질적인 성격은 멜랑콜리이다.” 그리고 토리노에 대한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묘사를 통해 멜랑콜리의 감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렇게 작가는 한낮인데도 황혼 녘처럼 느껴지는 잿빛 도시 토리노의 특징을 멜랑콜리하게 드러내고 있다._9쪽

이 책에서 쓰려고 하는 것도 바로 토리노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잊힌 덕성들과 자유들이다. 특히 고베티Piero Gobetti와 그람시Antonio Gramsci, 그리고 무엇보다 고베티로부터 거대한 지적・도적적 영향을 받은 토리노의 반파시스트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자유에 대한 끝없는 열망에 대해 쓰려고 한다. 그런 자유에의 열망으로부터 긴츠부르그의 “큰 덕들”도 생성되었을 것이다. 이 지식인들은 진정 자유주의적인 만큼 혁명적이었고, 진정 혁명적인 만큼 틀에 박힌 규칙과 관례를 혐오하고 새로운 변화와 모순을 환대하며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_16쪽

그런 점에서 토리노는 혁명이 있는 디트로이트이자 산업이 있는 페트로그라드였다. 디트로이트의 은유에서 보듯이 토리노에는 피아트라는 거대한 자동차 기업이 포드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생산 조직을 실험하고 있었고, 페트로그라드의 은유에서 보듯이 러시아 볼셰비키들을 우러러보는 토리노의 다부진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이 혁명적 선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토리노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정치적 실험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_29쪽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링고토의 ‘옥상’이 아니라 ‘바닥’이었다. 압도적인 건물과 옥상의 시험주행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그 배경이 되는 숨이 멎을 듯한 알프스의 장관에만 눈을 빼앗기지 않은 예민한 관찰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특히 새로운 건축물이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심리와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그런 관심에 집중한 방문자들은 링고토가 구현한 내적 원리와 그것이 노동자들과 맺는 관계를 더욱 놀라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예컨대 나폴리 출신의 예술비평가인 페르시코는 링고토 공장이 보여주는 형태의 명료함과 단순성이 완벽하게 “질서의 원리”를 구현한다고 보았다._61~62쪽

이처럼 10년의 세월 동안 공장의 갈등이 지속된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이 “영구 갈등”의 시기에 새로운 투쟁 형태들이 현란하게 등장했다. 당시 미라피오리에서 투쟁을 선도했던 노동자인 팔코네Giovanni Falcone에 따르면, 피아트는 “그 시절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투쟁의 대학이었다.” 이 “투쟁의 대학”이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특히 ‘대학’이라는 표현은 노동자들이 ‘공장’ 안에 고립되지 않고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한다는 의미도 상기시키는가 하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와 욕망을 새롭게 배워가는 공간의 이미지도 연상시킨다._165쪽

그렇다면 1980년 침묵의 가을은 1969년 “뜨거운 가을”에 종지부를 찍으며 피아트 경영진이 헤게모니를 획득한 순간이라고 하겠다. 이제 피아트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완벽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환을 시도할 것이었다. 반면, 노동은 패배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1980~83년에 피아트 해고 노동자 중 300명 이상이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그런 패배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노동의 패배는 가히 총체적이고 영구적이었다. 노동은 자본과의 세력 관계 속에서 벌인 권력 투쟁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는 경쟁에서도 문화적으로 패배했고, 자본은 1980년 이후로 결코 세력 관계의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_189쪽

트라베르소는 이른바 “좌파 멜랑콜리”의 창조성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상실한 것을 애도하는 한편, 애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 공간을 회복된 전투성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역사학자들은 “목격자”이자 “망명자”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한편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투성을 회복하여 기억을 역사로 다시 쓰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만일 멜랑콜리가 결여를 응시하며 실패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결여를 채우고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려는 욕구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_201쪽

이런 결여와 상실로부터 아마겟돈을 겪은 토리노의 멜랑콜리가 유래하는지 모른다. 즉 가져보지 못한 헤게모니에 대한 결핍감, 그리고 지금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이 토리노를 안개처럼 감싼 멜랑콜리의 근원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토리노는 통념과는 달리 보편적인 “실험실”이기보다는 예외적인 “자유 구역”에 가깝다고 포아는 말한다. 다른 경우에 적용될 만한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모순이요 영감의 요소”라는 말이다. 핏빛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이 도시에서는 “갈등과 무질서를 통한 질서의 창출, 다양한 소요와 효율성 사이의 충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그런 창조와 파괴의 어지러운 반복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_208~209쪽

목차

■ 차례

들어가며: 작은 덕, 큰 덕
프롤로그: 모든 길은 토리노로 통한다. 적어도 20세기에는
1장 이탈리아의 디트로이트,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
2장 멜랑콜리여 안녕
3장 가난한 자의 포드주의
4장 내 생애 최고의 해
에필로그: 트라우마틱하고 드라마틱한
나오며: 작은 자유, 큰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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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문석 지음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에서 수학했고, 이탈리아사와 유럽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민족주의 길들이기』 『피아트와 파시즘』 『파시즘』 『민족주의』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국부의 조건』(공저) 『자본주의 길들이기』 등이, 옮긴 책으로 『만들어진 전통』(공역) 『제국의 지배』 『래디컬 스페이스』 『스페인 은의 세계사』 『현대 유럽의 역사』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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