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적 시각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질문을 던지면서 훈련되고 학습된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2015년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N번방 사건 등 여러 국면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둔감했던 문화와 관행에 맞서 여성들은 집단적 목소리를 냈고 이제 페미니즘은 시대정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백래시 역시 만만치 않았을뿐더러 우리의 삶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책 『경험이 언어가 될 때』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책이다.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연대와 공존이라는 가치를 실천해나가기 위해 애쓰는 분투의 기록이다. “경험이 언어가 될 때”라는 제목은 기존의 남성 중심의 언어에서 벗어나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일상화된 폭력을 분별해내고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게 되는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모먼트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이소진(연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페미니즘과 마르크시즘이라는 두 가지 주요 가치를 토대로 나로부터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해가며 계급, 여성, 자본, 시간, 소비 등의 주제를 하나씩 교차시키며 사유해나간다. 저자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면 질문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의 고통에 무감한 것은 아닌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묻고 치열하게 고민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나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부딪히고 깨지고 또 깨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이 책은 그런 치열한 자기성찰의 결과물이다.
계급×여성×자본을 교차시켜 사유하는
페미니스트 노동 연구자 이소진 신작 에세이
“줄곧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특별히 페미니즘을 많이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을 체화하고 있다고 과신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나의 경험도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페미니스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했다.”
이 책은 저임금과 시간 빈곤의 이중 부담을 지고 있는 중년여성의 노동 현실을 조명한 전작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로 주목받은 바 있는 노동 연구자 이소진의 신작 에세이다. 저자는 이 책 『경험이 언어가 될 때』에서 확고한 신념의 운동가 혹은 전문적인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내세우는 대신, 과거 미성숙했던 자신의 모습부터 숨김없이 드러내며 성찰의 발판으로 삼는 고백적 글쓰기를 택한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저자는 자존심만 높고 타자에 대해 무지했는데, 이후 보고 듣고 깨닫는 경험들을 통해 점점 타자를 이해하고 성장하게 된다. 저자는 명민하게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고 주변 세계를 관찰하면서 여러 쟁점들을 짚어나간다.
특히 이 책은 계급, 여성, 자본, 시간, 소비, 생산 등의 주제를 교차시키며 사유해나간다. 남성중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규정지으며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자는 한 남자 후배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타자화란 오직 성별에 따라 일방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대학 시절 부모의 삶과 노동의 문제를 반추하면서는 계급의 문제를, 특히 여성의 삶을 가로지르는 계급의 문제를 좀더 깊이 사유해본다. 금융자본주의 시대는 우리에게 소비하라는 명령을 넘어 투자하라는 명령으로 나아갔는데, 비트코인과 부동산의 투자 경향에서 볼 수 있듯 여기서도 계급에 따른 차이를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 이동권과 육아휴직 같은 이슈를 통해서는 특수를 인정하고 배려하라는 인정투쟁보다는 애초에 배제되었던 존재들까지 포함되도록 보편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나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편이라 생각한다. […] 사회적 약자를 보편으로 설정하면 우리는 모두가 편한 세상에 살 수 있다. 누군가의 불편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 아닌,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계는 가능할까?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기 위하여
이 책은 크게 두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파트 1에서는 페미니스트로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차별을 시정하려는 데서 나아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인식체계의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러한 인식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파트 2에서는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가 세상을 바라본 결과다. 페미니스트로서 노동을 연구하면서, 또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마주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돌봄의 가치나 시간의 문제에 대한 사유가 주목할 만하다. 페미니즘은 실천적 학문이기에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적으로 살아가도록 설득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사고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것. 이 책의 취지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다른 생명이 짊어진 고통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편을,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을 묻고, 그 답을 찾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삶에 적용해야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 타인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느끼는 고통에 내가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나의 삶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옳고 그름이 모든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그리고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변화하는 개념임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리고 […] 우리 모두가 덜 아픈 방식으로 변화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새로운 대화를, 질문과 논쟁을 촉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채석장 그라운드
문학과지성사 ‘채석장 그라운드’는 에이젠슈테인의 작업 노트에서 뒤라스와 고다르가 나눈 대화에 이르기까지,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는 해외의 정치·사회·예술 에세이를 소개해온 ‘채석장’시리즈를 잇는 새로운 시리즈로, 국내 필자들의 에세이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 소개한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1차분은 『토리노 멜랑콜리』 『경험이 언어가 될 때』 『장소의 연인들』 세 권이다.
■ 책 속으로
여성들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어떠한 의미인가? 여성들 사이의 차이, 그 차이들에서 비롯된 목소리 크기의 차이는 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빚어냄과 동시에 어떤 여성들의 억압을 지워낸다. 쉽게 말해, 여성이라는 단일한 존재를 말할 때 부유한 엘리트 여성의 목소리가 여성을 빚어낼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번 더 지워진 여성들은 자신을 인정하라는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인가? (1장 「보편X특수」 40쪽)
나는 우리가 지식을 생각할 때, 그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지식이 어떠한 존재들을 없는 존재로 가려내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지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찰이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특정한 방식을 되돌아봄으로써, 내가 어떠한 맥락에서 권력자로서 지식과 영합하는지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뻔하지만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다. 소수자의 숙명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부터 바뀌어야 남이 바뀌는 법이다. (2장 「지식X권력」 65쪽)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구렁텅이에 빠지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언제나 말을 꽤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질문할 때면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할 때면 늘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나서야, 사람들이 나에게 진실로 궁금한 것을 물어본 것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저 정해진 답을 인정받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성폭력이 권력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나를 궁지로 몰아 ‘남성은 여성에 비해 성욕이 크다’는 둥의 구닥다리 논리를 페미니스트의 입으로,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로 들어냄으로써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3장 「나X너」 76쪽)
마찬가지로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을 묵인할 때, 우리는 어떤 여성만을 대변할 수 있게 된다. 남성중심성을 폭력의 문제로만 받아들일 때 흔히 발생하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은 성폭력이 계급을 가로지른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안전한 동네에서 살 수 있고, 안전한 이동수단(예를 들어 자가용)을 이용할 수 있다. 집값이 비싼 동네일수록 보안이 잘되어 있고 폐쇄회로 카메라도 더 잘 관리된다. 폭력 이후의 상황도 다르게 펼쳐진다. 폭력 이후 어떤 사람들은 폭력이 발생한 공간을 떠날 수 있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 (4장 「계급X여성」 111쪽)
노동에 대한 연구는 시간을 가로지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을 노동의 양으로 측정한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시간으로 측정되며 시간으로 계산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과거 잠에 들어야만 했던 그 시간들, 그리고 일을 할 수 없었던 그 공간들에서도 일을 하거나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4시간 노동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5장 「자본X시간」 122쪽)
그러나 돌봄은 결코 빨라질 수 없다. 돌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느린 속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게 빠르게 움직일 것을 재촉할 수 없다. 모든 세상이 신기한 아이에게, 길가에 시선을 두지 말고 앞만 보고 걸으라며 재촉할 수 없다. 걸음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엘리베이터에 좀 빨리 타라고 타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돌봄은 타인의 상황에 나를 맞추고, 주의를 기울여 타인의 욕구를 읽어내고, 제공해야 하는 일이기에 본질적으로 느린 행위다. (5장 「자본X시간」 142쪽)
결국 문제는 생산이고, 판매하는 구조에 달려 있다. 소비자는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사람이지만, 구조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아무리 우리가 친환경적 소비를 한다 하더라도, 친환경한 소비를 하지 않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단기적인 이윤에 치중하지 않는 생산의 방식을 상상해야 한다. 우리의 이윤을 돈 그 자체에 둘 것이 아니라,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가치들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소비’를 찾을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소비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소비란 없다. (6장 「생산X소비」 171쪽)
■ 차례
들어가며
파트 1
1장 보편×특수
2장 지식×권력
3장 나×너
파트 2
4장 계급×여성
5장 자본×시간
6장 생산×소비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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