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이광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1월 3일 | ISBN 9788932041148

사양 변형판 128x187 · 178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
이내 사라지고 말 장소의 촉각을
미래에 새겨 넣는 연인들의 지리학

연인들의 장소는 지도에 그려질 수 있을까? 『장소의 연인들』은 연인들의 시간이 장소를 어떻게 발명하고 변화시키는지 탐색해나간다. 장소와 연인들의 공동체에 대한 개념적 연구와 여러 소설 텍스트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장소들, 그리고 익명적인 ‘나’와 ‘그’의 시선이 교차하는 일종의 픽션 에세이로, 에세이라는 이 ‘무형식의 장소’ 안에서 어떠한 이름도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는 연인들의 장소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력이 펼쳐진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네번째 산문집.


마주침과 틈새가 만드는 장소들의 몽타주
“그것은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난 흠집이고,
찔린 자국이고, 부식된 쇠붙이이고, 우연한 구멍이다.”
이 책은 연인들의 시간이 장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사랑이라는 사건은 두 사람을 사랑의 무대에 올려놓고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사랑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면 특정한 이름을 갖던 장소, 그 목적과 정체성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던 장소는 임의적이고 잠재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우연한 장소가 연인들의 시간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별성을 갖게 된다. 장소는 사회와 제도가 부과하는 법칙과 물질적 중력에서 풀려나 다른 공간으로 발명되고 변환된다. 연인들은 장소의 유랑자가 되고, 항해사가 되고, 일시적인 침탈자가 된다. 그런데 이 연인들의 장소는 사랑의 행위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연인들의 장소의 특징은 필연적인 사라짐에 있다. 따라서 연인들의 장소에 대한 상상은 일종의 애도의 방식이 된다. 저자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나 블랑쇼의 ‘연인들의 공동체,’ 롤랑 바르트의 ‘아토포스’ 등의 철학적 개념들을 경유해 연인들의 공간이 갖는 이러한 특성들을 설명해나가는 한편, 다양한 소설 텍스트 및 ‘나’와 ‘그’라는 익명의 픽션적 존재 사이를 활보하며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쓰기의 실험을 수행해나간다.

그렇다면 연인들의 장소 또는 사랑이라는 사건의 급진성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사랑이라는 사건의 수행성이 장소를 변형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시간 자체를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장소들의 마주침과 틈새가 만드는 장소의 몽타주는 장소에 다른 리듬을 부여하고, 장소의 상상력은 기억 너머의 남겨진 시간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연인들의 장소는 일상의 시간, 고착화된 역사의 시간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을 넘어서는 잠재적이고 징후적인 시간을 대면하게 한다. 사랑의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정치적, 미학적 리듬을 갖게 된다면, 바로 이런 대면의 순간에서일 것이다.


도래하는 장소로서의 연인들의 장소
저자의 오랜 독자라면 짐작하겠지만 『장소의 연인들』은 하나의 독립된 책이면서도, 고착화된 역사에 반해 잠재성으로서의 사랑과 문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 쪽에 내기를 걸어왔던 저자의 전작들과 흥미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인들의 장소와 사랑에 대한 짧은 텍스트들과 사유가 파편처럼 새겨져 있는 이 책은, 도래할 시간 속에서 일시적으로만 열리는 어떤 가능성에 다가가기 위한 길을 안내하는 색바랜 지도이자, 현실에서는 도저히 축조할 방법이 없는 페이퍼 건축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부표를 영원히 길을 잃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의지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연인들의 공간을 유랑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글쓰기 자체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책의 구성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장소와 연인들의 공동체를 둘러싼 개념에 대한 여러 탐구를 담고 있고, 2부, 3부, 4부는 각각 ‘내밀한’ 연인들의 장소와 ‘개방적인’ 연인들의 장소, 그리고 보다 ‘원초적인’ 연인들의 장소에 대한 상상적 탐색을 담고 있다.


■ 채석장 그라운드
문학과지성사 ‘채석장 그라운드’는 에이젠슈테인의 작업 노트에서 뒤라스와 고다르가 나눈 대화에 이르기까지,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는 해외의 정치·사회·예술 에세이를 소개해온 ‘채석장’시리즈를 잇는 새로운 시리즈로, 국내 필자들의 에세이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 소개한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1차분은 『토리노 멜랑콜리』 『경험이 언어가 될 때』 『장소의 연인들』 세 권이다.


■ 책 속에서

장소들은 사랑의 신체와 같다. 사랑의 감정은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것이지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어떤 공간이 연인들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건의 개입 때문이다. 장소가 없다면 사랑은 구체적인 신체의 사건으로 실감되지 않는다. 사랑의 사건이 ‘함께 있음’의 행위라면, 장소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랑의 사건은 장소 발생적인 성격을 갖는다. 사소하고 우연한 장소는 연인들의 시간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별성을 갖게 된다. 연인들의 장소는 임의적으로 탄생한다.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_9쪽

헤테로토피아는 연인들의 장소를 둘러싼 흥미로운 영감을 제공한다. 연인들의 장소야말로 은밀하게 현실화된 유토피아로서 ‘반공간’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인들의 다락방과 정원은 그들의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하지만 연인들의 헤테로토피아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장소이다. 특정한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장소의 물질적・지리적・구조적 특징 때문이 아니라, 연인들의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_19쪽

몸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거나 또 하나의 피부와 만나 다른 감각이 시작된다. 욕조의 시간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물의 시간이다. 욕조는 연인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완벽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따뜻한 바다로 연인들을 안내한다. 두 사람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따뜻한 바다로의 유영이 시작된다. 두 몸의 부피 때문에 물이 갑자기 흘러넘칠 때, 이미 욕조의 항해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몸속에 함께 들어앉은 쌍둥이 태아처럼 두 사람은 물 위를 유영한다._57쪽

극장은 일종의 무덤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보고 체험하며, 자신들의 일상적인 시간을 가사 상태처럼 정지시킨다. 극장은 객석과 무대가 나누어져 있지만, 어느 순간 객석 역시 무대의 일부라고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무대 중앙이나 앞쪽 객석에 앉아 있을 때 무대 혹은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눈이 이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다. 스크린의 빛 때문에 객석이 밝아지는 순간이면 조명이 켜진 무대에 올라온 듯한 당혹감이 밀려온다. 객석에서조차 삶의 연기는 계속된다. 중세 사람들은 공연 무대를 지상 세계를 넘어선 내세의 공간이라고 믿었다. 무대와 스크린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너머의 세계를 상연한다._100~101쪽

기차역의 시간성은 가독성이 없다. 하나의 장소에는 하나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기억 너머의 형언할 수 없는 시간은 캄캄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다. 기차역의 시간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현기증 나는 개발의 속도감은 시간의 입을 다물게 한다. Y역 주변을 걷고 있던 그와 내가 시간의 뒤엉킴을 경험했다면, 그 장소가 주는 기이한 감각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잠시 살았던 Y역 근처를 떠난 것은 미군부대 담장 안쪽의 벚꽃 잎들이 담을 넘어 비처럼 내리던 봄날이었으며, 그와 함께 그곳을 다시 찾은 것은 12월의 따뜻한 오후이다. 그곳은 기억을 뒤섞는 장소이다._112~113쪽

그것은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난 흠집이고, 찔린 자국이고, 부식된 쇠붙이이고, 우연한 구멍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그곳의 특이한 속성 때문에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어둡다’와 ‘밝다’ 혹은 ‘따뜻하다’와 ‘습기 차다’ 같은 속성들이 그 장소를 연인들의 장소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 연인들의 장소에서 ‘사랑-하다’는 ‘장소-하다’와 동의어이다.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_169쪽

우연한 장소들과의 마주침에 대해 영원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문장을 기입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장소의 압도적이고 광물적인 침묵에 사랑의 문장을 기입하는 것이다. 문장들은 그 장소의 침묵에 가까워지려 한다. 연인들의 장소에 대한 상상은 애도의 방식이 된다. 연인들의 사라진 장소는 날카로운 비문으로 채워져 있지만, 망자의 이름이 없는 묘비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비문은 계속 다시 쓰여야 하지만 진정한 문장 같은 것은 없다. 그 비문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어떤 장소도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물 위에 쓰는 비문과 같다._171쪽

목차

■ 차례

I. 연인들의 아토포스
사랑이라는 장소
헤테로토피아와 아토포스
연인들의 장소 없음

II. 욕조와 우주선
소음에 둘러싸인 방
베란다와 발코니
책과 의자가 있는 방
식물들이 있는 방
계단 아래의 침묵
지하실과 다락방
침대와 뗏목
욕조와 우주선
거울 뒤의 세계
우기의 유리창
우산 아래의 벤치
밤의 골목으로 가려면

III. 테라스의 리듬
밤의 운동장
서점에서 시작되는 일들
테라스의 리듬
다리 위에서 놓치다
자동차의 물리학
언젠가의 카페
두 개의 극장
자연사 박물관 앞에서
익명의 광장
몇 개의 기차역
국경과 공항
비행 중
이국의 거리에서

IV. 동굴에 관한 이론
흐르지 않는 강변에서
멀고 따뜻한 바다
얼굴 없는 돌 아래서
산이라는 섬
당산나무가 있는 숲
사막처럼
동굴에 관한 이론
연인들의 공터
검은 방
우리가 없는 방에서의 포옹
시간 너머의 창문

에필로그: 도래하는 장소로부터
참고문헌
후기: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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