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전쟁이다. 어느 분쟁 지역에서든
악惡의 균열들 속에 선善이 끼어들어 자리 잡는다.
그가 한 일은 악에 약간의 선을 집어넣고
힘과 순수를 뒤섞는 일이었다.”
2018년 뉴 아카데미 문학상(대안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루ru』의 작가,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 장을 연 킴 투이 신작
목탄화처럼 절제된 필치에 담긴 진실, 희생 그리고 사랑……
자전적 소설 『루ru』로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 장을 열며 국제적 작가로 부상한 킴 투이Kim Thúy의 네번째 장편소설 『앰em』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함축적인 문체와 서정적 단장들로 이루어진 이 짧지만 깊은 소설은 역사적 현실로서의 미국-베트남 전쟁과 문학적으로 그려진 그 땅에서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며 “진실, 기억, 인류애와 폭력의 본질”에 대해 관조한다.
베트남의 고무농장, 고엽제 살포, 미라이 민간인 학살,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베이비리프트 작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울리며 시작된 사이공 철수 프리퀀트 윈드 작전, 그리고 운명의 실타래를 잡고 날아간 이국에서의 생존 수단이자 새로운 세계가 된 네일 숍…… 파편화된 진실은 퍼즐 조각이 되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 조각들을 연결하는 실은 앰em이다. ‘앰’은 베트남어 ‘동생’을 뜻하는 단어로, 연하의 사람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돌보는 연대를 상징한다. 작가는 혈연보다 더 진한 관계를 담은 단어 ‘앰’을 통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사랑이 인간의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앰 홍, 사랑과 연대의 이름
루이는 무명 띠로 아기를 등에 업고 다녔다. [……] 루이와 홍의 피부색이 대조적이라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상황과 감정에 따라 그때그때 가족이 형성되는 거리에서는 모두가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에도 이미 익숙해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누군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넘어진 사람은 그 손을 잡으면서 상대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물이 나오는 곳을, 골목의 구석을, 담 밑 자리를 함께 나누면서 서로에게 이모가 되고 조카가 되고 사촌이 되었다. _83~84쪽
‘앰’은 베트남어로 ‘동생’을 뜻하며, 연하의 사람을 부르는 애칭으로도 쓰인다. 주인공 루이는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홍’이라 이름 짓고 ‘앰 홍’이라 부른다. ‘앰’은 전쟁으로 가족이 무너진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거리에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연대를 상징하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어 ‘사랑하다aimer’라는 동사의 명령형 ‘aime[엠]’과 발음이 같다는 점에서,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사랑이 인간의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는 제목이다.
플랜테이션 고무 농장 주인인 프랑스인 알렉상드르와 그의 농장을 파괴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적을 사랑하게 된 마이, 그리고 그들의 딸 떰부터 길에서 만난 가족인 루이와 앰 홍, 베이비리프트 작전 ‧ 프리퀀트 윈드 작전으로 사이공을 탈출한 뒤 타국에서 만난 가족들까지, 이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연결된 운명의 선을 따라 베트남의 고무 농장부터 북미의 네일 숍까지 이동한다. 생존이 최고의 목표이면서도 서로 돕는 전쟁 중 베트남의 일상, 그리고 베트남 이민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네일 산업까지, 등장인물들의 삶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엮여 있다. 이 진실의 조각들을 연결하는 것은 앰em,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희생으로 형성된 ‘인간’의 삶이다.
기억과 망각이 엮어 짠 미국-베트남 전쟁 이야기
다시 또, 전쟁이다. 어느 분쟁 지역에서든 악惡의 균열들 속에 선善이 끼어들어 자리 잡는다. [……] 적이 된 이들은 오로지 이기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똑같이 싸우는 동안 인간성의 여러 얼굴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인간은 강하면서 미쳤으면서 게으르면서 충성스러우면서 위대하면서 비열하면서 순진하면서 무지하면서 경건하면서 잔인하면서 용맹스럽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다. 다시 또. _11쪽
어느 전쟁이나 다르지 않을 테지만, 특히 제국주의적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폭력과 일상적 폭력이 마구 뒤섞인 베트남 전쟁은 앞에 나서서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 외에도 수많은 이름 없는 희생자를 낳았다. 전쟁의 상처는 “네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땅과 인간의 몸에 버티고 있는 “무지개”(고엽제 이름)가 증명하듯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
열 살 때 베트남을 떠나 퀘벡에 정착한 남베트남 출신으로 모국의 근현대사를 다뤄온 킴 투이는 『앰』에서도 전쟁으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만, 전작들에 비해 자전적 배경에서 조금 떨어져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작들이 남베트남 출신의 한 여인을 주인공-화자로 설정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그 삶의 궤적 속에 녹아냈다면, 앰의 경우는 역사적 사건들이 보다 전면에 등장한다. 배경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다음 네 가지이다.
북베트남군의 은신처가 되는 정글을 없애고 식량을 빼앗기 위해 고엽제를 살포한 “랜치핸드 작전”(1962~71), 구정대공세로 남베트남의 여러 지역을 민족해방전선에 빼앗긴 뒤 미군들이 민간인 수백 명을 무차별 학살한 “미라이 학살”(1968), 홀트아동복지회 등 구호단체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사이공에서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첫 비행기가 이륙 직후 폭발하면서 아이들을 포함해 150여 명이 사망한 “베이비리프트 작전”(1975), 베트남전 마지막 날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국인과 베트남인을 헬기로 철수시킨 “프리퀀트 윈드 작전”(1975)이 그것이다.
『앰』의 화자에게 조국은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배에 올라 떠나온 ‘남베트남’이 아니다. 이제 그의 조국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 수탈당한, 명분 없는 전쟁에 뛰어든 미국의 힘에 으스러진, 남과 북으로 나뉘지 않은 ‘베트남’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 말하듯 “이 책 속의 진실은 시간과 공간이 조각나 있고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지만, 킴 투이는 독자들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자기 자신의 진실에 반향할 때까지 흩어져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 한다. 역사로서의 미국-베트남 전쟁과 문학적으로 그려진 그 땅에서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간다. 킴 투이는 그렇게 흩어지고 망설이고 가려진 기억들을 자기만의 실로 꿰어나간다.
이것은 ‘사람’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
조종사는 밤새도록 떰에게 용서를 빌었고, 떰은 밤새도록 그를 사랑했다. 조종사의 눈길이 떰의 눈길 속에 빠져들던 순간 그때까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갈등, 인간과 군인 사이의 갈등이 사라졌다. 마침내 조종사는 사람들의 광기에 맞서 싸워온 자신이 옳았다는, 남아 있는 순수를 지켜내길 잘했다는 믿음을 얻었다. _65~66쪽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네바협약에 따른 분단, 이어 미국이 개입한 전쟁과 통일 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베트남의 역사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보통 사람들의 삶과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지속하는 것도, 총알이 날아가는 곳을 생각하지 않고 전쟁 기계처럼 기관총의 탄창을 비워내는 것도, 군 동료와 정부 ‧ 자국민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니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국의 민간인을 구해내는 것도 사람이다. 킴 투이가 전쟁, 난민 생활이라는 국가적 ‧ 개인적 비극, 고난 속에서도 몸에 새기고 기억하는 것은 인류애이다.
이 소설은 베트남 전쟁(폭력, 화학 무기, 성적 착취)이 민간인뿐만 아니라 전투원들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킴 투이가 이 짧은 소설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았는지, 얼마나 많은 마음과 그리움과 사랑을 담았는지 경외감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킴 투이의 최종 목적은 고발이 아니리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모든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드러난 인류애의 순간이다. 이것이 아마도 혈연보다 더 진한 관계를 담은 단어 ‘앰em’을 통해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사랑하라aime.”
■ 이 책에 대한 찬사
“부드럽고 강하며 우아한 베트남 비단실처럼 베트남의 20세기 역사를 능숙하게 엮어내면서 우리를 베트남 사람들의 삶에 연결하여 그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하도록 한다. 『앰』은 읽고, 공유하고, 연구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독창적이고 혁신적이며 시적이고 잊을 수 없는 소설이다.” _응웬 판 꾸에 마이(소설가)
“진실, 기억, 인류애와 폭력의 본질에 대한 짧고 감동적인 명상이며, 강렬한 예술 작품이다.”
_『커커스 리뷰』
“공포와 아름다움을 병치하여 지속적인 효과를 낸다. 이 작품은 잔혹함을 묘사할 때에도 침착하고 우아하다. [……] 킴 투이의 가장 야심 차고 감동적인 책!” _『퀼&콰이어』
■ 본문 속으로
베트남어 ‘em[앰]’은 우선 가족 안에서 남동생 혹은 여동생을 뜻한다. 두 친구 사이에서 성별과 관계없이 어린 쪽을, 혹은 커플 중에서 여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em[앰]’이 프랑스어 동사 ‘aimer[에메]’의 명령형 ‘aime[엠]’(사랑하라)과 동음이의어라고 믿고 싶다. 사랑하라. 사랑합시다. 사랑하세요. _5쪽
만일 당신이 이 책에 담긴 예측 가능한 광기, 뜻밖의 사랑, 혹은 평범한 영웅주의를 읽으면서 가슴 죄는 아픔이 느껴지거든, 온전한 진실을 알게 될 때 아마도 숨이 멎어버리는, 혹은 행복감에 취하는 순간을 맞게 되리라는 걸 알아주기를. _13쪽
알렉상드르는 분노 속에서 마이를 만났다. 마이는 증오 속에서 알렉상드르를 만났다. _21쪽
10대의 마이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는 투철했지만 사랑을, 사랑의 부조리함을 경계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예고도 논리도 없이 닥치는 마음의 충동이 정오의 태양보다 더 인간을 눈멀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단 한 번의 노크에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_27쪽
지난밤 떰은 어린아이로 잠들었다. 이튿날 깨어났을 땐 가족을 다 잃었다. 천진스러운 웃음에서 혀가 잘린 어른의 침묵으로 단번에 옮겨 갔다. 단 네 시간 만에, 늘 길게 땋아 늘어뜨렸던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이 가죽이 벗겨진 머리들 앞에서 헝클어졌다. _47쪽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이라고 부르지만, 베트남인들에게는 ‘미국전’이다. 아마도 이 차이 안에 전쟁의 이유가 들어 있다. _54쪽
다 익은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새싹이 땅에서 돋아나듯이 타마린드 나무 아래 나타난 아이가 루이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는 종이 박스를, 누군가는 쌀을 넣고 끓인 물을, 또 누군가는 옷을 가져다주었다. 거리의 아이들은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이 눈에 띄면 그냥 돌보았고, 그런 식으로 언제든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가족이 생겨났다. [……] 루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정오의 낮잠에서 깨어날 때 바의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_73~74쪽
무지개는 희망, 기쁨,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미군이 베트남 땅에 쏟아부은 제초제들의 이름 역시 무지개rainbow였다. 어릴 때 떰은 무더운 건기와 몬순의 우기 사이에 난데없이 가을이 생겨나기라도 한 듯 농장의 나무들에서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바로 그 무지개 때문에 암에 걸렸다. _156쪽
살아남아 어른이 된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10년 동안 날씨가 좋은 날이면 무지개색 제초제 8천만 리터가 하늘에서 비가 되어 내리는 광경을 본 뒤였다. 45년이 지난 오늘날, 그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이 심한 선천적 기형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증언하고 있다. 유전자돌연변이를 만들 수 있고 자연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신의 반열에 오를 법한 능력이다. _160쪽
■ 차례
앰
옮긴이의 말 ․ 기억과 망각이 엮어 짠 베트남 전쟁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