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577

박라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11월 30일 | ISBN 9788932041056

사양 변형판 125x205 · 140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감내하고 곱씹으며 벼려내어 발견하는 다른 세계
팽팽한 긴장으로 현생 너머를 향해 뻗어가는 시적 상상력

뒤편의 세계에 함부로 설렌 죄 기울어진 세계에 의탁한 죄 저울에 올린다 흔들린다 사람도 시대도 흔들리며 연명하는 피사의 탑 기분의 햇빛이 질 때 식물 등을 켠다 따뜻하게 구워질 때 세상의 취사병인 시를 받는다 한 현상에서 다른 목숨 다른 이름 아무도 들은 적 없는 메아리를 불러내는 최면술사가 될 것 추위가 따뜻함의 처음이라면 미미한 빛이 행복이라면 가시를 빼낼 시 추운 발등 덮어줄 시를 고집할 것 _ ‘뒤표지 글’에서

시인 박라연의 아홉번째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32년째를 맞은 2022년 끝자락, 겨울로 성큼 들어서는 길목에서 “추운 발등 덮어줄 시”를 들고 찾아온 박라연 시인은 특유의 따뜻함과 섬세함을 담아 이번 시집에서 한층 깊어진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4년 전 출간한 전작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창비)로 제17회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하며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자아에 갇히지 않고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일상의 걱정거리나 괴로움이 사물로 변화하며 자연적·우주적 에너지를 품어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보여줬다”는 평을 들은 박라연 시인은 이번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에 이르러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이제 저는 아니”라고 선언한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되었다고 말하는 시인에게 어떤 시적 변화가 찾아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쪽 세계에서 지금 나를 지지해주고 있다는
입소문을 받았다 그 떨림을 마실 때
모르는 세계이지만 훌쩍 찾아 나서고 싶더라

누가 새벽부터 이쪽을 검색하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나를 어디까지 검색 가능할까,
나도 아직 모르는 세계를 밤새워 다 걸어가서
한없이 넓혀준 누군가가 보고 싶은
오후가 있더라
―「다음의 세계」 부분

4년 전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의 해설에서 “타인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늘리는 것이 그에게는 ‘진화’이다”라고 쓴 김종훈 평론가가 이번 시집의 해설을 연이어 쓰면서, 특별히 박라연의 시적 개성이 형성되는 지점이라 짚어낸 부분은 “사물의 외출” 또는 “이웃”으로 시에 드러난 ‘타자의 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이다. 지난 시집에서 박라연의 시에 담긴 “근시의 시선”(「근시의 천사」)을 이야기하며 “은폐나 회피가 아니라 슬픔을 정면돌파하겠다는” 대면의 용기를 설파했던 그는 이제 박라연의 시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청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선에서 소리로, 보는 이에서 듣는 이로 옮겨 가며 박라연이 가진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무한한 상상력”이 더욱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다. “일인칭에서 이인칭과 삼인칭으로, 내면에서 외부와의 접면으로, 인물에서 세상으로, 현생에서 내생으로” 연장되는 박라연의 시적 상상력이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 놓인 ‘이웃’마저 끌어안으며 ‘너’를 발견하는 “일종의 희생”으로 나아간다는 그의 지적은 박라연 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생에서의 연대보다는 내생에 이어질 인연에 대해 말하며 확실한 현재보다는 불확실한 다른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박라연의 시는 이승과 저승을 모두 거느리고 있는데, 시 속의 화자와 화자의 ‘이웃’들은 “고단한 체험을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감내하려 하고, 현실을 반영하여 개선하려 하기보다는 고단한 체험의 기원을 곱씹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벼림이 이번 생의 소명인 것처럼”

기쁨의 피와 살과 근육을 삶아 조금 더 바쳐야만 외출할 수 있는 무게입니다 본인 빚은 본인이 갚아야만 피가 따뜻한 외출증 하사받습니다만

당신은 여기저기서 살며시 놓아준 카드 온몸을 벼리면 출산은 허용하는 카드 사람 몸이 한 번쯤 새가 된다는 것은 벼린 카드 그 후
―「벼린 카드」 부분

그리하여 박라연의 이번 시집이 끝내 다다른 곳이 ‘벼림’이다. 박라연에게 생은 앞뒤로 열려 있어 현생에 발을 붙이고서도 다른 생을 향하고자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리하려면 육신과의 이별, 인연과의 단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그에겐 곧 시이며, 그런 자유로운 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피가 따뜻한 외출증”인 것이다. 이를 받기 위해서는 “기쁨의 피와 살과 근육을 삶아 조금 더 바쳐야만” 하고, “본인 빚은 본인이 갚아야만” 한다. 그래서 박라연은 “온몸을 벼”린다. 현생에서 내가 사랑하는 연인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본인의 빚은 본인이 갚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을 산다. 그 “벼린 색”으로 “피가 따뜻한 외출증”을 받아 쓴 박라연의 시가 올겨울, 독자들의 추운 발등을 덮어줄 것이다.


■ 책 속으로

이름의 끝에 E가 붙은 빨간 머리 앤의
자주를 알아봐준 그가 좋습니다. 자주의 세계에
왼발을 넣어도 된다면

오늘 만난 자주를 아무나 푸른 기운으로

토막, 토막, 토막 낼 수 있다면 자주 자루를 굴려
마을로 내려오게 할래요. 당신의
눈동자에 넣을 호흡도 빨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습으로부터 사물은 사물의
관습으로부터 외출할 수 있다면

산 채로 자주를 모셔오는 일이

아무나,의 첫번째 의무입니다. 자주 나무 얼굴을
본뜨기 하는 습관도 자주의 한 부위라면

자주를 살려내는 다른 자주를 지켜보는
일이 두번째 그 무엇입니다. 자주 무늬가 두 눈을
부릅뜰 때까지 혀가

성난 이웃을 다듬는 대패가

되는 일이 세번째 그 무엇입니다. 자주 발바닥이
되어 생명체로 우뚝
일어서게 하는 일이 네번째 그 무엇입니다.

허공에 매달려 허공에서 연명할 생이 급습할 때

박나영처럼 긴 밧줄*이 한 번은 되어주는 일이
다섯번째 그 무엇입니다.

어느 날 내가 나를 토막 내어 자주 세계로 굴러,
들어가 자주 나무 얼굴이 되는 일이
나의 마지막 그 무엇입니다

✽깨어보니 마흔에 숨이 멎은 조승연의 심장이 되는 밧줄.
―「우린 자주 자주를 잊곤 해」 전문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전문

볼일이 생겨 바깥이 그리워서 외출하듯 목숨의 문 잠시 잠그고 외출할 수 있는지 문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려줄 사람이 아직은 있는지

기쁨의 피와 살과 근육을 삶아 조금 더 바쳐야만 외출할 수 있는 무게입니다 본인 빚은 본인이 갚아야만 피가 따뜻한 외출증 하사받습니다만

당신은 여기저기서 살며시 놓아준 카드 온몸을 벼리면 출산은 허용하는 카드 사람 몸이 한 번쯤 새가 된다는 것은 벼린 카드 그 후
―「벼린 카드」 전문


■ 시인의 말
스물이 아닌 시절에 요나가 되었다
기쁘다
물고기의 창자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서

돌고래는 죽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닌다
물결에 떨려 나갈 때까지
나의 시가 지키고 싶은 세계다

2022년 11월
박라연


■ 뒤표지 글
뒤편의 세계에 함부로 설렌 죄 기울어진 세계에 의탁한 죄 저울에 올린다 흔들린다 사람도 시대도 흔들리며 연명하는 피사의 탑 기분의 햇빛이 질 때 식물 등을 켠다 따뜻하게 구워질 때 세상의 취사병인 시를 받는다 한 현상에서 다른 목숨 다른 이름 아무도 들은 적 없는 메아리를 불러내는 최면술사가 될 것 추위가 따뜻함의 처음이라면 미미한 빛이 행복이라면 가시를 빼낼 시 추운 발등 덮어줄 시를 고집할 것

하늘의 후사 하늘의 바깥인 이 세상이 돌연사할 수 있는 21C 강바닥 바위에 딱 붙어 연명해도 햇빛에 반사되면 거의 반년은 한 세계를 무지개 밥상으로 들어 올리는 수생식물 ‘마카레니아 클라비게라’의 시 죄와 수치를 세례 줄 시를 쓸 것 아흔아홉 채 허공을 거느릴 것 아흔아홉 채 종루의 종지기가 될 것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살아 있다는 것은 마음이 헤맬 때까지이다
새어 나온다
붉은 오디션
지푸라기와 호들갑
15분 17초
우린 자주 자주를 잊곤 해
베네치아 가방
아직은 우리 집
피사의 사탑
방문객
상상 제조업
요나의 배
네 마음의 이름은 달빛으로
너와 그는
두께

2부 세상의 이마에 꽃,이라는 모자를
너의 다리는 어디까지
드림 파트너
줄리엣의 편지

누구나 추위가 살아 있어서
햇살 단추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삽입곡처럼
시냇가 시냇물에 넣어줘야 해
너라는 카메라
부디 바이칼 호수
나포에서 뉴욕으로
killing travel
세상의 이마에 꽃,이라는 모자를

3부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후회 깊은 집
뜻밖의 배후
첼로의 시간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파양을 알아?
실물입니까
어쩌다 혼디오몽
해녀의 세계
맹세가 의젓해질 무렵
채널 최선주
소리의 내부

우린 실험실의 주야
고지식하게

4부 돈 갈퀴에 걸려서 터져버린 풍선처럼
허풍선이
고라니와 채송화
흐르는 방향에서 좌회전
오징어 게임
이런 날도 오네요
수업 시대
역사
자꾸 베니스 상인의 거울이
다이빙
청자 언니
삐뚤삐뚤한
함부로 부러워하지 않는
빨랫줄
꽃의 귀가

5부 서로를 보고 만지는 순간 다른 시공으로
서열
이브의 아담
엘리베이터가 너를
청하옵건대
성 프란치스코
믿지 못하시겠지만
그날의 한계령
파도 세례
다음의 세계
배웅이 시작될 때
벼린 카드

몬테그로토에 밤이 오면
스며들다

해설
이웃들의 마실・김종훈

작가 소개

박라연 지음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과 석사, 원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와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이 있다. 제3회 윤동주상(2008) 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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