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578

이기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12월 5일 | ISBN 9788932040998

사양 변형판 128x205 · 18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이것이 사랑이 꿈꾸는 장면이다”
소중한 것이 머물던 시간 속 눅눅한 장면을 꺼내
볕에 말리며 다시 사랑하는 시

비가 소록소록 내리던 어느 여름밤, 가족이 저마다의 꿈속을 돌아다니는 동안, 라디오를 들으며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입이 닳도록 발음했던 날을 기억한다. 시는 내 삶에 물방울들이 천천히 창 아래로 모이듯 다가왔다. 이후 모든 형태의 글쓰기가 내 속의 아픔들을 조금씩 소분하고 있었다.
―이기리, 김수영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2020년 김수영문학상을 통해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이기리의 두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 2021)를 통해 “밝으면서도 슬픔을 놓지 않는 이상한 풍경 앞으로 독자를 인도”(김언)하는 세계를 선보인 후 2년 만이다. 전작이 소년 시절의 ‘나’가 겪은 불편한 과거를 들춰보다 생긴 눅진한 감정들의 기록이자 그것과의 이별 선언을 담았다면, 이번 시집은 좀더 단단해진 시선과 솔직한 언어로 소중한 모든 것을 그러모으는 50편의 시를 엮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시집은 제목처럼 젖은 감정들이 조금씩 말라가는 장면들의 집합이다. 아끼던 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자꾸만 올라오는 후회와 분노에 젖어버리기도 하지만 각각의 장면들을 멀리서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제법 잘 마른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열정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양새로 자세를 틀었을 뿐이다. 고통과 상처로 점철되었던 ‘나’를 끌어안은, 사랑했던 것들과의 이별조차 사랑할 준비가 된 시인의 맑은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다.


“풍경이 우리를 가두었다. 이탈할 수도 없다”
한번 들어서면 눈 속에 오래 담기는 순간의 편린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는 불가능한 얼굴과 함께 당신은 있다. 나는 방금 찍은 풍경을 다른 각도로 바라본다. 다른 풍경이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다」 부분

시집 전반에 가장 많이 씌어진 단어는 ‘풍경’이다. 시인 내면에 담긴 여러 모습의 자아가 각각의 심상이 반영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잘 정돈된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낸 것이다. 처음 ‘풍경’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시는 「아포스트로피」다. 이 시의 화자는 모두가 방관하는, 생사 여부조차 불분명한 아이에게 이입하는 유일한 존재다. 아이가 풀밭에 쓰러져 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평온하기만 하다. 호흡은 있지만 위독해 보이는 아이의 “닫힌 눈꺼풀” 대신 화자의 시선이 등장하며 “날개가 왜 버려져 있지 묻는 대신/날개를 누구에게 주면 되지, 묻”는다. 「컵이 서로 붙으면」의 ‘풍경’ 속에는 또 다른 얼굴의 화자가 등장한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억지로 수목원을 걷는 화자는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상태다. 그럼에도 상대에게 “식은 밥으로 만든 볶음밥”을 만들어 먹이며 최선을 다하지만 “두 컵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며 “바닥에 내던지”고 싶다. 「반감」의 화자는 정체불명의 음료를 “한 번만 마셔달라”는 여학생의 말에 한 입 머금은 불순물을 화장실로 가 뱉어내는데, 훗날 ‘탄산수’를 마시며 “목 넘김이 묘하게 불편하여 중독성이 강하다”며 다시 불쾌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사랑한다는 건 기어이 끝장내겠다는 것 [……] 안일한 나날을 등지고 폐허를 개척하겠다는 것”(「갈변하는 과일 속 안온함」)이라며 반항적인 면모를 보이는 화자 또한 앞선 시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시인의 다양한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화려한 치장으로 감추지 않고 여러 각도로 펼쳐 보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랑이 엉키고 나약해지는 춤 기꺼이 추겠어”
더 많이 젖기 위해 조금씩 진솔해지는 언어

잘게 부서진 노을 조각들이 각자의 뺨에 묻어 있다 아무도 털어주지 않고 옷에 붙은 하루를 끄려다가 더 번지기 전에 벗어버리고 빌어먹을 결말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죽을 각오로 사랑한 적 있지요?
―「불꽃」 부분

“부디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말자”(「여백 발화」) 다짐했더라도 여전히 시작(詩作)이란 내면 깊숙한 고통이 방황을 불러오는 것임을 시인은 시집 곳곳에서 담담하게 밝한다. “책임감 없는 상태로 돌아가자”는 선언은 이내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흙비」)다는 말에 순응하며 전복되기도 하고, “어서 시간이 다 지났으면” 하다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이든 할 텐데”(「안식이 온다면」)라며 어그러지는 마음을 탄식하기도 한다. “아무 기분도 없는 하루를 언제쯤 살아볼 수 있을까”(「독립 생활」), 고단한 걱정 또한 계속된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이상 시작점으로 돌아갈 수 없고 공연이 시작된 이상 “표를 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모노레일」) 마지막 시에서 “지금부터 기차를 기다리는 몸”(「다시는 이제부터」)이라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다시금 피력한다. “끝을 내기 위해 시작하겠”다는 전언은 결국 ‘방황’을 끝내려면 ‘다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위도와 경도를 무시하”면서까지 원하는 바를 향해 달려가는 화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주겠”(「유력한 사람」)다고 다짐하고, 더 큰 혼돈이 두려워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첫사랑’이 막상 꿈에 나타나자 키스를 퍼부으며 이렇게 말한다. “파티를 하자! 우리의 첫사랑을 위해!”(「오지 말아요」)
특히 ‘꿈’ 4부작에는 이 시집이 가진 폭발하는 에너지가 유감없이 담겨 있다. 「오지 말아요―꿈 속이기」 「버금가는 날들―꿈 변명하기」 「아주 그만두는 축소―꿈 흐지부지하기」 「이제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하나―꿈 미련하기」가 그것이다. ‘꿈’이라는 현실과 분리된 공간을 솔직하고 대담한 언어로 발화하기에 최적화된 배경으로 설계한다. “총 17층”짜리 “거대한 한옥들이 위로 겹겹이 쌓인 듯한 구조물”은 기어이 찾아온 ‘첫사랑’에 대한 감동 포인트이자 총성이 울리고 ‘첫사랑’이 연기처럼 사라진 후 다시는 찾기 어려워 보이는 장소이기도 하다(「오지 말아요」). “펑펑 울면서 당신의 발바닥을 핥”으면서 “무엇이든 해줄게 [……] 더 비참해질게”(「이제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하나」)라고 하는 ‘나’의 직설적인 고백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다.
다만 시 속 ‘사랑’의 대상을 애인, 사람으로만 한정 짓기에는 시인이 가진 스펙트럼이 무한하다. 이 시집의 화자들이 그리워하는 건 시인의 내면에 담긴 ‘소중한 모든 것’이다. 여과 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시적 대상과 그것에 시선을 두게 된 과정, 그 주변을 에워싼 배경과 온도, 그 밖의 총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는 소중한 것을 둘러싼 무수한 요소 가운데 어떤 편린도 잃을 수 없는 시인의 섬세한 집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빠져나오겠다는 선언은 자꾸만 번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시인의 젖은 풍경들이 잘 마르는 중인 까닭은, 앞선 선언이 또 사랑해서 상처받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지난 상처를 아물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뒷굽이 진흙탕에 움푹 박히도록” “달려가는”(「유력한 사람」) 이기리 시인이 그리는 오늘의 풍경이다.


■ 책 속으로

우리는 목격되지 않았는데 안내받고 있다.
곧 내릴 지점에 도착하게 됩니다. 잠시 덜컹거릴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어쩌면 좋지? 시작이었는데 끝이라니. 우리는 갇힌 풍경을 목도하며 정직하게 앞날의 투명성을 흘려보냈다.
―「모노레일」 부분

얇은 창호지 문 너머로 한 사람의 실루엣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도망칠 곳이 없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생각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첫사랑이었다.
―「오지 말아요」 부분

소년은 돌담을 민다 돌담이 쓰러질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소년이 돌담을 아무 힘으로 밀고 있다 돌담을 밀면 돌담은 밀리지 않고 소년의 몸이 휘청인다 가운데로 돌아오는 몸을 꼿꼿이 펴고 다시 돌담을 밀면 넘어지는 건 소년의 몫이자 운명 [……] 하지만 생각은 도로 휘어져 우리의 책임 없는 생활을 흔들고 생각도 아닌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할 텐데 푸른 하늘 아래에서 소년과 돌담 사이에 소년의 그림자가 섣부른 판단처럼 꽂혀 있다
―「죽은 곁」 부분

엄마는 요새 가스 밸브도 제때 못 잠그고 반찬 통을 엎지르고 컵을 깨고 보온병에 매실이 아닌 간장을 담고 새로 산 옷을 버리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 빠지고 했던 말을 까먹고 또 한단다 [……] 그래도 딸아 아들아 우리 열심히 살자 돈을 모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자 너희들은 나를 의심하게 될 테지만 엄마는 변함없이 너흴 먹여 살릴 궁리를 할 거다 엄마는 그래 단순하고 뻔해 국 새로 끓여 두었다 데워 먹어라
―「엄마의 입맛」 부분

깨끗했던 어제와는 달리 힘껏 더러워진 오늘. 찢긴 백야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그래, 하얀 밤이었지. 차갑고 분주한 속삭임이었지. 그 눈빛이 마지막 애정이었지. 서로를 위해 나빠지겠다는 결심은 진창에 빠져버렸다. 흙비 대신 새똥이, 새똥 대신 지저분한 눈동자들이 터졌다. 오줌이 섞여 있는 시선들. 배설하지 못한 기억들이 시간을 분주히 건너뛰고 있었다.
―「아주 그만두는 축소」 부분

나는 펑펑 울면서 당신의 발바닥을 핥는다
당신은 흔들의자에 앉은 채 편히 자고 있다

무엇이든 해줄게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더 비참해질게

(을/를)
목적어를 삭제하세요
―「이제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부분


■ 작가의 말

낙엽을 쓰는 빗자루,
길가에 낙엽들이 쌓인다.
어떤 낙엽들은 무덤처럼 모여 있다.
저 안에 죽은 것은 없는데
무언가 죽었다고 믿게 된다.
불쑥 겨울이 온다.
길은 꽃과 풀과 낙엽과
죽은 것을
깔끔하게 지우고 쭉 뻗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다.

2022년 겨울
이기리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여백 발화
흙비
번식하는 잠
무언가를 적는 손
꽃꽂이
아포스트로피
극세사
컵이 서로 붙으면
헛것을 보는
모노레일
수양버들
춘수春愁
오지 말아요
히치하이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다

2부
만약 이루어졌을 세계였어도
나는
반감
갈변하는 과일 속 안온함
손을 풀자 연주를 시작하자
버금가는 날들
유월의 일들
불꽃
죽은 곁
환상 충돌
블록 꽃
불순물
나란한 조명
어제오늘
상쇄
독립 생활

3부
증오
열매는 못 봤지만
유산
버리러 오는 춤
여는 기쁨
역광
서른네 장면
자리를 박찰 때 의자를 뒤로 세게 밀지 말기
일회용품에 관한 딜레마
병원 갔다 오는 길
엄마의 입맛
회복하는 자유
아주 그만두는 축소
일상적 배치
이제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안식이 온다면
유력한 사람
여백 화자
다시는 이제부터

해설
총체적으로 이해하기・김정빈

작가 소개

이기리 지음

시인 이기리는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으로 2020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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