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다자이 생애가 녹아든 ‘총결산’이자 작가 생전의 마지막 완결작.
세상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내밀한 희비극적 고백을 담아내며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을 매료시킨, 전후 일본 문학의 영원한 신화!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서른아홉 나이에 요절하며 시대를 초월해 오래도록 청춘의 초상으로 박제되어 우리 곁에 남은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 실격』(유숙자 옮김)이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인간 실격』은 인간 또는 인간 생활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쉼 없이 ‘익살’을 연기하는 한 인간의 내밀한 희비극적 고백을 담아내며, 출간된 지 70년이 훌쩍 지나도록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을 매료시킨 전후 일본 문학의 영원한 신화로 일컬어진다. 특히 다자이의 생애가 녹아든 ‘총결산’이자 작가 생전의 마지막 완결작으로서, 독자들은 끝내 현실이 된 ‘유서’와 다름없이 이 소설을 받아들였다.
알려진 대로 다자이는 20대 후반, 진통제 파비날 중독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젊은 신예 작가의 재능을 일찌감치 확신한 문단의 두 스승 사토 하루오와 이부세 마스지는 논의 끝에 다자이를 입원시키기로 결정한다. 도쿄 정신의학연구소 무사시노 병원. 당시 다자이는 자살의 우려가 있다는 진단으로 인해 어둑한 감금 병동에 강제 수용되었다. 이때의 절망감에 스스로 선언한다, 인간 실격.
이듬해(1937) 발표한 「HUMAN LOST」는 이 입원 체험을 소설화한 것이며, 이 책 『인간 실격』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세상에서 소외되고 고립되어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혼란과 고뇌, 좌절과 파멸을 흥미롭고도 절절하게 그려내는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로 인식되며 특히 청춘들의 크나큰 공감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청춘의 초상. 그러나 다자이의 이 작품은 ‘자유사상, 반항 정신, 파괴 사상’을 표방하는 ‘무뢰파無賴派’라는 틀을 뛰어넘어, 그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고독해진 개인,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냉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이해타산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 그렇기에 세상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내밀한 희비극적 고백을 담은 이 책이 세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더욱 절박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인간’은 ‘실격’될 수 있는가
스물일곱, 삶이 멈춰버린 한 젊은 사회 부적응자의 일대기
이 책 『인간 실격』은 ‘서문’ ‘첫번째 수기’ ‘두번째 수기’ ‘세번째 수기(1·2)’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후기’에 소설가로 추정되는 ‘나’가 등장하고, ‘나’가 빌린 노트 세 권의 주인이 쓴 ‘수기’가 중간에 삽입되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작품의 주인공 ‘요조’라는 캐릭터를 살펴보면, 우선 오바 요조라는 이름은 다자이의 첫 창작집 『만년晩年』에 실린 단편 「어릿광대의 꽃」(1935)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이 단편에는 작가가 좌익 운동을 하다가 한 여성과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죄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게, 짐작이 안 됩니다.(11쪽)
인간과 인간 생활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속임수로서의 익살이 폭로당하고 나서 더욱 깊어진 인간 불신. 이렇듯 『인간 실격』은 다름 아닌 너와 나, 우리 ‘인간’을 다루고 이야기한다. 주인공 요조를 통해 인간의 추한 민낯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고발당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독자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청춘이, 삶이 멈춰버린 한 젊은이의 일대기와 마주한다. 요조는 전혀 악인이 아니다. 사기꾼도 아니며, 사회에 심각하게 해를 입히는 범죄자도 아니다. 그는 요시코와 “결혼해 봄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신록 가득한 폭포를 보러”(113쪽) 가는 소박한 꿈을 지닌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꿈.
현실 세계에 내재하는 선과 악, 미와 추, 그 양면성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그와 세상 간의 소통은 가로막혀 있다. 소통의 부재와 단절. 이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온갖 갈등의 근본 요인이다. 따라서 주인공 요조가 그러안은 문제는, 개인의 고립이 갈수록 심화하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직면한 시대적 과제와도 맥이 닿아 있다. 인간으로서 인간 세상, 일상을 영위하는 삶 속에 녹아들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어버린 한 아웃사이더의 절규. 이 책이 오래도록 독자들에게 공감과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아닐까.
원문 표현에 충실하고, 작가가 구사한 어휘를 그대로 살리는
전문번역가 유숙자의 유려한 번역
현재까지 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추정되며, 민음사, 열린책들, 문예출판사 등 국내 열 곳 이상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번역·출간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그동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만년』 『달려라 메로스』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는 유숙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판 『인간 실격』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가능한 한 원문 표현을 그대로 살려 옮기고자 애썼으며, 더러 본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듯 보이는 부분 또한 작가의 의중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하여 소중히 지켰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장에는 작가의 마음이 배어 있으므로. “그는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정의와 미소』)
■ 책 속으로
즉 저는 인간 생활의 영위라는 걸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셈이 되겠습니다. 제 행복 관념과 세상 모든 사람의 행복 관념이 완전히 어긋나 있는 듯한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신음하며 거의 발광 지경에 이른 적도 있습니다. 저는 대체,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적부터 참으로 빈번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저 자신은 늘 지옥에 사는 느낌이고, 오히려 저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아예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안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번째 수기」, 14쪽)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그런데도 인간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익살이라는 줄 하나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 가까스로 이루어질 법한 위기일발,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첫번째 수기」, 15쪽)
서로 속이면서, 더구나 어느 한쪽도 신기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듯한, 참으로 산뜻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예가 인간 생활에 충만해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저는 서로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특별한 흥미도 없습니다. 저 역시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을 속이고 있거든요. 저는 도덕 교과서적인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서로 속이고 있으면서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 혹은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지닌 듯한 인간이 난해합니다. 인간은 끝내 제게 그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수기」, 25~26쪽)
“시게짱은, 하느님에게 무얼 받고 싶어?”
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시게코는, 시게코의 진짜 아빠를 갖고 싶어.”
섬뜩 놀라, 어찔어찔 현기증이 났습니다. 적敵. 내가 시게코의 적인지, 시게코가 나의 적인지, 아무튼 여기에도 나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어른이 있다! 타인, 이해할 수 없는 타인, 비밀투성이 타인. 시게코의 얼굴이 다짜고짜 그렇게 보였습니다. (「세번째 수기」, 97쪽)
아아! 인간은 서로, 상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완전히 잘못 보고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 여기며,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상대가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게 아닐까요? (「세번째 수기」, 98쪽)
이제 그만 저는, 죄인은커녕 광인입니다. 아니에요, 절대로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아! 광인은, 대개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기 마련이라는군요. 요컨대 이 병원에 넣어진 이는 미치광이, 넣어지지 않은 이는 노멀이 되나 봅니다.
신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인가?
호리키의 그 이상스레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은 채 자동차를 탔고, 그러고는 이곳으로 끌려와, 광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머잖아 여기서 나간들, 저는 여전히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각인이 이마에 찍히게 될 테지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수기」, 141~42쪽)
■ 차례
서문
첫번째 수기
두번째 수기
세번째 수기
후기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