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없는 건 아니야”
코로나19에 뒤이어 학교를 뒤덮은 ‘학폭 바이러스.’
폭력과 고통, 슬픔과 상처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레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청소년들의 감수성에 눈 맞추며 그들의 예민한 성장 과정을 보듬어온 김혜정 작가의 성장소설집 『레아』가 ‘문지 푸른 문학’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코로나19로 뒤숭숭한 학교에 ‘학폭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창백한 머리 박쥐’가 출몰한다면, 학교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강력한 바이러스에 감염되길 바라는 친구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아』에는 난관에 맞닥뜨린 청소년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인생의 파고를 넘어가는 이야기 여섯 편이 오롯이 담겼다. 반납해버리고 싶은 10대의 마지막 고비를 그린 『18세를 반납합니다』와 죽음에 관한 여섯 개의 이야기를 다룬 『모나크 나비』 등에 이은 네번째 성장소설집이다. 겪어본 적 없는 고난과 시린 상처를 대하는 아이들의 방황은 여전하지만, 묵묵한 위로와 지지를 통한 연대 의식은 이번 소설집에서 더욱 돋보이는 주제 의식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친모를 찾아가는 린영에게는 먼저 입양된 언니가 곁에 있고(「물풀의 아이」), 조로증으로 투병 중인 다훈에게는 꿈속에 찾아와 소원을 들어주는 코끼리 시누가 있으며(「코끼리의 방식」), 해체된 가족과 결별한 친구로 인해 방황하는 ‘나/지연’에게는 ‘별’이라 부르던 동생을 호수에 묻어야 했던 ‘그 애’가 있다(「별들의 장소」). 이성이거나 동성인 것과는 무관하게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은형과 민기는 진서의 방황을 기다려주기로 하고(「물범의 시간」), 학폭 바이러스에 맞서기로 결심한 미주에게는 아빠가 외국에서 만들어 보낸 안드로이드 레아가 있다(「레아」). 성장소설집 『레아』는 곁에서 보내는 묵묵한 지지와 위로가 청소년기의 고난과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옆에 있어주는 것,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 나는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없는 건 아니야.”
〔……〕
“미주야, 난 네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넌 아름다웠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거야.”
미주가 저지했음에도 레아는 기어이 나비를 눌렀다. 순간, 레아의 숨이 사그라지고 몸에서 섬광이 일었다. 미주는 자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아니, 몸 안으로 무언가가 훅 들어오는 걸 느꼈다. (「레아」, 199쪽)
표제작이기도 한 「레아」는 코로나 시국이라는 혼란기를 틈타 번지는 ‘학폭 바이러스’ 퇴치기로서, SF 혹은 판타지 상상력이 돋보인다. “학폭 바이러스로부터 자신과 친구들을 구하는 레아는 파란 줄무늬 나비 가득한 정원을 꿈꾸게”(한길자, 함현고 교사) 하는데, “작가는 바이러스, 폭력, 고통, 슬픔, 상처가 난무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감히 불가능의 가능성을 욕망”(이찬, 시인)한다. 안드로이드인 레아는 미주를 폭력으로부터 구제하는 대신, 미주가 폭력의 원천을 스스로 제거하도록 돕기만 한다. 따로따로 입양된 자매의 아름다운 우애(「물풀의 아이」)나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끼리의 이심전심(「별들의 장소」), 그리고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방식과 무관하게 연대하는 청소년(「물범의 시간」)의 모습은 곁에서 함께하는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잘 넘어가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기에.
작가는 『레아』를 묶으며 “가만가만 찾아온 문장들이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괜찮아, 좀더 이렇게 있어도” “네가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없는 건 아니야” 같은 문장들. 이런 문장들과의 “만남은 우연하고 사소하게 일어난 것 같지만 지극한 마음이 이룬 일”이고, “어떤 문장은 한없이 낮고 쓸쓸한 이들을 견디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레아』 속 주인공들 곁에 누군가가 있어준 것처럼, 그리하여 막막하고 힘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처럼, 독자들 곁에 『레아』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 작품 속으로
「물풀의 아이들」
나와 린영은 입양되어 자란 자매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린영의 친모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오고, 나는 린영과 함께 그녀를 만나러 간다. 버스 안에서 린영은 자신이 버려졌던 베이비박스에 다녀왔던 눈 오는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친모를 만나고 온 린영은 비문증으로 보이는 것이 날파리가 아닌 눈송이라는 것과, 자신은 버려진 게 아니고 지켜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뒤로도 그녀는 늘 린영의 주변을 맴돌았다. 눈먼 물고기를 에워쌌던 물풀처럼. 그래서 기어이 물고기로 하여금 물풀의 숨을 기억해내게 했으리라.
린영이 내 품에 와락 안겼다. 나는 린영의 등을 도닥이며 마법에 걸린 눈송이에 대해 생각했다. 소르르 소르르 눈송이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어쩌면 내일이나 모레, 혹은 눈이 쏟아지는 어느 날 린영에게 말해줄 것이다. “괜찮아, 좀더 이렇게 있어도.” (「물풀의 아이들」 33쪽)
「코끼리의 방식」
다훈은 빨리 늙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데, 그 진행이 빨라져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꿈속에 찾아오는 코끼리 시누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러면 더 빨리 늙는다는 걸 알면서도 유치원 친구였던 지유를 만나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던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마침내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다훈은 시누와 함께 대평원으로 탐험을 떠난다.
요정들이 나와 지유를 둘러쌌다. 나는 지유를 과자의 나라로 안내했다. 「꽃의 왈츠」가 흘러나오고 리듬에 맞춰 요정들이 춤을 추었다. 하늘 한 모서리가 열리더니 달빛이 지유에게 쏟아졌다. 나는 몸을 굽힌 채 손을 내밀었다. 지유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리듬에 몸을 실었다. 지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간절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코끼리의 방식」 53~54쪽)
「물범의 시간」
은형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눈길이 가던 진서에게 빠져든다. 진서는 백령도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유학 왔는데, 동성 친구였던 민기의 고백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도망쳐왔던 것. 그리고 진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서의 소개로 알게 된 은형과 민기는 진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털갈이’ 중인 진서를 이해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진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냥 널 알고 싶었어.
순간의 갈피마다 담긴 진서의 마음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다. 진서가 지나온 물범의 시간도 그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네가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멀리 아득한 심연에서 자맥질하는 진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범의 시간」 85쪽)
「별들의 장소」
나는 엄마와 함께 호숫가 별장에서 휴양 중이다. 나를 향해 있던 행운들이 줄줄이 낙하하는 것을 보는 느낌. 아빠가 떠나고, 사생대회에서는 상을 받지 못했고, 최근에는 남자 친구인 윤우와 다퉜다. 나는 카페와 별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 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 애가 초대한 별들의 장소에서 별이라 불렀던 보육원 동생을 호수에 묻어야 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내 안에 들어온 별들로 인해 오래도록 내가 되어갈 것을 예감한다.
“별들이 네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
나는 말했다.
“왠지 이젠 혼자가 아닌 것 같아. 별과 더불어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 애가 말했다.
그 애를 통과해 온 별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별들의 장소에 초대해줘서 고마워.”
잊지 못할 거야,라고 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래, 세월이 잊게 한다고 해도 별들은 기억해줄 거야,라고 그 애가 눈으로 말했다. (「별들의 장소」 109쪽)
「신이 내린 날」
개교기념일이라서 게임과 쇼핑을 하며 자유의 몸이 될 걸 기대하는 나에게 이란성 쌍둥이인 시아가 제안을 한다. 나 대신 우리 학교에 좀 가달라고. 그러면 5만 원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걸 그룹 출신의 배우를 볼 수 있다고. 여자 친구인 단비와의 100일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나는 화장과 가발과 마스크로 변장을 한 채 여자 중학교로 향한다. 그런데, 거긴 내가 생각했던 세상이 아니다.
여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생리 때면 엄마와 시아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놓은 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아빠와 나를 머슴처럼 부렸다. 여자들의 고통과 인내 덕분에 인류가 유지된다나. 아빠와 나는 남자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류는 씨가 말랐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도 뻥끗 못 했다. (「신이 내린 날」 129~130쪽)
「레아」
연재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미주는 자퇴하기로 맘먹고 학교에 갔다가 희영을 본다. 학교 창고에서 나온 희영은 얼룩처럼 번져 있는 반점과 붉은 흰자위, 광기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주를 찾아온 레아의 말에 따르면 창백한 머리 박쥐가 퍼뜨리는 ‘학폭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것. 연재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감염된 희영의 바이러스는 더 강력한 것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구하기 위해서는 창백한 머리 박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제거해야만 했다. 의구심을 품었던 미주도 결국 레아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고…… 학교 창고에 불을 지른다.
미주는 가슴을 활짝 열고 연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순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거짓말처럼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래, 할 테면 해봐. 이제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내 옆에는 레아가 있거든. 레아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게다가 난 연재 네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고 있어. 중요한 건 내가 널 예전의 너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거야. 아니, 꼭 돌려놓고 말 거야. 그 방법을 찾았으니까, 그때까지만 나쁜 짓 하지 말고 기다려. 제발! (「레아」 189쪽)
■ 추천사
궁극의 학교는 존재하는 것일까. 불가능한 꿈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바이러스, 폭력, 고통, 슬픔, 상처가 난무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감히 불가능의 가능성을 욕망한다. 그 욕망은 너머와 상상의 방식으로 환멸과 좌절의 이 세계를 뚫고 일어날 수 있는 조그만 틈에서 숨 쉬고 있다. ‘레아’는 작가가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최선의 방식이다. 뼈아픈 현실에서 일구어내는 작가의 매혹적인 언어와 사유 안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우리가 되어가는 그 가능성의 세계를 만날 것이다. 이찬(시인)
사랑한 만큼 보인다 했다. 작가의 눈에는 물풀의 아이가, 코끼리와 이 세계를 떠나는 아이가, 물범의 시간과 별들의 장소에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야 아이들의 푸른 아픔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창백한 머리 박쥐’가 퍼뜨리는 ‘학폭 바이러스’로부터 자신과 친구들을 구하는 ‘레아’는 파란 줄무늬 나비 가득한 정원을 꿈꾸게 했다. 부디, 우리 모두 자신의 ‘레아’를 만나길!
김혜정 소설의 오랜 독자임이 자랑스럽다. 한길자(함현고 교사)
■ 차례
물풀의 아이
코끼리의 방식
물범의 시간
별들의 장소
신이 내린 날
레아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