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눈이 와서 아름다운데
이렇게 눈이 와서 부를 수 없네”
끝없이 묻고 헤아리는 안부
저문 길 사이로 또렷이 드러나는 시의 실루엣
감각과 윤리의 향연, 황인숙 아홉번째 시집 출간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일찍이 완미한 시 세계를 펼쳐 보이며 동서문학상(1999), 김수영문학상(2004), 형평문학상(2017), 현대문학상(2018)을 수상한 바 있는 황인숙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직전의 소시집 『아무 날이나 저녁때』(현대문학, 2019) 이후 3년 만이다. 특유의 재바른 감각과 절제된 파토스가 어우러진 64편의 시를 묶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전도적 상상력(오규원),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대립(김현), 독특한 탄력과 비상의 언어(정과리), 일상의 신실함과 삶의 장면들이 포개어지며 울려내는 고결함의 체험(조재룡)으로 일컬어진 황인숙의 시 세계는 오늘에 이르러 죽음과 맞닿은 ‘상실’을 예감하고 질문하며, 그 응답 이전에 자리한 기나긴 공허를 보듬는다. 시인은 다만 앞선 부재를 기억함으로써, 행동하고 나아감으로써, 이 세계의 그리 낯설지 않은 슬픔을 버티며 정답고도 소박한 웃음을 한 움큼 내놓는다. 죽음을 한 바퀴 둘러본 듯한 이의 덤덤한 어조로 풀어낸 시편들은 일상의 명암을 가로지르며 고단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마을 어귀로 길을 낸다. “황인숙의 시적 화자들은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약자의 귀로 세상을 듣는다”(고종석). 마치 그곳에 영영 사라지지 않을 말들이 놓인 듯이.
“그의 시들은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스테레오’다. 틀에 박힌 것들이 아니라, 입체음향들이거나 입체사진들이다. 그리고 황인숙은 그 입체적 시 세계를 ‘약한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과 함께 끈기 있게 일구고 다져왔다. 입체는 고스란히 되풀이되기는커녕 끊임없이 새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황인숙의 시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종석, 해설 「밤에 사는 사람들」에서
쓸쓸한 생의 단면을 환하게 뒤집는
매일의 사랑과 명랑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어떤 동물, 어떤 식물,
바다, 바위, 조약돌, 모래알,
천공, 구름, 노을, 바람……
당신은 그들을, 혹은 그 속에서
살기를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 삶을 발견할 것입니다
뛰어드세요!
— 「에세이의 탄생」 부분
“마음 가는 대로 시작되는 곳에서 시작하고 그치고 싶은 데서 그쳐도 그만”(「에세이의 탄생」)이라는 구절을 반영하듯 부를 나누지 않은 채 흐르는 시편들 사이로 “-ㄹ까” 혹은 “(-겠)지” 등의 종결 어미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 속에서 그러한 화자의 물음이나 추측은 대개 사실의 확인이나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존재의 근원을 헤집어놓는 아픔이기도(“엄마는 왜 나를 버렸을까/그것은 일생을 지배하던/내 궁금증이었습니다”―「월광」), 약한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기도(“얼마나 기다렸을까/나보다 먼저 다녀간 고양이”―「밤의 발자국」), 지난 시간에 맺힌 그리움이기도(“어디로 갔을까/해당화꽃 떠다니던/그 봄날의 바다”―「방파제에서」) 하지만 종내에는 이기(利己)를 버린, “한 모금도 꿈 없는/시/하하, 무념무상!”에 가닿는다(「꿈」).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람 같”(「나도 모르는 사람」)아진다.
황인숙의 시에서 이처럼 세상을 비껴난 나(화자)의 무지(無知)는 무기력한 비탄에 빠질 때가 없는데,
누군 죽어 지내는 맛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맛 몰라무식한 건 무서운 거야
벽을 문처럼
까부수고 나가는 거야난 그렇게
이겨왔다우
— 「장터의 사랑」 부분
오히려 내면에서 솟구친 “무서운” 힘이 바깥세상으로, 소음과 움직임이 득시글한 “장터”로 나를 이끈다. 그리하여 낮아지고 낮아져 소리조차 내지 않는 것들의 목격자가 되며, 가냘픈 “소리”와 도심을 울리는 “음악” 사이의 드넓은 간극 한가운데 걸음을 멈춘 사람이 된다. 그때의 슬픔은 무지가 아닌 “나는 모차르트를 잘 모르지만/그래도 이 음악이 모차르트라는 걸 안다”―(「대로의 모차르트」)는 분명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동시에 이러한 식자(識者)로서의 앎은 어둡고 외딴 곳을 디디며 “소리 없이”, 음악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작은 생명(이를테면 “비둘기”)의 존엄을 역으로 더욱 크게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 화자는 숱한 물음과 추측 끝에 나를 잃고, 나를 모르게 되고, 기어이 나 아닌 것들에게 안을 내주고 만다(“나도 아이를 낳았으면/너만큼이나 대책 없는 어미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너나 나나”—「겨울 이야기」, “그 밤에 당신이 너무 배가 고팠으면/나는 어쩌면 좋은가” “낮고 외롭고 쓸쓸한/당신, 우리”—「동자동, 2020 겨울」, “종일 올 건가, 비?/그래, 그런 마음도 있지/쏟아져라, 쏟아져!”—「오늘도 비」).
세계의 수면 위로 힘껏 내던지는 시니피앙
수수께끼로 주고받는 내일의 삶
아이의 호기심과 어른의 피로가 얼크러진 황인숙의 시 세계는 삶이 던진 패러독스의 난장(亂場)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고양이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 밥을 꾸려 담”(「동자동, 2020 겨울」)고, 주린 비둘기에게 “내가 건네는 한두 줌 낟알”(「어떻게 사는지 모른다」)의 무게를 실감하는 사이 나는 서민이었다가 이주 노동자였다가, 고양이였다가, 비둘기가 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비틀걸음 옮기며” “비몽사몽 스치며”(뒤표지 글) 걸음을 떼는 황인숙의 세계에서는 어두운 밤조차 신체를 얻고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푹푹 빠진다(“밤이 푹푹 빠지는/눈이 펑펑 쏟아지겠지”―「발이 푹푹 빠지는 밤」). 끝없이 죽음 너머의 안부를 묻지만 생의 울타리를 넘는 법은 없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고종석의 말처럼 “시니피앙들을 세계의 수면 위로 힘껏 내던지는 물수제비뜨기의 달인”으로서, 시인이 풀어놓은 시어들은 시종일관 재재거리며 싱그럽게 빛난다. 감각으로 빚어진 선천적 자질이라고밖에 부를 길 없는 매일의 명랑이 슬쩍 들춘 자리엔 즐거운 “수수께끼”가 여지없이 숨어 있으며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는 동안 내일이 온다(「수수께끼」). “울어도 삶은 이어질”(「누수 타임」) 것이므로, 죽음보다 삶의 슬픔을 나누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이 거기에 있다.
무아지경으로 흐르는
자타불이의 세계
해는 새의 눈
모든 새의 눈
밤에는
부엉이 눈에
들어가 있지
―「새의 눈」 전문
황인숙의 시에서는 이렇듯 물음이나 추측이, 저간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동안 돌돌 뭉친 걱정과 헤아림이, 시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끝내 ‘나의 삶’이 되어버리는 과정이 고스란하다. 대상을 억지로 주무르고자 하는 집착과 욕망이 없다. 시공간을 비트는 인위적인 재구성이나 드라마틱한 의미 부여 또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저 있었다가 사라진 존재와 사라짐 후에 도착한 마음이 시인의 입을 통과할 뿐이다. 우리는 마을이 흘러가는 소리를 엿듣고 백지에 안착한 몇 자의 외침을 본다. 모양을 숨긴 채 밤에 사는 사람과 생물 들을 목격하며 그들과 혼연이 된 시를 읽는다. ‘너’와 ‘나’의 구분이 무화된 지점에서 싹트는 숭고한 사랑. 그것은 종류를 막론한 신앙의 근본 교리와 정서에 가깝다. 사랑의 형체로 사랑의 빛깔을 띠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무아지경으로 흐르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 황인숙의 시는 이를 환하게 열어 보인다.
■ 시집 속으로
복아, 옛날에 명랑이랑
말을 꺼내다 울컥
창밖엔 북풍이 윙윙거리고
제니를 물어뜯으러 달려가는 보꼬를 붙잡아
목덜미를 턱으로 내리누르고
난롯가에 엎드려서
앙알대는 보꼬를 다독거리며
복아, 옛날에 명랑이랑
(란아랑 오순도순
난롯가에 퍼질러 누워서
우리 좋았잖아)
말 꺼내다 울컥
(그러니까 복아,
제니랑도 그렇게)이 밤도 가겠지
이 밤도 그립겠지
―「아까운 밤이 간다」 전문
얼굴들, 소리들, 몸짓들
저릿저릿 선연한데
이제 나를 따라오는 소리 없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네
―「내 집 앞」 부분
[……]
태어나서 한 번도 잘 먹어본 적
없는 것 같은 어린 비둘기 세 마리
제 그림자들 말고는
아무 그림자 없는
하얗고 하얀 보도블록
햇빛이 하얗게 내려 쌓이고
비둘기들
소리 없이음악이 흐른다
소리는 없다나는 모차르트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음악이 모차르트라는 걸 안다
―「대로의 모차르트」 부분
길에도 나무에도
눈이 펑펑 내려 쌓여
눈이, 눈이 내리고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밤
이렇게 눈이 와서 아름다운데
이렇게 눈이 와서 부를 수 없네
그래!
얼른 나가보라 전화해야지
너 사는 집에도 눈이 오겠지
밤이 푹푹 빠지는
눈이 펑펑 쏟아지겠지
―「발이 푹푹 빠지는 밤」 전문
■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내가 남자라면
반드시 잤을 거야 종종 잤을 거야
공원 미끄럼틀 플라스틱 원통 속
후미진 건물 뒤편 좁다란 공터
둥지처럼 오목하게 빈 손수레
아, 길가 아무 담벼락 아래도 좋지
긴 외투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담배꽁초처럼 가랑잎처럼 애벌레처럼 꼬부라져서
폭 잠들어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거야 내가 남자라면
30분만. 한 시간만. 딱 10분만!
저 탐스러운 버스 정류장 벤치
저 탐스러운 계단참
아, 탐스러운 카페테라스
집에 가면 잘 수 있다
집에 가면 잘 수 있어
길 위의 여자 비틀걸음 옮기며 중얼거린다
집 없는 여자
집에 가도 잘 수 없는 여자
비몽사몽 스치며
■ 시인의 말
‘11월’이란 제목이 셋이다.
번호를 붙일까 생각했지만, 모양이 거슬린다.
‘십일월’로 고칠까? 어쩐지 진중하고 격 있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11월’이다.
이랬다저랬다, 돌아보는 시들을 묶는 마음.
2022년 가을
황인숙
■ 차례
시인의 말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이렇게 가는 세월
전철을 기다리며
Spleen
친구의 엑스와이프
오늘 할 일
빈사의 백수
죽은 사람은 외로워
11월
11월
검고 붉은 씨앗들
겨울 이야기
공허와 공간
그 동네 어느 심야
아까운 밤이 간다
길
여름 같은 여름
길
꿈
나도 모르는 사람
장터의 사랑
내 집 앞
누수 타임
빈자貧者의 숲
시간이 뭉게뭉게
대로의 모차르트
나는 잘 지내요
또 사라져가네
링링 9월
지나간다
월광
발이 푹푹 빠지는 밤
동자동, 2020 겨울
밤의 발자국
방파제에서
봄의 욕의 왈츠
북향
멜랑콜리아 1
삶과 개
시 쓰기의 어려움
공허와 공간
야속하고 애석한
심란하고 심각하고 심심한 시
강가에서
어둠의 빛깔
어디 사는지 모른다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에세이의 탄생
여름의 목록 2
오늘도 비
우리 애틋한 소설가 김소진
장마를 견디는 법
이렇게 또 한 여름이
새의 눈
슬픈 열대
하얀 복도
광장
봄기운
행복한 노인
후회는 없을 거예요
11월
어떤 저녁
수수께끼
입동
해설
밤에 사는 사람들・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