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를 펴내며
한 줌의 문학으로 애도를 지속하기
애도의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을까. 이번 계절 우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비극을 또 한번 목도해야만 했다. 10월 29일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서 압사 사고로 158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당연히 예측된 날이었으나, 이렇게 허망하게 많은 죽음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참사 자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음 날 바로 선포되어 일주일로 정해진 국가 애도 기간에 알 수 없는 참담함으로 괴로웠다. 참사의 원인도 알지 못한 채, 매일같이 의식처럼 애도를 반복하는, 그러니까 애도하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에 급급한 누군가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목도해야만 했다. 추모의 공간에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추모하는 자 단 한 명의 이름만이 국화꽃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애도 기간 동안 슬픔 대신 분노를 강요받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014년 봄 이후 한국 문학은 완벽한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해, 슬픔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취약한 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국가가 정한 지난 애도 기간 동안 슬픔보다 분노가 앞섰던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한 누군가의 무책임으로 있어서는 안 될 엄청난 희생이 반복되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가적 비극을 마주하여 ‘불가능한 애도’를 지속하기 위해 몸으로 마음으로 언어로 고투해왔던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결코 언어화되기 힘든 타인의 압도적인 상실 앞에서, 누군가의 말은, 행동은, 너무 쉽다는 생각에 분노가 멈추지를 않는다. 현실에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문학의 위태로운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우리는, 그 한 줌 문학의 힘으로 슬픔을 지속하며 희생자를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더더욱 열심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확한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애도하는 나’만이 도드라지는 형태가 가장 비윤리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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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은 ‘쟁점-좌표’이다. 10년 단위의 숫자를 붙여 문학사를 분절하는 관행의 허구성을 모르지 않지만,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2000년대 문학’ ‘2010년대 문학’ 등의 호명으로 특정 시기 문학의 경향을 가늠해보려는 시도들은 꾸준히 이어져왔으며 나름의 의미가 없지도 않았다. 팬데믹과 더불어 시작되어서일까. ‘2020년대 문학’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아직은 입에 잘 붙지 않지만, 최근 한국 문학의 다양한 현상들을 추출하고 갈무리해보기 위해 ‘2020년대 문학’을 진단 혹은 상상해보기로 했다.
심진경의 「남성을 넘어, 여성을 지나, 떠오르는 레즈비언」은 최근 한국 문단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히는 작가 중 한 명인 김멜라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를 혐오하지도 선망하지도 않고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레즈비언”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배타적으로 구별 지어진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다른 여성’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조정되고, 배치되고, 구성된 존재들의 연속체”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중요한 전언이다. 심진경에 따르면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같은 작품은 “올바른 페미니즘에 대한 요구가 부당한 것처럼 더 바람직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요구 또한 마찬가지”라는 통찰을 보여주기까지 하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크다. 이 글을 통해 김멜라에 대한 독해가 훨씬 더 두터워지고 다양해지리라 생각된다.
김요섭의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는 임선우, 이유리, 김초엽, 김멜라의 최근 소설에서 나타난 유령의 형상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서 ‘유령’이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질문의 형식”이 된다는 통찰을 토대로, 최근 소설에 나타난 “인간보다 더 정확한 인간의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유령”의 형상들이, 지금-여기의 우리가 제대로 된 인간의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 존재가 된다고 분석한다. 유령의 출몰은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증명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사라져가는 유령에게도 잊힌 자들을 잊지 않으려는 단단한 마음이 남아 있”음을 김멜라의 소설을 통해 확인하는 장면은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선우은실의 「결론 없는 비평」은 한국 문학사에서 재생산되어온 ‘비평의 규율’에 균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비평적 감각으로서 ‘평론가(적) 자의식’을 분석한다. 최근 비평의 형질 변화를 사유하는 일련의 논의들에 대해 메타비평하면서 비평의 역할을, 문학의 정치성을, 문학과 삶의 관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 평론가들의 비평적 자의식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짚어본다. 결국 이 글에서 제시하는 비평의 나아갈 방향은 ‘인용부 벗기기’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이는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창작된 것을 해석하기, 그리고 그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재현된 문학을 대상화하지 않고 비평적으로 재현하기”라고 정리되며, 결국 ‘비평적 자의식을 폐쇄하지 않고 비평하기’로 요약된다. 이러한 비평의 태도는 결국 ‘비평하는 나’의 욕망을 철저히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많은 고민을 남기는 글이다.
이소의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에는 흥미로운 좌표가 등장한다. 이서수, 김멜라, 임솔아, 김혜진, 위수정 등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최근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집’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는 이 글은, “실제 주거 수준이나 주거 형태를 의미하는 하우스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나 정서를 의미하는 홈을 양 축으로 삼아” 어떤 좌표계를 만들고 있다. 집을 다루는 소설들의 좌표평면을 그리며 이소의 글이 발견하게 된 사실은, 한국적 현실 속에서 하우스가 차지하는 영역이 홈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점,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또렷한 문제가 하우스를 둘러싼 극심한 불평등의 문제라는 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령 위수정의 소설처럼 이 좌표 안에서 남다른 역동적인 궤적을 그리는 어떤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집에 관한, 그리고 우리의 욕망과 서로의 관계에 관한 특별한 사례를 경험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명백한 사실을 이 글이 흥미롭게 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임지훈의 「선물 가게를 지나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은 문학이 놓인 현실적 조건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문학을 감싸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허구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우리 시대의 문학이 더 이상 ‘문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론가가 해야 할 일이 시장의 주류적 경향이 무엇인가를 기민하게 확인하는 일이기보다는, “문화가 사멸해버린 그 폐허로부터 다시금 문학을 문화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도에 대해 상상”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원론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시장과 제도의 바깥에 놓일 수 없는 문학의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철저히 거절해보자는 그의 선언적인 주장은 분명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기는 하다.
홍성희 평론가의 사회로 소유정, 이희우, 전기화 평론가가 함께 나눈 대화도 알차고 흥미롭다. 이 대화를 찬찬히 읽으니, 현재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네 명의 젊은 평론가가 절실히 바라고 있는 것들이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론가들끼리 지속적으로 토의, 논쟁할 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다”(이희우)는 진솔한 바람을 비롯하여, 이들은 개별 평론가의 문제의식이 연속성 있게 지속될 수 있는 비평적 장이 마련되기를, 다양한 형태의 비평적 행위들이 더 많은 독자와 보다 적극적으로 공유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도 문예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직된 비평의 관행들이 해체되기를 바라고 있다. 새로운 비평 세대가 갈망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간 다양한 선언과 시도 들이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가 확인한 것이 경직된 비평 제도의 강력한 복원력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경직된 것을 저도 재생산했다는 생각이 드네요”(홍성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등단 3년 차 평론가의 조심스러운 고백은 유난히 뼈아프게 읽힌다. 팬데믹으로부터 일상을 회복해가고 있는 이즈음, 문학하는 동료들이 함께 얼굴을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 그보다도 먼저, 비평 행위가 개별 평론가들 각자에게 더 즐거운 것이 되기를, 그래서 모두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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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픈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힘든 시기에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김정환, 신해욱, 김승일, 황혜경, 임승유, 배수연, 윤은성, 조용우, 김지민, 남현지의 신작 시와 황모과, 오정연, 강보라, 황정은의 소설이 다가오는 겨울을 훈훈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난 계절에도 흥미로운 신간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지면의 한계로 리뷰 코너에서 다루지 못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운 마음은 이번 계절에도 마찬가지이다. 전영규, 강동호, 박혜진, 조대한, 최다영, 임정균 평론가의 세심한 리뷰에도 독자들이 큰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좋겠다.
리뷰 코너의 다채로운 글들과 더불어 이번 호 비평 코너의 글들을 함께 읽는다면, 최근 한국 문단의 두터운 고민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10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 진은영의 그간 작업을 두루 살피며 김보경 평론가가 예리한 비평을 작성해주었다. 「문학적 민주주의와 시의 살갗」이라는 글은 진은영의 신작 시집을 경유하여 시 쓰기와 교육, 상담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활동에서 ‘문학적 민주주의’의 실천이 깊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각각 언론인과 사회학자로서 이미 명망이 높은 조용호와 송호근의 장편을 다루고 있는 김주연의 비평 「기억소설, 낭만이라는 파레시아」는 이들 소설에서 ‘낭만의 힘’을 추출해내면서 이를 인간의 주체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는 ‘문학의 힘’으로 이해해본다. 정현종의 신작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를 조명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진 우찬제의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시’ ‘시’ ‘비’ ‘비’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정현종의 시작을 관통하면서 “시를 기화하기”라는 시적 전언을 해명해본다. 세 편의 비평을 통해 우리는 결국 비평 대상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적확한 분석과 평가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확인하게 된다.
본권의 지성란에는 우리의 인식과 사유를 넓히는 데 역할할 만한 글들이 실렸다. 오생근의 「조르주 바타유와 위반의 시학」은 ‘시’에 대한 바타유의 사유를 랭보, 프레베르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프레베르의 시를 분석해보는 글이다. 시론가이자 시 비평가로서의 바타유에 접근하기 위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글이다. 김수환이 번역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 미국 연구자 스베틀라나 보임의 「오프모던 거울」도 인상적이다. ‘모던’과 ‘안티모던’의 충돌을 “시공간적으로 싱크가 나간 채 서로 어긋나 있는 이상한 모더니티들의 충돌”로 파악해보고자 그는 ‘포스트’ ‘안티’ ‘네오’ ‘트랜스’ ‘서브’ 등의 수많은 접두어들 대신에 ‘오프모던’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며 “오류를 통한 문화적 발전이라는 비선형적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눈 밝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문학과사회』 겨울호는 다양한 수상 소식과 함께 더욱 풍성하게 꾸려졌다. 선우은실, 이소, 이희우 평론가와 함께 문사 동인이 지난 1년간 애정 어린 토론의 시간을 거쳐 선정한 〈소설 보다〉 시리즈의 작품들을 다시 검토하여 문지문학상 소설 부문의 수상작을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으로 선정하였다. 올해 두번째로 선정된 문지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남은 웨하스 저녁」 외 3편의 인상적인 시를 발표한 윤은성으로 결정되었다. 선정에 참여해주신 김언, 김행숙, 이원 시인께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수상자들의 개성 있는 수상 소감과 심사위원들의 세심하고 따뜻한 심사평도 함께 확인해주시기를 바란다. 두 분의 수상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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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사회』의 창간에서부터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셨으며,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문학과지성사의 대표를 역임하며 출판사의 지속과 성장에 큰 동력이 되셨던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홍정선 평론가의 부고를 마지막으로 전한다. 오랜 문우인 정과리 평론가의 추모사 「정선 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는 생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홍정선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며, 나아가 오랫동안 함께했던 친구의 추모사를 작성해야 하는 이의 쓸쓸한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나에게는 이제 그를 냉정하게 복기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만이 우리의 우정의 의미를 밝혀줄 것이다”라는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 남기는 여운은 상당하다. 심원섭 평론가의 글 「골목길을 걷는 사람」도 먹먹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두 편의 추모사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생전의 고인이 엄청난 복덕을 지으며 살아오셨다는 점이다. 고인이 평온하시기를 바란다.
문학을 둘러싼 조건들이 겹겹이 어려운 현실임에도 우리가 문학의 역할과 가치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선임자들의 노고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된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일궈놓은 한국 문학을 보다 나은 것으로 갱신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애도에는 당연히 끝이 없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편집동인 조연정
겨울호를 펴내며
시
김정환 드라마 없는 일기(日記) 문학사 외 1편
신해욱 행차 외 1편
김승일 다 좋다는 느낌 외 1편
황혜경 죄와 벌 외 1편
임승유 여성 시 읽기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 찾아온 늙은 여자 외 1편
배수연 간밤에 외 1편
윤은성 유리 광장에서 외 1편
조용우 계열화 외 1편
김지민 순이의 교실 외 1편
남현지 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외 1편
소설
황모과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오정연 네번째 소원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황정은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장편 연재 2회]
리뷰
강동호 빛나는 어둠
—김리윤, 『투명도 혼합 공간』
전영규 위악에서 사랑으로
—주하림, 『여름 키코』
박혜진 그들 각자의 거리 두기
—김경욱,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임정균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메시지
—신종원, 『습지 장례법』
조대한 남겨진 아이들에게
—손보미, 『사라진 숲의 아이들』
최다영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김멜라, 『제 꿈 꾸세요』
비평
김주연 기억소설, 낭만이라는 파레시아—송호근과 조용호의 소설을 읽다
우찬제 ‘시·시·비·비’를 넘어서—정현종의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읽기
김보경 문학적 민주주의와 시의 살갗—진은영론
지성
오생근 조르주 바타유와 위반의 시학
스베틀라나 보임 오프모던 거울
김수환 스베틀라나 보임의 “오프모던” 프로젝트
—모더니티 옆 골목에서의 오류의 우회로
故홍정선 추모 특집
정과리 정선 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
—어느 비-사회인의 역경을 반추하며
심원섭 골목길을 걷는 사람
고재봉 홍정선(洪廷善) 연보
2022년 문지문학상 발표
윤은성 남은 웨하스 저녁 외 3편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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