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은 단어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독일 이론가 베르너 하마허의 국내 첫 번역,
새롭게 탐구하는 헌獻-문헌학의 길
문학과지성사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의 아홉번째 책은, 독일의 영향력 있는 문학이론가 베르너 하마허의 『문헌학, 극소』이다. “Minima Philologica,” ‘극소’의 문헌학을 표방하는 표제 아래 하마허의 대표적 저작인 「문헌학을 향한 95개 테제」와 「문헌학을 위하여」를 하나로 묶었다.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하마허는 철학, 문학, 해석학, 정치학 등 폭넓은 관심사와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변별되는 독자적 노선을 구축하여 서구 학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어온 인물이다. 별개의 독립된 소책자이던 두 편의 글을 한데 모은 이 책은 하마허가 천착했던 문헌학 이념의 결실을 보여준다. 하마허는 문헌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혹은 그에 답하기 위해, 미로처럼 굴곡진 사유의 행로를 에둘러 나아간다. 저자는 문헌학을 하나의 보편적이고 제한된 의미로 한정시키거나 제도적 (분과)학문의 지식 규범으로 위치시키려는 시도를 배격하고, 끊임없이 말하고 변주하고 해체하고 덧붙이면서 언어와 문헌학에 관한 근원적 성찰을 유도한다.
저자는 플라톤과 슐레겔, 니체, 벤야민 같은 문헌학적 사상가들과 횔덜린, 파울 첼란, 르네 샤르와 같은 시인들을 참조하는데, 이를테면 르네 샤르의 시 「도서관이 불탄다」를 놓고 글쓰기의 도래를 정밀하게 탐색하거나, 문헌학적 인식을 위한 성찰의 매체로 일컬어지는 파울 첼란의 시를 벤야민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독해하며 필리아philía의 운동, 폭력의 탈력脫力과 언어의 탈언脫言 등의 주제를 깊이 고찰해나간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조효원 교수(서강대 유럽문화학과)는 칼 슈미트, 아감벤, 대니얼 헬러-로즌 등의 저서를 번역, 소개해온 문학비평가이자 인문학자로서, 책 말미에 붙인 역자의 함축적이고 파편적인 9.5개의 주해는 하마허 이론의 핵심을 밝히려는 ‘나머지’로서 기능하며 보다 확장된 독서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문헌학은 묻는다, 세계를 손수 파낸다”
“문헌학이라는 이름은 로고스─언설, 언어 혹은 공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호의, 우정, 사랑을 뜻한다. 이 명칭에서 필리아에 해당하는 부분은 일찍이 망각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문헌학은 점차 로고스학, 즉 언어에 관한 학문, 다시 말해 박학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언어 자료, 특히 문헌 자료를 다루는 학문적 방법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헌학은 지식의 언어보다 앞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먼저 일깨우는 운동, 그리고 [기존의] 인식 속에서 [정말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제기하는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다.” (17쪽)
그렇다면 문헌학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문헌학의 특성과 대상 등에 관한 명제를 부단히 제시하지만 문헌학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문헌학은 주어진 언어를 넘어서는 말하기의 불안정한 운동이다. 문헌학은 통용되는 규정에 저항하고 질문한다. 만약 문헌학이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계속 질문하기 위함이다. 질문하기 속에서 모든 확실성은 언어에 내맡겨지며, ‘언어’와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 때문에 언어는 척도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척도를 찾을 수 없는 문헌학은, 횔덜린의 언어가 그렇듯 자유로운 리듬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슐레겔의 표현대로 “모든 선을 끊고, 모든 원을 폭파하며, 모든 점을 뚫고, 모든 상처를 찢는” 것이 문헌학적 실천의 길이다. 즉 규정된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 해도 결국 문헌학은 비-규정한다. “문헌학이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때 느끼는 당혹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구원적 규정을 기대하는 여느 분과학문이 으레 한 번씩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또 결코 알 수 없기에 느끼는 당혹감, 바로 이것이 문헌학”이라는 말 또한 이 맥락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틈새 없이 촘촘한 설명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오히려 논리를 마비시키는 것, 언어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명석 판명하고 질서 정연한 언어를 향하는 대신, 서로 분절되어 있고 열려 있는 가능성을 문헌학의 본령으로서 사고한다. “문헌학은 우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간격의 반복이다. 모든 앞선 말로부터 자신의 말을 분리하고 또 이 말을 다시 그것보다 앞선 말로부터 분리하는 간격. 문헌학, 이것은 언어에 대한 극진한 사랑 속에서 우선 언어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200쪽).
“끝없는 질문의 수렁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헌-문헌학자의 일이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고, 어떤 것도 바라는 대답이 될 수 없음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면서도 기어이, 기꺼이, 부답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헌학의 일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자는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이 진술에 눈곱만큼의 역설도 수수께끼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선연히 실감한 자는 이미 문헌학자라고 할 수 있다. ‘무엇-질문’에서 ‘어떻게-질문’으로의 이행을 포월하여 마침내, 어느새, ‘질문 -질문’에 도달한 것이므로.” (「옮긴이 해제」에서)
■ 책 속으로
자르고 붙이기라는 보편적인 기술을 문헌학이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붙이기를 통해 자르기를 지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르기를 통해 잘려 나간 것에 스스로를 결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학은 단지 다른 경험적 언어 혹은 잠재적으로 경험 가능한 언어를 향한 끌림인 것만이 아니다. 문헌학은 언어의 타자성, 타자성으로서의 언어성, 계속 달라지는 것으로서의 언어 자체를 향한 끌림이다. (32쪽)
문헌학은 언어로부터 언어가 석방되는 사건이다. 문헌학은 세계에 관해 말해진 모든 것과 계속 더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58쪽)
“그리고 남은 것은 모두 문학이다.” 문헌학은 베를렌Paul Verlaine이 말한 이 나머지와 관계한다. 또한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말한 나머지와도 관계한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이 두 나머지를 구분하기 위해─이 구분은 때로 무한소의 차원까지 내려간다─문헌학은 비평이 된다. (78쪽)
첫걸음을 뗀 순간, 문헌학은 이미 문헌학의 문헌학이다. 문헌학은 문헌학적 업적에 관한 신화들과 거리를 둔다. 그것은 오르페우스를 에우리디케로, 에우리디케를 다시 헤르메스로 변화시키는 따위의 초역사적 상수를 용인하지 않는다. 문헌학은 탈-퇴적한다. 문헌학에 따라 만사가 진행된다면, 땅 위와 아래에서 남는 것은 오직 자유로운 하늘뿐일 것이다. (88쪽)
과거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간 어떤 것이 반복된다. 문헌학은 이 행보를 반복하며 현재를 위해 자신에게서 빠져 있는 것을 미래에서 가져온다.─무엇이 문헌학에서 빠져 있는가?─무가 빠져 있다[아무것도 빠져 있지 않다]. (91쪽)
문헌학은 [다시]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혹은 기술사를 돕는 조수가 되어, 이들의 주안점과 시각과 방법론적 규약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춰왔다. 물론 이 상황이 문헌학에 항상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헌학의 비판 능력에 도움이 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131~32쪽)
문학 언어에서 이 요소들은 문헌학적 근본 작동에 대한 본보기 역할을 한다. 이 근본 작동을 통해 성찰적 문헌학─성찰 속에서 자기를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획득하는 문헌학─은 자신을 추동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텍스트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 (159쪽)
문헌학은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과 공유할 사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문헌학이 아니다. 문헌학은 문학이라는 다른 언어 그리고 그 밖에 잠재적인 다른 모든 언어를 돕는 언어다. 문헌학은 이 언어들과 동행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그러므로 많은 경우 침묵해야 하고─그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 문헌학은 문학과 함께mit 말한다. 그러나 문학과는 다른 말투로 말한다. 문헌학은 형식을 만든다. 그러나 만약 문헌학이 규범을 만든다면, 그때는 모든 규범을 돌파하는 특징을 더는 가질 수 없게 된다. […] 문헌학이 문학과 함께 말하는 것은 다만 문학을 향해서, 문학을 위해서, 그리고 문학 안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모든 것의 편에 설 때뿐이다. (172~73쪽)
첼란이 쓴 것과 달리 폭력이 자기를 탈력시킬entwalten 수 없다면, 폭력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절멸시킬 것이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폭력은 자기를 억제해야 한다. 자신마저 절멸시키는 폭력이라는 역설로부터 또 다른 역설, 즉 [스스로] 탈력하는 폭력이라는 대항-역설이 생겨난다. 이 폭력 외에 다른 어떤 폭력도 작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폭력도 무언가를 위한für 폭력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폭력, 정말로 작용하는 폭력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과 타자를 위해, 그리고 타자로서의 자신을 위해 스스로 멈추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180쪽)
■ 차례
문헌학을 향한 95개 테제
문헌학을 위하여
옮긴이 해제 『문헌학, 극소』에 붙이는 9.5개의 단편적 주해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