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 임경규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2월 18일 | ISBN 9788932039046

사양 변형판 152x223 · 814쪽 | 가격 42,000원

책소개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문화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구축한
현존하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제임슨의 기념비적 저작
출간 30년 만에 첫 번역!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는 지적 블록버스터다. […] 유행에 민감한 좌파 허무주의자들에게 던지는 시의 적절한 응답이다._테리 이글턴(문예 이론가)

제임슨을 읽기 이전의 시기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_클린트 번햄(비평가)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라고 일컬어지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기념비적인 저작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가 출간 30년 만에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1980년대에 가장 많이 인용되고, 논의되었으며, 논쟁을 일으킨 글”이라고 알려진 동명의 논문을 수록한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작업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철학에서 건축, 미술, 영화, 드라마, 음악, SF 소설, 실험적 예술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분석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현란한 분석을 펼치고 있으며 제임슨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책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예술가들이 참고하는 전범 같은 책으로 손꼽힌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예술과 철학 영역을 넘어 20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말로 각인시키고 대중적으로 유통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뛰어든 마르크스주의자

해체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비롯한 유럽 이론들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담론들, 그리고 레이건 정권 이후 보수파의 거센 반격이 1960년대의 진보적 성취를 무시하며 미국 학계를 식민화하고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와 계급 정치 및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던 1980년대 초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예술을 포스트모던 예술이라 부를 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승인가 급진적인 단절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그러던 중 제임슨이 1984년 『뉴 래디컬 리뷰』에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이 논쟁에 뛰어들면서 더 강력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때까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묶어서 사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항상 역사화하라!”(제임슨)는 역사유물론의 깃발을 앞세운 채, “역사의 도살장”(더글러스 켈러)으로 들어간 것이다. 제임슨은 한편으로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집중포화 대상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변절자 취급을 당했다. 그 후로도 그는 해석, 역사성, 공간, 유토피아 등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심화된 글들을 추가적으로 발표했고, 1991년 오래도록 회자될 이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의 구축

이 책은 제목 자체가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접근하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다른 이론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예술적 스타일로 간주했다면, 제임슨은 이를 “후기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적·역사적 환경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 즉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로 바라본다. “후기자본주의”라는 용어는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자본주의를 고전적 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후기자본주의로 구분했다)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현 단계의 다국적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19세기 분석과 모순되기는커녕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중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라는 생각과 연관된다. 덕분에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핵심 모순과의 관련 속에서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변화의 결과로 소위 예술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삶과 문화가 조직되는 방식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제임슨을 통해 “깊이 없음” “역사성의 쇠퇴” “시간의 공간화” “시뮬라크럼”으로 표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표피성의 미학과 “텍스트성”과 “내재성”을 강조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적 담론이, 사실은 궁극적 지시대상체로서 대문자 역사와의 조우를 차단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봉쇄 전략의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 현재의 상황을
“파국인 동시에 진보”로 파악하라

제임슨은 또한 포스트모던 건축가 존 포트먼이 설계한 로스엔젤레스의 보나벤처 호텔을 예로 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간 논리에 내재한 사물화의 힘을 폭로한다. 표면이 거대한 반사 유리로 되어 있는 자기 폐쇄적인 이 건물에서 스스로의 방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던 하이퍼스페이스는 개별 인간의 몸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감각적 지각을 통해 주변 환경을 조직화하며, 자신의 위치를 지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소비사회의 강렬한 황홀경 속에서, 혹은 무의미한 차이의 유희 속에서 현재의 영원한 지속을 찬양하는 정신분열적인 주체가 되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제임슨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사유하라고 했던 마르크스를 따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진화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것을, 다시 말해 현재의 상황을 “파국인 동시에 진보”로 파악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과 딜레마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미학적 실천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상황에 걸맞은 정치문화적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담긴 진리의 계기,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한다. 제임슨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하며, 전 지구적으로 펼쳐진 후기자본주의의 관계망 속에서 주체의 위치를 정치적·미학적으로 가늠하기 위한 시도로서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요청한다. 제임슨의 이후 작업에서 계속 발전되어나가게 될 이 방법론은 실재 조건, 즉 후기자본주의를 정교하게 지도 그리려는 시도와는 무관하며, 역설적이게도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미메시스적 재현의 불가능성 위에서만 작동한다. 즉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주체의 영역과 실재로서의 후기자본주의라는 두 공간을 판타지적인 구조를 통해 연결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변화의 열망, 바로 유토피아적 충동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한편, 제임슨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확장하는 10장 「이차 가공」에서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사실 “계급의식”에 대한 암호였으며,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 꿈꿔본 적이 없는 종류의 새로운 계급의식의 필요성을 제안하려고 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임슨 재방문

떠들썩한 유행의 시기가 한참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거의 사라진 듯 보이는 시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너무도 뒤늦은 방문으로 느껴질 듯싶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등의 이론으로 대체되고, 차이와 다양성, 혼종성, 정체성 등이 인문학 논문의 키워드를 차지하면서 제임슨류의 총체적인 사유는 한동안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무한한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미시정치학과 정체성 정치의 투쟁이 “인정과 차이에 대한 관용을 위한 문화적 투쟁”으로 변형(일부의 경우에는 보수화)되어가는 반면 자본주의는 승리의 행진을 계속해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제임슨’의 이름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신사회운동이나 소집단 운동이 자본주의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국지적인 투쟁과 전지구적인 투쟁의 조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은 30년을 우회해 방문한 이 책의 예기치 않은 적실함을 확인하게 해준다.


■ 책 속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매우 조심스럽게 정의해본다면, 우선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버린 시대에 현재라는 시간을 역사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다 심층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역사적 충동을 (비록 왜곡된 방식으로나마) ‘표현’하는 것이거나, 그러한 충동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회피하는 것이며, 이 모호성의 양 측면 중에 어느 것을 하느냐는 우리의 기호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_서문 7쪽

한때 패러디라는 것이 살았다. 그런데 혼성모방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놈이 나타나 그의 자리를 야금야금 빼앗아버렸다. 패러디와 마찬가지로 혼성모방은 특이하고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문체에 대한 모방이다. 그것은 언어적인 가면을 쓰고 죽은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립적인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패러디처럼 이면에 숨겨진 동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풍자적 충동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웃음조차도 결여된 단순한 흉내 내기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잠시 빌려온 비정상적인 말과 더불어, 건강한 언어적 규범성이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확신도 없다. 그런 까닭에 혼성모방은 공허한 패러디이며, 동태눈을 한 동상에 불과하다._64쪽

내가 보기에 이런 사유 관계의 새로운 양식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바로 백남준의 작품이다. 그는 무성한 식물들 사이에 공간을 두고 텔레비전 스크린을 층층이 쌓아놓거나 여기저기 흩어놓기도 하고, 마치 신기하고 새로운 별처럼 비디오를 천장에 설치하여 관객을 향해 깜빡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관객은 불가능한 것을 하도록 요청받는다. 즉 근원적이고 무작위한 차이들을 담고 있는 모든 스크린들을 한눈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한 관객은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The Man Who Fell to Earth」에서 (57개의 텔레비전 스크린을 동시에 보고 있던) 데이비드 보위의 진화적 변이를 따라가야만 한다._89~90쪽

내가 분석할 건물은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로 로스앤젤레스의 신시가지에 세워진 건물이다. [……] 앞서 나는 위대한 건축 모더니즘의 엘리트적인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엄격함에 대항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레토릭에 담긴 포퓰리즘적인 측면에 대해 언급했다. 즉 이 새로운 건물들은 한편으로는 대중적인 작품이며, 또 한편으로는 미국 도시 구조의 특유성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다시 말해서 본격 모더니즘의 걸작과 기념비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이 건물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 경관의 싸구려 상업 기호 체계 속에 자신만의 이질적이고 고양된 새로운 유토피아적 언어를 주입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라스베이거스로부터 배우기”라는 슬로건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미국적인 도시의 어휘와 문법을 사용하여 바로 그들의 언어로 말하려 시도한다._102~103쪽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행동하고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_128쪽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시간성이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는 시간에 대한 산 경험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글쓰기를 일컫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 시간에 관한 글쓰기, 시간의 재기입. 예컨대 J. G. 밸러드의 잊을 수 없는 명작 「시간의 목소리The Voices of Time」의 교훈이 그러한 것이다. 그것의 묵시록적 비전, 즉 태엽이 풀린 시계처럼 멈춰버린 우주와 잠든 채 종말로 치닫고 있는 인류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비전은, 처음에는 세기말적인 바그너식 모더니즘 내지는 웅장하고 음악적인 사회생물학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벨러드가 언어적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실 대문자 시간Time의 다층적인 인장印匠이었으며, 그의 글쓰기가 읽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었다._302~30쪽

첫번째 글에서는 전 지구적 규모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을 예견했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사실 다름 아닌 대한 암호였다.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 꿈꿔본 적이 없는 종류의 새로운 계급의식의 필요성을 제안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새로운 공간성이라는 방향을 향해 굴절되기도 했다. [……] 앞선 논의들에 담겨 있는 레토릭 전략은 하나의 실험과 연관된다. 즉 단호하게 비체계적인 것을 체계화하고, 단호하게 몰역사적인 것을 역사화함으로써, 그에 대해 우회 공격하거나 적어도 그런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역사적 방식을 강제할 수는 없는지를 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체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1960년대의 가장 흥미로운 유산인 이 말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뜻하지 않게 부활한 것이다._749~50쪽


■ 추천사

최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의 도취와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엄숙함 사이에서 진동하는 제임슨의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생산적인 분석은 그것의 영향력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양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나의 확신을 굳혀주었다._사이먼 레이놀즈(음악 평론가)

목차

■ 차례

서론
1장 문화_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2장 이데올로기_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
3장 비디오_무의식 없는 초현실주의
4장 건축_세계체제의 공간적 등가물
5장 문장_글 읽기와 노동분업화
6장 공간_유토피아의 종언 이후 유토피아주의
7장 이론_포스트모던 이론적 담론에서 내재성과 유명론
8장 경제_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
9장 영화_현재에 대한 향수
10장 결론_이차 가공
미주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도판

작가 소개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로, 1934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사르트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듀크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임슨의 대표작은 『정치적 무의식』(1981)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1991)로, 특히 1984년 발표 후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던 동명의 논문이 수록된 이 책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논의들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 밖의 저서로 『맑스주의와 형식』(1971), 『후기 마르크스주의』(1990), 『보이는 것의 날인』(1990), 『지정학적 미학』(1992), 『브레히트와 방법』(1998), 『단일한 근대성』(2002), 『미래의 고고학』(2005), 『변증법의 원자가價』(2009), 『벤야민 파일』(2020) 등이 있다. 2008년 인문사회과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르그상, 2012년 미국 현대어문학협회 공로상, 2014년 트루먼 카포티상을 수상했다.

임경규 옮김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집으로 가는 길』 『디아스포라 지형학』(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등이, 주요 논문으로 「포스트모던 로망스: 프레드릭 제임슨의 ‘인식적 지도그리기’ 비판」 「‘나그네의 지도그리기’와 ‘집’ 찾기: 초민족주의 시대의 새로운 지정학적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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