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의 매혹이 만드는 경계 없는 산문의 세계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 2차분 2권 출간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2차분으로 백민석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와 신해욱 『창밖을 본다』가 동시 출간되었다. 2019년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 등으로 시리즈를 처음 선보인 이래 2년 만이다. 2022년에는 나희덕, 하재연, 한유주 등의 산문으로 3차분이 출시될 계획이다.
〈문지 에크리〉는 지금까지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유는 이 시리즈가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지 에크리〉는 무엇, 그러니까 목적어의 자리를 빈칸으로 남겨놓는다. 작가는 마음껏 그 빈칸을 채운다. 어떤 대상도 주제도 될 수 있는 친애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이렇게 태어난 글은 장르적 경계를 슬쩍 넘어서고 어느새 독자와 작가를 잇는다. 완성도 높은 문학작품으로만 접해 속내를 알기 힘들었던 작가들과 좀더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소설가, 여행자, 독서가 백민석의 에세이
툭툭거리는 독설 같지만 끝내 자신을 향하는 성찰의 화살
백민석의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되었다. 이미 다섯 권의 산문집을 낸 바 있지만, 여행이나 예술과 같은 특별한 주제 없이 에세이를 모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여 년간 쓴 산문을 모았지만 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흐리지는 않다. 창작자의 진솔한 고민과 입장을 담아내는 〈문지 에크리〉의 취지에 부합하는, 소설가 백민석의 삶-세계 분석을 한눈에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아우르며 그의 사유가 연결되고 확장되어온 기록이라 작가의 내면 성장기로 읽어볼 수도 있다. 백민석은 「잘린 시야」에서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것은 뱃살과 모르겠다는 말뿐”이라고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면서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에 대해 계속 쓸 것이다. ‘멀리 내다보면서 들여다보는 행위’ 즉, 성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을 맺는다. 글 곳곳에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등 고전을 탐닉하며 오래된 기록으로 현재를 읽어내는 독서가이자, 낯선 땅의 표정에서 역사의 흔적을 추적하는 여행가의 통찰이 드러난다. 통념을 의심하고 익숙함에 머무르기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지난날의 자신을 통렬하게 반성하는 백민석의 일신일신우일신기日新日新又日新記는 어제를 닮은 완고한 세계를 뼈아프게 울린다.
이 책은 1부 ‘정치적인 것’과 2부 ‘미학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총 18편의 산문이 담겼는데,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은 하나의 사건, 현상, 작품이 해석되는 두 가지 측면”이기에 이를 기준 삼아 분류하였음을 밝혔다. 하지만 정치와 미학을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는 그 둘이 조우하는 지점에 더 주목하였다. 국정 농단, 인종 차별, 젠더 불평등, 기후 위기, 문단 권력 등의 문제가 서로 공유하는 근원적 모순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해간다. 백민석의 시각으로 경험하는 세계의 총체가 여기 준비되어 있다.
일상에서 정치를 읽고 예술에 질문해온 여정
마르크스의 발언에서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무엇일까. 아마 비극이 희극이 되어 돌아온다는, 돌아온 과거를 희극으로 치부할 때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아닐까. 실제로 비극적 상황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자는 대개 사회적 지위가 우월한 남성들이다.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
나는 순수문학이 이데올로기화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어쩌면 벌써 되지 않았는지 하는 의문이 있다. 앞서 말했듯 문단 내에서 순수문학은 결코 소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다수다. 그리고 문학 전반이 독자의 사랑을 잃고 있는 것이지, 상업문학 때문에 순수문학이 독자의 사랑을 잃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순수라는 이데올로기」
백민석의 저 문장들은 한국 중년 남자, 등단 제도를 통해 데뷔한 순수문학 소설가가 하기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속 시원한 ‘사이다’나 ‘독설’류는 아니다. 결국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쉬운 비판은 비난일 뿐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존재의 근간을 흔들어야만 진정한 ‘아픈 말’을 할 수 있다. 그 때문일까. “과거는 어째서 자꾸만 돌아오는가?”는 다소 긴 제목인데도 좀처럼 잊기 어렵다.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으로”라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지적이 저주처럼 개별 삶과 사회 전반 모두에 자꾸만 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희비극은 우리의 무관심과 소극성으로 인한 결과였음을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그리고 예술의 역사 속에 꾸준히 반복되어온 구습과 편견, 가부장제와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백민석은 거대한 대안을 내놓는 대신 자기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글쓰기로 제 몫을 하고 있다.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마주침까지 낱낱의 시간 속의 깨달음이 글에 녹아들어 있다. 우리의 당연한 하루들이 모여 역사를 이루고, 오늘 나아짐으로 나아가야만 내일의 내가 있다는 사실도. 어쩌면 단순한 진리, 그러나 직면하기 어려운 진실을 다양한 각도로 접근해 써 내려간 백민석의 산문들. 이 책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갈 당신 한 명 한 명의 걸음에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 본문에서
소설이 ‘언어’예술인 이상, 우리는 언어가 가진 사회적 공기公器라는 본질을 벗어버릴 수 없다. 언어는 소설가 개인의 창작 도구이면서, 동시에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소통의 도구이기도 하다. 페르디낭 드소쉬르는 이를 “의지적이고 지적인 개인 행위”인 파롤과 “개인이 수동적으로 습득하는 (사회적) 산물”인 랑그로 나눴다. 파롤/랑그는 하나의 말이 동시에 놓이는 두 영역이다. 내가 소설에 쓴 어떤 낱말은, 문재인 대통령도 쓰고 거리로 몰려난 경제적 난민들도 쓰고 길에서 지나치는 낯모르는 남녀 행인들도 쓰며 이 글을 편집할 편집자도 쓰고 젠더 불평등의 피해자들도 사용한다. 모두가 쓰는 공기를 자신의 부족한 사회의식으로 불편하게 할 수는 없다. (「남근중심주의와 젠더의 재현」)
슬픈 예측이긴 하지만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확실해질수록, 인류는 더 많은 늑대를 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늑대가, 더 노골적으로 세상이 제 것인 양 활개 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기후 붕괴는 재앙이다. 그리고 그 재앙의 밤 가운데 이빨을 번뜩이며 나타날 늑대들은 인류의 밤을 더욱 어둡게 할 것이다. (「늑대들의 밤이 온다」)
성찰을 통해 지금 자기 내면의 작은 소용돌이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 작은 소용돌이가 언젠가 핏빛의 뒤집힌 아가리가 되어 존재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아니 스스로 금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 극단화되어 스스로를 삼켜버릴 지경에 이르기 전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 신호를 발견해 무엇이라도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잘린 시야」)
정치적인 것
타자의 장소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
남근중심주의와 젠더의 재현
인류가 우주에서 뭘 한다고요
그래서, 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시끄러운 다수
우리를 무어라 불러야 하지요
늑대들의 밤이 온다
미학적인 것
세계의 총체성, 책의 총체성
바다의 문명화 과정
순수라는 이데올로기
잘린 시야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
공포의 만화방
진실과 맞닥뜨리면 내가 찾아가겠네
내게 적당한 규모의 엑소더스
내가 처음 읽은 책
분석과 평가
작가의 말 |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것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