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영화,
관객이 원하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말하자면 ‘불편한’ 영화들을 선호한다.”
아우슈비츠, 5‧18, 계급, 죽음, 사회정의…
영화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영화로
그 낯익은 새로움을 탐사하는 평론가 김형중의 뷰와 리-뷰
5‧18과 세월호 등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와 그에 따르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심도 깊은 비평을 수행해온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영화 산문집 『무서운 극장』이 출간되었다. <지옥의 묵시록>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고전영화에서 <기생충> <어스> <로마> 등 최근의 화제작에 이르기까지, 총 17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깊이 읽어나간다. 저자는 관객의 욕구를 쉬이 충족시키는 영화보다는, 관객의 기대를 벗어나 생각을 자극하고 토론을 유도하는 영화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선별된 영화들은 아우슈비츠와 5‧18, 계급과 불평등, 가부장제 같은 역사적, 사회구조적 문제를 주목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저자는 영화들 속 다양한 문제의식을 포착해 ‘악인이란 누구인가’ ‘속죄는 가능한가’ ‘계급을 초월한 연대는 가능한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 하나씩 고찰해나간다. 정신분석, 철학,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석의 도구를 활용하여 영화 속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저자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과 사건에 때로는 깊숙이 공감하며, 때로는 냉철하게 조망하면서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생동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반짝이는 포착과 주제의 복합성에 대한 치열한 존중을 이렇게 별일 아니라는 듯 겸비한 글은 드물다”(신형철의 추천사 중). 이 책은 영화를 계기로 삼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또 인간 본성에 대해 좀더 예민하게 재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다시 보기와 깊이 읽기를 위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17편의 영화 이야기
17편의 영화에 대한 글들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사유는 다음 영화를 사유하기 위한 복선이자 연료가 된다. 그렇게 영화에서 영화로, 하나의 주제에서 주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하며, 책 전체를 꿰뚫는 일관성을 부여한다. 이를테면, 영화 <한나 아렌트>에 관한 첫 글은 전두환의 재판 출석 장면 스케치로 시작되는데, 저자는 이 장면을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으로 오버랩시킨다. 이는 <더 리더>의 주인공과 아이히만을 무법자와 범법자로 구분해 비교하는 내용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출현한 속죄라는 화두는 <어톤먼트>에 대한 글에서 더 깊이 다루어진다. 이는 다시 계급의 문제로, 계급의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향한 비판으로, 이는 다시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숙고로 이어지는 식이다. 형식주의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미장센을 분석하는 부분이나 <지옥의 묵시록>의 살해 장면을 부친 살해 신화에 포개어 읽는 등의 미학적 분석도 흥미롭다. 나아가 이 책은 푸코의 생명권력, 라캉의 실재와의 조우, 헤겔의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같은 여러 철학적 개념을 활용해 우리 사회의 여러 이슈를 다양한 차원에서 고민해보도록 이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지금 이곳과 완전히
다른 곳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고 싶었다.”
책 초반부에서 저자는 ‘사유 없는 자의 진부함’이 악의 기원이 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말을 화두로 삼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들 평범하기 그지없고, 이모티콘으로 말을 대신하고 검색으로 사유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진부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진부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갈 ‘위기’에 빠진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은 아마도 ‘사유 있음’을 향한 정진일 것이다. 저자는 강조하여 말한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도 가능했다”고. “영화란 우리의 욕망에 부응하는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이라고 한 어느 영화 이론가의 말처럼, 다른 세상을 그려보고 상상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경험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써 내려갈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추천사
스트롱 센스strong sense, 라고 흄은 말했다. 비평가라면 바로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센스’라는 말의 의미 폭은 넓다. 기본적으로는 감각적 데이터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가리키지만(‘열 감지 센서’가 그렇듯이), 그 감각적 감지 능력에 힘입으면 더 잘 발휘되는 합리적 판단 능력까지를 뜻할 때도 있다(제인 오스틴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이성과 감성’으로 번역할 때가 그렇듯이). 이 센스의 스펙트럼이 만드는 공간을, 김형중의 재능은 빈자리 없이 꽉 채운다. 이 책의 첫 세 편을 한달음에 읽어보라.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반짝이는 포착(감각적 감지로서의 센스)과 주제의 복합성에 대한 치열한 존중(합리적 판단으로서의 센스)을 이렇게 별일 아니라는 듯 겸비한 글은 드물다. 어려운 책을 산사태처럼 많이 읽는다고 센스가 생기지는 않는다. 터진 실밥처럼 각주를 매단다고 센스가 입증되지도 않는다. 공적 난제와 사적 숙제를 일치시켜나가는 간절함, 답은 내 앞의 작품에 있다고 믿는 겸손함, 그러면서도 제 글쓰기 노동에 어떤 후광도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는 ‘호모 루덴스’적 순수함이 그에게 센스를, 그것도 아주 ‘강력한 센스’를 주었다. 신형철(문학평론가)
■ 책 속으로
브라이오니의 위증을 추동한 것이 질투 이면의 계급적 편견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브라이오니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는데, 물론 그 창문은 고색창연한 영국식 저택의 창문이다. (곱게 자란 탓에 정리 강박증자이기도 한) 브라이오니는 저택의 눈으로만 세계를 본다. (「사유 없이 죽을 자」, 32쪽)
그러니까 저 민영화된 신자유주의 공적 서비스 시스템은 댄을 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간단하게…… 신청서 몇 장만 출력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서의 ‘그,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들의 서류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인간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을 생물학적 수준으로 환원시켜 ‘인구’로 셈하는 것이 또한 생명권력의 통치 기술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권력에게 그저 실업률과 질병 인구 비율, 그리고 그들에게 소용될 예산의 효율성에 관여하는 하나의 숫자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게 내버려 두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가 아닙니다」, 55~57쪽)
수간호사 래치드는 그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생명권력의 수장, 그녀가 부여한 온갖 규율들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규율은 (강제된 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 범법과 비정상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때문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한 정신병동을 모델로 삼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규율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이다. 마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영화적 오마주라도 되는 것처럼 카메라는 기꺼이 규율권력의 작동 방식을 면밀히 관찰하는 현미경이 된다. (「맥머피의 사인, 추장의 행방」, 63쪽)
그러나 김군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감독이 만난 많은 인터뷰이들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이미 들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한 것들, 말의 ‘잉여’로서의 표정과 침묵과 경련, 그것들로부터 더 많은 5·18을 들어버렸다. 우리가 들은 그 말의 요지는 이렇다. 5·18은 아직 진행 중이다. 김군을 찾기 전까지 5·18은 끝난 것이 아니고, 양심 있는 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리라. (「김군의 행방」, 79쪽)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최악의 영화적 재현은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1993)와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1997)였을 것이다. 전자는 아우슈비츠를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렸고(참혹함에 치를 떨 때조차 우리는 그 참혹함을 상품으로 소비하곤 한다), 후자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일을 코미디(제아무리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었다 할지라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아우슈비츠에 대한 근래 ‘최선의’ 영화적 재현, 바로 <사울의 아들>이 있다. (「죽은 나를 묻으러」, 83~84쪽)
감탄할 만큼 잘 연출된 영화 결말부, 정교하고도 충격적인 몽타주와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진 ‘커츠 살해/소 희생제의’ 장면은 코폴라 감독이 명백히 커츠를 노쇠한 숲의 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숙소 입구에 역광으로 서 있는 커츠, 그 앞에 소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커츠는 소다. 결국 교차편집된 부락민들의 축제 장면에서 소가 사지를 난도질당할 때, 커츠도 윌라드에 의해서 난도질당하는 것은 신화적으로 당연하다. 게다가 어둠과 빛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조명 속에서 윌라드는 커츠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가 숲의 왕, 2대 커츠가 될 테니…… (「숲의 왕」, 117쪽)
그 밤이 지난 후 새벽이 올 때, 잇지는 빅 조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지 이제 돼지를 삶을 시간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형사가 먹은 바비큐는 유난히 맛있었고, 그 겨울에 미시시피강의 메기들은 배라도 부른 듯 미끼를 잘 물지 않았다. 혹시 법(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이 뭔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역시 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을 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옛적 버밍햄에서」, 128~29쪽)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상에 기식자가 아닌 (무)생명체가 있을까? 혹자는 대지에서 노동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생산자라고 말하지만, 농사란 식물에 기생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식물이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증여하는 주인이라고 하자니, 식물은 땅에 기생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땅의 영양은 어디서 오나? 비는 왜 내리나? 최종적으로 태양계 내에서 기식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오로지 태양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식하지 않는 주인이다. 그마저 태양계 내에서만 그렇다는 얘기다. (「주인hôte과 기식자parasite」, 175쪽)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맘만 먹으면 충동적으로 보트 하나쯤은 구입할 수 있고, 산타크루스에서 며칠 정도 휴가를 즐길 수도 있는 부르주아 가족의 눈을 따라오던 관객들의 시선은 이제 그 안온한 삶 아래에 있는 가혹한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 복제 토끼의 날고기로 연명하면서 좀비처럼 어슬렁어슬렁 위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아야 했던 저 아래의 사람들…… 그런 점에서 애디의 남편 게이브가 정체를 물었을 때, 레드가 한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우린 미국인들이야.” 조던 필이 보기에 미국은 그렇게 위와 아래로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상의 안온한 삶에 대해 지하의 비참한 삶은 구성적이다. 아래의 비참이 위의 안온의 조건이다. (「(n)……1111:1111……(n)」, 183~84쪽)
■ 차례
사유 없이 죽을 자
<한나 아렌트>, 마가레테 폰 트로타, 2012
한나, 책 더미 위에서 죽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2008
글쓰기와 속죄
<어톤먼트>, 조 라이트, 2007
여섯 날 동안의 꿈
<남아 있는 나날>, 제임스 아이버리, 1993
나는 보험번호 숫자가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6
맥머피의 사인死因, 추장의 행방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밀로시 포르만, 1975
김군의 행방
<김군>, 강상우, 2018
죽은 나를 묻으러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재판은 치료가 아닙니다
<나는 부정한다>, 믹 잭슨, 2016
그를 먹어라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피터 그리너웨이, 1989
숲의 왕
<지옥의 묵시록>,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79(리덕스판: 2001)
옛날 옛적 버밍햄에서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존 애브넷, 1992
다른 세상도 가능했다
<안토니아스 라인>, 마를렌 고리스, 1995
그것은 나의 혀
<피아노>, 제인 캠피언,1993
하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가족이 있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 2018
주인hôte과 기식자parasite
<기생충>, 봉준호, 2019
(n)……1111:1111……(n)
<어스>, 조던 필, 2019
에필로그: 무서운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