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iem카르페 디엠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공쿠르상 수상 작가,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
그가 전하는 ‘카르페 디엠’에 대한 성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하룻낮의 행복Une Journée de Bonheur』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Carpe Diem’에 관한 파스칼 키냐르의 성찰을 담고 있다. 이 라틴어 문장의 의미는 흔히 ‘이날을 베어라/따라’ 혹은 ‘오늘을/현재를 즐겨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이 말은 끊임없이 회자되다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계기로 급속하게 퍼졌고,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뇌리에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키냐르가 새삼 진지하게 질문한다. “왜 이날을 따려고 하는지요? 지나가는 순간을 더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잇따르는 시간들 내부에서 그 순간을 잡아채기보다 낫지 않을까요?”(12쪽) 키냐르는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찾기 위해 꽃을 따는 행위에서 시작해 일본의 전통 꽃꽂이 방식인 이케바나, 단어의 기원, 각종 신화와 예술 작품, 주기도문을 넘나들며 사유의 여정을 이어간다. 이 사유의 종착역은 ‘하루의 빛diem을 뜯도록 하라’이다. 키냐르는 ‘하룻낮diem을 베기’보다는, 혹은 ‘다음 날이 없는 듯이 시간의 흐름에서 이날을 잡아채기’보다는, ‘낮의 매 순간을 조금씩 풀을 뜯듯이 천천히 뜯고 잘게 빻아 씹어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하룻낮의 행복’이므로.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잡아채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내일’은 없다!
_호라티우스의 『송가』 중에서
Carpe-꽃들을 죽이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호라티우스의 송가 중 한 구절이다. 라틴어 동사 ‘carpe’의 사전적 의미는 ‘따다, (꽃을) 꺾다, (낫 따위로) 베다, 잘라내다, 뽑아내다’이고, 라틴어 명사 ‘diem’의 사전적 의미는 ‘날, 낮’이다. 널리 알려진 영어 번역으로는 ‘Seize the day’ ‘Pluck the day’가 있고, 한국어로는 ‘오늘/현재를 즐겨라’ 혹은 ‘이날을 따라/잡아채라’라고 표현한다.
키냐르는 1장 「꽃들을 죽이기」에서 동사 ‘carpe’에 대해 고찰한다. 가령 일본 사회에서 ‘꽃을 따기/자르기’는 ‘제물을 바치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갓 피어나 생명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꽃을 잘라 조상에게 봉헌하는데, 그것은 생명을 잃은 조상에게 가장 필요한 생기를 부여하려는 제식이다. 주목할 것은 ‘너무 이르게’ 잘리는 꽃은 봄과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그것은 곧 ‘봄을 말살하기’인 동시에 ‘시간을 죽이기’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호라티우스가 위의 송가에서 기술한 바도 결코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죽이는 방식이라고 키냐르는 지적한다.(13쪽) 그는 ‘carpe’가 ‘자르다, 베다, 꺾다’라는 폭력적 행위보다는, ‘따다cueillir’에 가깝고, ‘따다’보다는 오히려 ‘풀을 뜯다paître, brouter’에 더 가깝다고 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라틴어 ‘Carpe Diem’이라는 표현은 ‘너의 하룻낮을 베어라’보다는 ‘하루의 매 순간을 조금 씩 풀을 뜯듯이 천천히 뜯고 잘게 빻아 씹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의 이런 말 입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22쪽)
Diem-빛은 하늘에 핀 일종의 꽃이다
이 책의 2장에서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목적어인 ‘diem’에 대한 논의이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라틴어 ‘diem’을 ‘이날을, 하루를, 오늘을, 현재를’ 등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키냐르는 보다 정확을 기해 ‘하룻낮’ 혹은 ‘햇빛’을 제안한다.
키냐르의 논리는 (하루) → 낮jour → 하룻낮journée → 빛lumière으로 진행된다. 그동안의 일반적인 해석과 두드러진 차이는 ‘diem’의 역어인 ‘하루, 오늘’에서 ‘밤’을 제외하고 오직 ‘낮’만으로 제한한다는 점이다. 24시간을 12시간으로 축소하고, 또한 ‘낮’이라는 단어보다는 ‘지속’의 의미가 강조된 ‘하룻낮’이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밤’을 제외하는 이유로는 “인간은 결코 완전히 태어나지 않는다. 밤에 휴식을 취함으로써 지상에서의 삶 절반을 어머니의 품에 할애한다”라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논거를 제시한다.
밤은 빛이 사라진 하루의 반이며, 출생으로 대기권의 삶에 던져진 우리는 밤에 태아처럼 몸을 구부리고 잠을 잔다. 밤은 우리에게 ‘제2의 자궁’으로 기능한다. 키냐르의 용어로 말하면 밤은 우리가 ‘마지막 왕국(출생 이후의 삶)’에서 ‘최초의 왕국(출생 이전의 삶)’을 답습하는 시간이다. 즉 우리가 두 왕국에 양다리를 걸치는 시간이다. 하루에서 낮만이 오롯이 대기권의 삶에 속한다.
낮은, 보다 적확하게 하룻낮은 “잠에서 깨어난 주행성晝行性 동물들의 시선에 명확한 지각이 가능한 동안의 시간이며, 잎을 활짝 펼쳐 햇빛을 흡수하는 식물들에게 영양이 공급되는 동안의 시간”으로, 하룻낮은 밤과 밤 사이에 빛을 퍼뜨리는 무엇이다. 그 (햇)빛은 “하늘에 핀 일종의 꽃”이다.(113쪽) 그러므로 키냐르에 따르면 하룻낮과 (햇)빛은 동일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하다.
만년晩年에 이른 작가의 카르페 디엠
키냐르의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이 작품에서 드러난, 그동안과 다른 작가의 시선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동안 키냐르의 작품들은 ‘옛날-우주의 시초인 빅뱅, 우리가 부재했던, 사람으로 치면 수태 이전의 세계, 그렇기에 우리가 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이 결여되어 끊임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 접속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수태 이후에 대해서도 출생 이전(최초의 왕국)과 출생 이후(마지막 왕국)를 구분하고, 마지막 왕국이 그지없이 불편해서 최초의 왕국을 향한 미련과 그리움을 끊임없이 토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책 『하룻낮의 행복』에서는 ‘옛날’ 혹은 ‘최초의 왕국’에 대한 희구보다는 ‘마지막 왕국’에 대한 그의 온화한 시선이 돋보인다.
키냐르에게 출생은 엄마 배 속, 최초의 왕국에서 어둠 속에 있다가 속수무책의 존재가 되어 빛이 쏟아지는 고통의 장소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빛의 성격이, 빛에 대한 가치 부여가 달라진다. “하룻낮”(빛이 쏟아지는 공간)은 견뎌내야 할 장소에서 행복의 장소가 되었다. 심지어 작가는 이 시기를 살아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시기를 살았으므로 행복하다. 이 시대는 내게 잘 맞았다.
내 어머니의 흔들리는 비좁고 답답한 배 속에서
나는 새벽처럼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_168쪽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2017년에 그는 일흔 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의 “삶에서 매우 뒤늦게” 그는 “천상의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다. 빛의 끝에 곧 이르게 될 것이므로 못내 아쉽지만, 그럼에도 최초의 왕국에는 없는, 오직 마지막 왕국에만 있는 하룻낮의 햇빛을 뜯으며 “지속 상태의 기쁨”(135쪽)인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키냐르는 독서를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저자의) 정체성과 결합하는 경험”이라고 했다.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마침내 키냐르가 우리에게 고백한 행복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본문 속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날le jour을 따라, 뽑아라, 잡아채라.
수수께끼 같은 이 아름다운 구절의 의미를 알고 싶네요. 왜 이날을 따려고 하는지요?
지나가는 순간을 더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잇따르는 시간들 내부에서 그 순간을 잡아채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_12쪽
anthos가 꽃이므로, antho-logie는 ‘꽃들을 따기’입니다. 활짝 핀 첫 순간에 아름다워서 선별된 꽃들을 말입니다. 화관을 엮거나 꽃다발을 만들기에 최적인 색깔, 꽃잎, 꽃받침, 꽃부리, 향기에 따라 선별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영웅적인 사자死者들의 선집’입니다. ‘인용’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더 오래된 책에서 뽑아 더 최근의 책에 집어넣은 한 송이 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선집’, 즉 창작이 이루어진 시대와 환경에서 미리 떼어내서 빼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을 추린 ‘모음집’을 ‘anthologie(사화집)’이라 불렀습니다. _17~18쪽
라틴어 ‘Carpe diem’이라는 표현은 ‘너의 하룻낮을 베어라’보다는 ‘낮의 매 순간을 조금씩 풀을 뜯듯이 천천히 뜯고 잘게 빻아 씹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의 이런 말입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_22쪽
Give us a day, O Lord! 우리에게 다시 낮을 주소서, 오 주여!
그들이 요구하는 낮에는 생존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을 만큼 슬픈 감정’을 이겨내는 문제가 달려 있다. 입에 넣을 것이라고는 기도문의 ‘빵’이라는 단어가 전부다. 그들은 이내 기도문의 빵은 잊고 오직 ‘낮’이라는 단어만 기억한다. 낮은 삶에서 별의 핵과도 같은 것이다. Give us a day, O Lord! 우리에게 다시 낮을 주소서, 오 주여! _97쪽
우리에게 하루의 정수를 주소서. 아침부터 밤까지의 지속 시간을 한 번 더 주옵소서.
하루의 하룻낮을 통째로 다시 한번 살기, 그것이 나의 기도다. 단 하나의 기도다.
그저 하나의 낮을 살기.
낮의 행복을 다시 누리기.
지상에서 빛이 지속되는 대략 열두 시간을 다시 보내기,
밝음과 무지갯빛 광채, 오로라의 빛 속에서 퍼지는 외침, 그런 연후에 흐릿해짐, 부드러움, 식蝕, 황혼 녘의 고요와 어둠의 도래. _104쪽
바다가 육지에는 생명을, 대기에는 자연을 내뿜자 생명이 떠올라 빛 속에 퍼졌던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유일한 계통 발생적 식습관에 의해 육식동물이 채식동물을 잡아먹고, 채식동물이 자연 식물을 뜯어먹고, 자연 식물이 햇빛을 빨아들인다. 지구상에 순수 형태로 남은 그 유일한 자취는 오직 빛jour뿐이다.
다음은 프로이트의 말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히 태어나지 않는다. 밤에 휴식을 취함으로써 지상에서의 삶 절반을 어머니의 품에 할애한다.”
나머지 절반은 대기권에서 낮의 빛에 노출된 외재성의 삶으로 ‘하룻낮journée’이라 정의된다. 즉 매일의 활기차고 활동적인 변화무쌍한 삶이다._154쪽
나는 이 시기를 살았으므로 행복하다. 이 시대는 내게 잘 맞았다.
내 어머니의 흔들리는 비좁고 답답한 배 속에서
나는 새벽처럼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날은 왔지만, 태어나던 끔찍한 날에는 아무런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_168쪽
■ 차례
1. 꽃들을 죽이기
2. Dies est Dieu(낮은 신이다)
3. 불행
4. Stat rosa!(지난날의 장미!)
5. 낮이란 무엇인가?
6. Give us this day(우리에게 오늘을 주소서)
7. 시간의 근육
8. Flos est lux in caelum(빛은 천상의 꽃이다)
9. 북방가넷 짝들에 대하여
10. 취침
11. 고대 노르드인의 사회생활 초기 하루의 구성에 대하여
12. 행복과 이른 아침
13. 보뇌르 뒤 주르라는 명칭
14. Each day’s life(매일의 삶)
15. 하루 본연의 열매
16. 가을 낙엽 더미를 태우는 불에 대하여
옮긴이의 말・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작가 연보
작품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