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하림의 작품 세계와 삶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서른한 편의 글
최하림연구회에서 엮은 연구서 『최하림 다시 읽기』(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되었다. 흐르는 물과 머무르는 시간 속에 깊은 고요를 응시했던 최하림의 시 세계뿐 아니라, 가르침과 다독임으로 가득했던 생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 스물여덟 명 필자의 서른한 편 글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하림연구회의 황지우, 김선태, 박형준 시인이 편자로 참여하여 글을 정리하였고, 신안군청의 후원으로 도서가 제작되었음을 밝힌다. 「책머리에」에서 최하림연구회 회장 황지우는 최하림 시를 다시 읽으며 “삼라만상을 단 하나 예외 없이 소멸의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는 ‘시간의 화살’, 아픈 줄도 모르게 뚫고 지나가는 그 촉 자체를 선생은 관(貫)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질문한다. 우리 시대 최하림 시를 깊게, 다시 밝혀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여기 한 권의 책으로 열린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침묵과 파동의 여정”에서는 시인의 시적 지향과 생애 전반을 관통한 주제에 대해 시인이 직접 발화한 내용이 담긴 생전의 인터뷰 두 편과 그의 문학적 연대기를 총 정리한 박시영의 글이 담겼다. 제2부 “자애의 시학을 찾아서”에서는 최하림 시에 관한 논문 및 비평문 열세 편이 담겼다.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하던 초기 시 연구에서부터 ‘풍경’과 ‘고요’를 시로 담아낸 후기 시까지 시 창작 시기별 특징에 집중한 글뿐 아니라 동양화론과의 연관성, 뒤표지 산문을 통한 자의식 변화, ‘눈’ ‘빛’ ‘물’ ‘나무’와 같은 주요 심상 분석 등 다양한 시인론이 묶였다. 제3장 “최하림 들여다보기”는 〈인물 소묘〉란에 열한 명의 시인 후배와 제자, 그리고 가족들이 쓴 시인에 관한 산문이 실렸고, 이어 〈최하림 시론〉에서는 시인이 직접 쓴 본인 시론 두 편도 읽어볼 수 있다.
■ 본문에서
순수와 참여, 역사와 개인으로 양분된 당시의 문단에서 한쪽으로 기울지 못한 채, 그는 개인적 정서의 표현과 현실 참여의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어느 한쪽의 경향만을 고수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 정신과 내밀한 슬픔의 정서가 함께 자리한 때문이다. (박시영)
시인은 이제 시간을 느낄 뿐 발설하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만이 간직할 수 있는 침묵이다. 그 속에서는 “여러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둠 속으로 잠겨가듯” 풍경 또한 시간의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이 산 밑에 이르러 비로소 시적 자아는 시의 진심과 이마를 마주 대게 된다. “귀를 모으면 시의 숨소리도 들린다. 나는 시가 무엇이며, 왜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시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퇴화해버렸다. 나는 시 가까이, 가만히 있을 뿐”. 이제 그의 시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끝난다 한들 마침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김명인)
최하림 시의 역사성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초기 시에서의 역사성이란 어떤 차원에서는 단정할 수 없는 균열의 지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문단의 분리주의적 인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역사성과 심미성을 대립적 구도로 보는 관계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김문주가 최하림의 1980년대 이후의 시에서 ‘도덕적 심미성’을 발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예술가의 도덕적 고뇌를 심미적으로 전환하는 내적 동력을 심미적 윤리성으로 규정한다. (박슬기)
초기의 최하림은 세계의 중심을 관통하는 ‘언어의 풍경’을 염두에 두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전모와 배후를 담은 ‘풍경의 언어’를 빚는 데 주력했다. ‘언어의 풍경’이 비판적인 현실 인식을 내장한 언어와 시 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의 산물이었다면, ‘풍경의 언어’는 이 자의식을 바탕으로 유한한 존재의 시간을 사유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이)
나는 시인이 시대적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는 실존의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으며, 자신의 존재론적인 결여를 침묵 속에서 떠맡으면서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모험을 동반하고 있는 게 그의 ‘순수주의’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특히 그러면서도 소중히 지켜가고자 했던 그의 ‘역사주의’ 속엔 자신의 실존의 무게와 공동체의 운명이 함께 실려 있다고 확신한다. (정과리)
■ 최하림 약력
1939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散文時代)’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 『침묵의 빛』 등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이 있다.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4월 7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책을 펴내며 | ‘시간’을 관貫한 시인 황지우
제1부 침묵과 파동의 여정
〈인터뷰〉
고독과 자유, ‘보는 것’에 대한 시적 탐색 유성호
서성거리는 시인의 풍경과 역사 박형준
〈문학적 연대기〉
시인 최하림의 생애와 문학 박시영
제2부 자애의 시학을 찾아서
〈최하림론〉
최하림의 시론 연구 유성호
시간 속을 소용돌이치는 말들의 풍경 김명인
1960년대 동인지 『산문시대』와 최하림 전영주
역사성의 근원으로서의 심미성 박슬기
시대의 숲에서 풍경 속의 고요로 김춘식
시적 주체의 구성과 윤리적 양상의 변이형에 관한 고찰 김미미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김현
풍경, 바라보이는 자의 내면 최현식
최하림의 풍경 시학과 동양화론의 연관성 박옥순
‘눈[雪]’과 ‘빛’의 상상체계 김수이
최하림 시의 겨울나무 이미지 박형준
최하림 시의 ‘시행 엇붙임’ 양상 고찰 신익호
칼의 시대, 물의 시간 이문재
어떤 시인의 매우 오래된 과거의 깜박임 정과리
제3부 최하림 들여다보기
〈인물 소묘〉
최하림 시인과 신안·목포 김선태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사실 측백나무입니다 이기인
나는 뭐라 그리워해야 할까요? 이병률
최하림 선생님은 시인입니다 이승희
선생님은 거기 계시다 이원
선생님의 선물 이향희
말들의 시간성과 구천동 시론 임동확
소슬한 봄꽃 앞에 앉다 장석남
모든 것을 버리고 날아올라 하늘에 닿는 것 최승린
아버지, 최하림 최승집
어느 날의 어스름은 지금도 찾아온다 황학주
〈최하림 시론〉
시에 관한 단상(2001~02)
시간의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