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일상이라곤 가져볼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으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방랑의 길 위에서
한 줄기 빛을 움켜쥐는 시인의 마음
201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윤은성의 첫번째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되었다. “시적 언어로 전개되는 모험의 풍경을 아름답고 활달하게 그려낸다”(문학평론가 강동호)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4년간 쓰고 다듬은 시편들을 한데 묶었다.
“방랑자의 기질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질이 슬픔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운명을 타고났다는 문학평론가 이경수의 해설처럼 윤은성의 시에서는 예민하되 사려 깊은 화자가,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레 꺼내 보이는 주체가 나타난다.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선 가난한 여행자처럼”(「해解와 파열」)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을 헤매고 다닌 자의 비감과 체념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렇지만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빛을/마지막까지 꺼뜨리지 않”(「대림에서」)고 기꺼이 기다림을 선택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용기 있게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러므로 『주소를 쥐고』는 오늘날 안정된 환경을 보장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는 청춘들의 곤궁과 불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거리”에서도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떠올리려 애쓰는 시인의 다정한 마음으로 빛을 발한다(「2월의 눈」).
위태로운 날들을 견뎌내는 시
윤은성의 시에서는 오랜 시간 길 위를 헤매고 다닌 이의 빛깔과 향기, 떨림이 감지된다. 손 내밀면 금세 달아날 것 같은 상처받은 이의 태도, 그 상처의 깊이마저 느껴진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왔구나”라는 말을 대신할 말을 찾으면서.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너편 플랫폼을 살피기도 하면서.
[……]
손을 쥐었다 펼쳐본다.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여기에도 새가 산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
―「주소를 쥐고」 부분
이 시에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너편 플랫폼을” 살피면서 “계속” 기다림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는 ‘나’는 마치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절망과 실패에 어느 정도 길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의 주체는 “여기에도 새가 산다”는 지극히 별것 아닌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곳에도 다른 생명이 존재하며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오리라는, 빛으로 환해지는 순간이 도래하리라는 예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은 기다림 속에서 피치 못할 불안감에 사로잡히지만 쉬이 단념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손에 꼭 쥔 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그럼에도 서로를 놓지 않는다는 것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마주하게 된 누군가를 시인은 어떠한 태도로 맞이할까. 그것은 『주소를 쥐고』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서 아이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아이가 자라고
멀리서 시위에 참여하고 크레인에 오른다. 아이는 외칠 곳을 찾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되돌리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 높은 곳에서 아이는 내려다본다. 나는 아이가아이가 내게로 투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름 뚫기」 부분
이 시에서 아이들은 창문을 깨기 위해 돌을 던지거나 나를 치고 달려가는 무례한 존재들로 나타난다. “내가 다른 것을 보는 사이 아이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나타나 나를 가만히 잠시 보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크레인에 오른 “아이가 내게로 투신”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를 회피하지 않고 주저 없이 “아이를 받으려고/아래서 몸을 움직”인다. 이는 얼핏 당연한 대응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에 가깝다. 추락하는 이를 기꺼이 받아 안으려는, 생면부지의 타인이 담지하고 있을 공포와 외로움까지 부드럽게 포옹하려는 용기이다. 그러므로 『주소를 쥐고』는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이루어지는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끝내 사랑을 놓아버리지 않는 시인의 단단한 의지와 온기가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우는 아이의 뒤를 따라 언덕을 걸어 오른다. 두 눈을 꼭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서 빛이 들어온다.
―「무한 사선」 부분
■ 추천의 말
윤은성 시의 주체는 길 위에 서 있다.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다가 결국 떠나올 수밖에 없었고 익숙한 곳을 떠나 오래 떠돌 수밖에 없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상처투성이의 존재임에도 그가 여전히 사랑이 많은 주체라는 사실이다.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나와 다른 타자를, 그리고 그와 꾸려갈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_이경수(문학평론가)
■ 시집 속으로
여기만 지나면 마을이 나온다고 그가 말한다.
터널 안에서.
우리를 지나치고 있는 생각들 안에서
―「비단길앞잡이」 부분
나는 내가 두고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영원히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일단락」 부분
주우러 간 적 없을 때에만
비로소 낙과落果는 안전하게 썩어갈까.
―「전제와 근황」 부분
깨어나니 내가 살아 있었다
혼자 남아서
그가 일부러 남겨둔 적 없는 슬픔을
뒤늦게 이해하는 데에
그 모든 빛이 내게
소용될 것이었다
―「유월의 숨」 부분
■ 뒤표지 글
이곳에서 어느덧 꽤 오랜 시간을. 겨울들을. 우리가 마주한 얼굴과. 이유를 알 수 없이 호흡의 간격을 기억해두게 되는. 하지만 결국은 모르게 될 것인. 그럼에도 결코 내가 너를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내가 아는 만큼의 너를 조금은 아는 체할 수 있다면 그것만은 우리가 아주 먼 미래에도 떠올리며 서로를 조심스레 불러볼 수도 있는 근거들이 될 거라고.
종결 없는 의미를.
끝나지 않을
일단락을.
놓친 버스의
배차 간격을 가늠하며
긴 도로를 걷고 있는
작은 두
사람을.
■ 시인의 말
그러다 구름이 더 모이면
잠깐은 우리인가 하면서.
2021년 가을
윤은성
시인의 말
1부 주소를 쥐고
해解와 파열/비단길앞잡이/계약/양남/주소를 쥐고/깨진 거울 치우기/대림에서/미드레벨 무빙워크/날의 지속/밤의 결정/우리가 있었고, 여름
2부 아음牙音의 파열
원탁 투명/공원의 전개/화이트홀/파티션/나의 소울메이트/여름 뚫기/무한 사선/로터리를 지나고/실전/사업장/선셋 롤러코스터
3부 부서진 식탁에 놓아둔 것들
농담/양남/2월의 눈/일단락/물의 뿔/수요일/잔여일/뿔 쪽으로/의자 밑에서 듣는다
4부 새벽녘의 플랫폼이 서서히 밝아오는 것과
라플라타에서/계기/필요의 양/일요일/재의 옷/레슨/장미 광장/현악/이미
제5부 유월의 숨
전제와 근황/정확한 주소/요일들/커튼 사이로 흰/겨울을 보내고 쓴다/밤의 엔지니어에게/유월의 숨/나의 서울
해설
이방인의 금 간 얼굴・이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