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가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1년 8월 27일 | ISBN 1227285X

사양

책소개

가을호를 펴내며

죽음의 죽음

모두가 읽을 줄 알게 되면 결국 글쓰기는 물론 생각도 부패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죽음은 죽었다. 철 지난 상투어처럼 느껴질 것이다. ‘죽음이 죽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람.’ 아마도 이것이 그 인식의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처럼 화석화된 인식이 저 여섯 글자의 진실성을 또렷이 방증한다. 생성되는 모든 것이 새롭지만 새뜻한 모든 것이 즉각 낡아버리는 세계, 이것이 우리의 세상이며 또한 모두의 미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만이 새롭고, 오직 낯선 미지의 것만이 가치를 점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제 (소박한 의미에서의) 일반적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가치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철저한 미래 시제의 질서 안에서 본질상 모든 것을 과거지사로 돌릴 수밖에 없는 죽음이 대체 무슨 수로 권리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는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했지만, 다시 말해 죽음 자체만은 평등의 예외였지만, 이제는 죽음마저도 절대적인 수평 차원으로 추락해버렸다. 죽음의 죽음에 대한 냉혹한 무관심 혹은 획일적 무감각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러한 무차별적 균질의 세계로부터 소외된 자들은 그러니 얼마나 축복받은 자들인가! 그 소외를 통해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 모두로부터 거리를 획득한 존재, 그러니까 나머지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시간을 맞고 또 보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미리 상실한 미래에 대해 조금도 마음 쓸 필요가 없는 자들, 그러니까 죽은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죽은 자들, 요컨대 죽음을 온전히 누렸고 그리하여 삶의 역사­이야기Geschichte에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자들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의 행복은 죽음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의) 능력 덕분에 완결될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은 죽었다. 이 문장에서는 과소평가된 독일 광인의 선언(“신은 죽었다”)도, 과대평가된 일본 논객의 진단(“근대문학은 죽었다”)도 메아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제대로 죽을 수 없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새로운 명제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시대정신Zeitgeist일까? 정말로 우리는 모두 시대정신의 노예인 걸까? 죽음마저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것이 시대정신의 위력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과 실천과 희망 일체가 오롯이 시대정신의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그 일정표는 가히 살인적이며 능히 성사(聖事)적이다. 그러므로 웬만해서는 일탈할 수 없고,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변경할 수 없다. 한때는 가령 달력을 찢거나 시계를 부수는 행위를 통해 상징적인 차원에서나마 일종의 저항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도주의 제스처마저 불가능해졌다. 시대정신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상징으로 바꿔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반론이 쇄도할 것이다. ‘시대정신은 결국 허깨비가 아닌가? 그것은 아무런 실체를 갖지 못한 것, 그러니까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만약 이 시대의 모든 현존재가 그런 허깨비의 노예라면, 결국 그 말은 우리가 온통 집단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과연 그게 가당하기나 한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무한히 넓은 원의 (지극히 작은) 일부가 우리의 동그란 눈에는 올곧은 직선으로 비칠 수밖에 없듯이, 역사의 종말과 대결하는 가공할 시대정신은 우리의 (조각난) 인식 체계에게는 그 일면만 해도 실로 거대한 실체처럼 지각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더없이 자명한 이치거니와, 시대정신의 실력은 어떤 잣대로도 평가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압력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미미한 반사 이익을 도모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대정신은 형이상학을 포괄한다. 그 반대가 아니다. 시대정신이 정치경제학을 선도한다. 그 역이 아니다.

물론 그럴 의지만 있다면, 시대정신의 존재와 그 사실성을 모두 거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 그것은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부정의 정신이 갈 수 있는 곳은, 냉정하게 말해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단 한 곳, 자신의 내면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내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를 정립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표현의 가능성을 스스로 삭제한 내면은, 존재위상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죽은 죽음과 같은 층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침묵이 적극적인 저항 잠재력을 담보하던 시대는 오래전에 저물었다. 현재의 시대정신은 그 어떤 표현도 결코 억압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부적절한’ 표현을 재빨리 산패시킬 뿐이다. 그 결과, 오늘날 담론의 풍경은 부패한 언어들로 과밀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도 그것의 선명한 전경(前景)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썩어질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언어는 없다. 그러므로 오직 부패만이 번성한다. 어쩌면 다름 아닌 그 부패의 총합이야말로 우리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은 무한히 팽창하는 중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부패는 부단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자는 이것을 매체 네트워크―한때 우리가 ‘언론’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의 변이형―의 근본 메커니즘으로 규정할 수도 있으리라. 그야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적절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적확할 수 있겠지만, 섣불리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기준을 안다고 주장하는 갖가지 관점이 거세게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난립 상황은 차라리 긍정적이다. 정말로 비극적인 것은, 기준을 조율하고 확립하려는 온갖 노력이 ‘알 게 뭐람’의 정신 앞에서는 일거에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죽음을 감지하는 언어는 그저 신음할 수밖에 없다.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은 그 신음을 선명히 기록해두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문학과 사회”라는 두 개의 극pole을 키워드로 제시했는데, 이는 언어 일반의 극단을 표시하는 두 항 사이의 연결사(連結詞)―보통 ‘계사’ ‘조사’ 혹은 ‘접속사’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단어―안에서 죽은 죽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바꿔 말해, ‘문학과 사회’는 ‘존재와 시간’의 강력한 변주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먼저 불문학자 송홍진의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 작품은 그것이 완전한 사회적 단절에의 희원을 담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욱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성찰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에서 출발하는 이 글은 그가 인용한 보들레르의 다음 문장에서 모종의 광휘를 얻는다. “한 대의 촛불로 밝힌 창보다 더 깊고 더 불가사의하고 더 풍부하며 더 컴컴하고 더 찬란한 물체는 없다.” ‘문학과 사회’를 ‘문학 또는 사회’로 개정하려는 시도를 담은 양순모의 글도 흥미롭다. 문학이 사회라는 타자에 스스로를 내어주는 실험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이 글은 ‘문학과 사회’가 ‘문학 즉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김보경의 글은 ‘문학과 사회’라는 짝패의 (부당한) 지속 안에서 눈에 띄지 않게 꾸준히 실종되는 것에 시선을 던진다. 따로 새겨둘 만한 두 문장은 글의 말미에 등장한다. “쉬운 글은 없다. 우리가 쉽게 읽는 것이다.” 쉽게 씌어진 글들이 뭇 사람들의 사유와 인식을 치명적으로 호도하는 세태를 감안할 때, 저 단언은 특별히 주의 깊은 음미를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 김보경의 그것과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홍성희의 글은 비평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언제나 이미’ 상정하는 ‘바깥’에 존재하는 문학은 그 자체로 “이미 파국”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 이름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결론은 섣부른 수긍이나 동의를 정중히 사양하는 제스처를 내포하는 문장이며, 나아가 공부와 고민을 함께 심화해나가자는 청유형의 문장으로 읽혀야 옳을 듯하다. 신예 비평가 이희우의 글은 신인의 패기와 치열한 비판 의식을 함께 보여준다. “적대도 사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예사롭지 않은 인식을 담은 이 글은 “보편성을 보여주는 단 한 번의 문학적 창안”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전언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때 독자로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물론 ‘어떤 보편성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또 다른 신예 비평가 이소의 글은 담백한 문체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시간의 목격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하고 협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고백은 “읽고 쓰는 동안에만 발생하는 화살표”에 대한 짙은 애정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그런 화살표의 존재를 감지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참담한 것을 가리키고 있어도” 즐거움을 느낀다는 그의 진술은 과연 ‘문학과 사회’가 언어 일반의 두 극단이라는 사실을 거듭 되새기도록 한다. 홍성희의 표현을 비틀어 이용하자면,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도록 하는’ 작가 이여로의 글은 이번 하이픈 기획에서 가장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전문성’이라는 관념과 조건에 의해 지연되거나 좌절된 행동”에 대한 불만이 사회에 미만해 있다는 그의 비판적 인식은 그를 아마추어리즘으로 이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자기생산의 과정으로 되돌려놓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아마추어로서 그가 내비치는 자부심은 죽은 죽음을 부여안고 신음하는 언어의 떨림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불문학자 한석현의 글은 지난 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아마추어리스트 롤랑 바르트에 대한 흥미로운 서사를 독특한 필치로 보여준다. 이 서사에는 “롤랑 바르트 문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롤랑 바르트 문제’가 극화하는 것은 결국 평형 상태, 움직임이 잦아들 부동 지점, 적정한 거리의 발견이 아니라, 진동의 움직임 자체이다. [……] 그 드라마 속에서 운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며, 딜레마는 딜레마로 남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일견 부조리해 보이는 당위를 표현하는 이 명제는 이번 호 하이픈을 기획하면서 우리가 고민했던 모든 문제 사태를 탁월하게 응축하고 있다. 딜레마에 직면한 모든 독자의 신중한 일독을 권한다.

본권의 창작란에서는 황인숙, 김중일, 강성은, 이제니, 김승일, 임지은, 임유영, 이기리, 김민식의 시와 이장욱, 정용준, 김멜라, 천선란의 소설이 독자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다. 비평가 김나영, 최가은, 양윤의, 임정균, 한영인이 신간 시집과 소설에 대한 리뷰를 써주었다.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본권의 〈지성〉란에는 원로 불문학자이자 푸코 전문가인 오생근이 직접 번역한 『육체의 고백』(미셸 푸코, 나남출판, 2019)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집필하여 보내주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독서를 기대한다.

‘문학과 사회’의 연결은 항시 불안정하며, 서로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때그때 나오는 결과물은 어떤 면에서 심히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시류에 영합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류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의 원동력이다.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오류의 노예가 되는 상황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문학과사회』는 계속 하이픈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편집동인 조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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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문학 – 사회
홍성희 모르는 일이지만,
김보경 실종
이희우 사랑은 사유다
—미학·현실·보편성
이소 호빵과 오이와 목격의 화살표
—문학과 사회에 대한 의식의 흐름
양순모 문학 또는 사회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송홍진 창문의 시학 또는 메타시학: 문예–창문–사회
—보들레르의 「창문들」과 이창동의 「버닝」
한석현 “고유리듬idiorrythmie”의 물리, 윤리,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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