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예술에 골몰해온 한국 현대희곡 100년사
시대정신과 경향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대표작 9선
한국 최초 근대희곡인 이광수 「규한」(『학지광』, 1917) 발표 100년을 맞아 초판이 출간되었던 『한국 현대희곡선』이 2021년 재정비를 마치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그간 <한국문학전집>이 집중해온 한국 근현대문학의 출발 시점에 더욱 충실해져, 1920년대 주요 희곡 두 편이 추가됐다. 영화 「사의 찬미」로 대중에게 익숙한 작가 김우진의 「산돼지」와 근대 여성문학사를 열었다고도 평가받는 김명순의 「두 애인」이다. 이어 1930년대 사실주의극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유치진의 「토막」, 해방 이후 혼란기의 기회주의를 비판한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고전과 전통을 실험으로 새롭게 해석해낸 최인훈, 이현화, 이강백의 비(非)사실주의 극 등까지 각 시기의 시대정신과 연극 경향을 대표할 만한 희곡을 골고루 선별하여 묶었다. 책임 편집을 맡은 연극평론가이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이상우는 작품 선별 기준과 책의 구성에 관하여,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대표 희곡 중에서도 가장 작품성과 대중적 지지를 받아온 희곡을 선하였고, 주류 양식인 사실주의극과 비사실주의극이 마주치면서 발전해온 한국 현대연극사의 맥락을 고려하여 두 장르를 균형감 있게 안배하였다고 밝혔다. 더하여 이번 개정판에서는 변화한 저작권 상황으로 인한 현실적 사정과 더불어 청소년의 문학 학습 보조서로서 역할하고 있는 <한국문학전집>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작품 선정 대상 시기 및 편수를 조정했음도 밝힌다.
1920년대 한국 현대희곡의 태동과 고뇌하는 지식인의 초상: 김우진, 김명순
각종 교과서에 수록되고 모의고사에서도 다수 출제된 바 있는 김우진의 「산돼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품이다. 홍난파, 마해송 등과 함께 도쿄 유학생 모임 동우회에 참여하여 순회 연극단을 조직해본 경험을 가지고 귀국한 김우진은 시, 소설, 평론, 희곡 창작에 열성을 보였다. 그의 유작 「산돼지」는 작가 자신을 연상케 하는 인물(원봉)이 등장해 그를 에워싼 봉건적 인습과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내면적 고뇌를 치열하게 묘사한다. 김우진은 1926년 이 작품을 극예술협회 동료이자 친구인 조명희에게 우편으로 보내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연락선을 타고 가다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동반 투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엽, 나혜석 등과 함께 1세대 신여성으로 꼽히는 김명순은 자전적 소재를 다루는 희곡 두 편을 남겼다. 「두 애인」은 남편과 비접촉을 조건으로 계약결혼을 한 인물(기정)이 청교도주의자(춘영)와 사회주의자(관주)를 각각 애인으로 두고 그들과 ‘영적 연애’를 하지만, 두 애인의 부인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해 비극적 결말을 맞는 이야기이다.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영혼-육체의 일치를 추구하는 연애 풍조와 김명순이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은 작가 자신이 성폭력 피해생존자였던 개인사와 맞닿는 부분으로 읽힌다. 1세대 신여성 다수가 그러했듯 시대와 불화하다 고통스러운 말년을 맞았던 김명순의 삶을 비추는 반사경 같은 희곡이 바로 이 작품이다.
1930년대 빈곤의 민낯을 담은 사실주의극의 정수: 유치진, 함세덕
한국의 신극은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의 결성을 통해 확립되었으며, 유치진, 이무영, 이서향, 함세덕 등의 창작극은 근대 사실주의극이 성립되던 초반 크게 기여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인 유치진의 「토막」(1932)은 당시 대표적인 극빈층이었던 토막민의 비참한 삶을 통해 식민지 농민의 보편적 궁핍을 형상화한 희곡이다. 7년간 기다리던 아들이 유골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마다 보이는 분노와 초탈, 다짐 등의 반응은 아들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민족의 비애, 혹은 민중의 비애에 대한 각기 다른 태도를 반영한다고 독해된다.
또한 이런 시대 인식은 후기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연극계에 입문하게 되는 극작가 함세덕의 「산허구리」(1936)에 의해 계승되었다.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희곡 또한 식민지 민중의 지독한 궁핍과 피폐한 생활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둘째 아들이 풍랑을 만나 주검으로 돌아오며 비극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족들이 보여주는 비장함, 광기, 초탈, 자각 등의 반응에서 「토막」과 유사한 시대인식도 엿볼 수 있다.
해방기와 전후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오영진, 차범석
194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오영진은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해방 이후 희곡으로 당대 사회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1949)를 통해 해방을 맞아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재빠르게 변신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 반민족행위 부역자들의 탐욕성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이후 1950년대 중후반 대표적인 전후 신세대 극작가로 꼽을 수 있는 차범석은 「불모지」(1957)를 통해 전후 사회의 병리 현상을 흥미롭게 극화하였다. 그는 전후 현실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노동과 학업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경운·경재를 허황된 망상에 빠져 파별한 경수·경애와 대비시키며 도래할 사회의 희망과 전망을 제시하였다.
전통의 재창조와 실험 사이에서: 최인훈, 이현화
1970년대 한국 연극의 키워드는 전통과 실험이었다. 한국 연극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각이 강렬하게 제기되었던 시기로, 이는 주로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 작업을 통해 나타났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는 최인훈의 희곡 가운데 한국적 비극 세계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작품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민중 영웅인 아기장수가 민중(자기 아버지) 스스로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아기장수가 어머니를 용마에 태우고 아버지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결말에서 화해와 용서라는 한국적 비극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1970~80년대 한국 연극계에서 전위적 연극 실험 작업에 가장 앞장선 극작가로 이현화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극단적인 부조리성과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세계의 무자비한 폭력성 등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의 연극실험은 파격적이었고, 난해했으며, 당시 연극계에서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카덴자」(1978) 역시 세조의 왕위 찬탈과 그에 대한 사육신의 항거를 기본서사로 설정했으나, 관객으로 설정된 여성을 연극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
현대적 우화극을 통한 현실 비판: 이강백
다채로운 비사실주의극의 등장 속에 우화적 기법을 본격화한 대표 극작가가 이강백이다. 「봄날」(1984)은 우화 대신에 전래의 「동녀(童女)설화」에서 우의적 상황을 끌어와서 모든 것을 가진 탐욕스런 아버지와 거기에 불만을 갖고 대응하는 일곱 명의 아들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설화라는 우화적 설정의 토대 위에 동화 속 인물처럼 묘사된 아버지와 자식들이라는 우화적 인물 설정, 그리고 시, 그림, 영상, 연주, 속요, 산문, 약전, 편지 등을 각 장에 배치하여 서사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킨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일러두기
산돼지_김우진
두 애인_김명순
토막_유치진
산허구리_함세덕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_오영진
불모지_차범석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_최인훈
카덴자_이현화
봄날_이강백
작품 해설
한국 현대희곡의 계보를 찾아서/이상우
작가 연보 및 주요 작품 연보
참고 문헌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