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이 알려주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느낀다.
낮이 알지 못하는 밤의 이야기들을”
예기치 못한 생의 엇갈림 속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영원의 노래
문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 이장욱의 세번째 장편소설 『캐럴』(문학과지성사, 2021)이 출간되었다. 철학적 성찰과 영화적 형식으로 “신(新)서사”를 직조해냈다는 평을 받은 두번째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 이후 8년 만의 신작이다. 계간 『문학과사회』에 2017년 겨울부터 2018년 가을까지 “밤과 미래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작품을 깊이 숙고하여 다듬었다.
세련된 언어와 치밀한 구성으로 진실 너머의 미지를 묘사해온 이장욱은 이번 작품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인물들이 기묘한 궤적으로 연결되고 엇갈리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알 수 없는 사이에 우리를 조금씩 다른 세계에 접속하게 만드는 순간들. 희미하고 파편적으로 잠복해 있다가 조용히, 때로는 갑작스럽게, 우리의 내부로 흘러드는 순간들”을 포착하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별안간 틈입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불가해한 징조들을 아름답게 세공된 문장으로 그려낸다. 그러므로 『캐럴』을 읽는 일은 은연중에 반복되고 변주되는 서사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는 독특한 리듬, 그 리듬 속에서 예기치 않은 합일과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을 작가의 지적인 문장을 따라 경이롭게 감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이면과 언제나 타자로 존재하는 사랑의 신비로움까지 두루 살피며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확장한다.
기억한다. 그때 밤하늘에 점점이 흩날리던 눈송이들의 궤적을. 눈송이들은 캄캄한 하늘을 배경으로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궤적들을 선으로 그려볼 수 있다면. 그 궤적들을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궤적을 계산해낼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pp. 18~19)
이질적인 그러나 매혹적인 세계로의 접속
『캐럴』은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윤호연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자신이 윤호연의 아내 선우정의 전 남자친구이고 오늘 자살할 것이라며 만나달라고 청한다. 자신이 죽으면 윤호연 역시 죽게 되리라는 허무맹랑한 협박을 덧붙이면서. 그런 난데없는 통화에 윤호연은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응? 내가?”
“네, 그쪽이.”
“자네가 아니고 내가?”
흐흐. 나는 웃음을 흘렸다. 젊은 친구는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도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나를 스쳐 갔다. 그의 시선에서 어딘지 슬픔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전해졌던 것이다. (p. 48)
이 수수께끼 같은 만남 이후 장이 바뀌면 1999년의 어느 아침, 모텔에서 깨어나는 도현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난밤 윤호연을 불러내 함께 술을 마신 청년이 바로 도현도였음이 드러나고 그의 이불 속에 잠들어 있는 고양이, 벽에 걸린 액자, 식당에서 우연히 듣는 말 등을 통해 도현도의 삶이 윤호연의 삶과 부분적으로 일치함 또한 암시된다. 이후로도 두 인물의 서사는 대사와 감정,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20년이라는 시차를 가로질러 세밀하게 접합된다. 마치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흘러나오는 바흐의 「평균율」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정교한 형식처럼. 그렇게 수없이 겹치고 어긋나던 두 이야기는 도현도가 느닷없이 받게 되는 고액의 채권추심 통지서로 인해 분명하게 포개어진다. 통지서에 연대채무자로 함께 적혀 있는 이름이 윤호연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채무가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호연이라는 사람에게도 채무가 있는 모양이고…… 나에게도 채무가 있는 모양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빚을 진 것도 같았다. 언제, 누구에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p. 168)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인물의 삶을 한데 겹쳐놓는 방식과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운명의 공동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절묘한 플롯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불가해한 운명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들
『캐럴』은 총 1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주요한 모티프인 무한 기호(∞) 이야기를 담은 첫번째 장을 제외하면 윤호연의 에피소드가 8개, 도현도의 에피소드가 8개로 동등하게 분할되어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차례’에는 표시되지 않은, 어두운 바탕의 페이지들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바로 선우정의 목소리가 담긴 장이다. 이 흑면의 내용은 마치 한밤중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처럼, 한겨울에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처럼 대응되어 흐르는 두 서사의 간극을 부드럽게 메우면서 작품 전체를 조금씩 장악해나간다. 두 인물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빠져들었던 사랑처럼, 자기도 모르게 저질러버린 잘못과 그로 인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처럼.
이렇듯 이장욱은 표면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하여 미리 대비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서 부지불식간에 현실로 엄습해오는 불가해한 힘을 작품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생을 굴복시키는 미지의 영향력이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역전해올 수도 있음을 다층적 시공간의 결속과 순환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캐럴』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게 이 세계의 원리”(p. 236)라는 진실을 작가 특유의 보르헤스적 상상력과 문체로 형상화한 수작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동일한 궤적을 공유하는 단 하나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지는, 밤하늘 아래 한줄기 빛처럼 찬연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두 개의 원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를.
너와 나와 그의 이야기를. 너와 너의 이야기를.
1999년 서울에서 2019년 서울까지.
무한한 빛을 발하는 밤하늘 아래. (p. 20)
■ 책 속으로
이상한 일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되다니.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 강해지다니. 사랑도 마찬가지인가. 당신을 온전히 알지 못해서 사랑의 감정이 고양되는 건가. 나에게는 그런 것이 무섭고도 우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p. 10)
따뜻한 것은 차가워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차가운 것은 따뜻해지는 쪽으로 움직인다.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은 서로 스며든다. 내 손의 냉기는 조금씩 잦아들겠지. 너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가겠지. 언젠가는 평형에 이를 것이다. 평형에 이르면 마음의 움직임도 조용히 멈출 것이다. (pp. 107~08)
너는 나의 밤을 오래고 깊이 보아주기를. 너의 편지와 너의 외로움 바깥에 차갑게 끓고 있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pp. 196~97)
당신은 지금까지의 삶이 낯설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이 순간은 삶보다 죽음 이후에 가깝다는 기분이 된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다른 종류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상하고 신선한 세계가? (p. 303)
■ 작가의 말
사랑 없는 삶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미래의 어느 날에는.
오늘은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여기서부터 미래의 밤……이라고.
미래의 밤도 밤이므로 밤으로서 어두울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언제나 미래는 지금 여기서부터라는
아주 단순하고 심심한 사실을.
2021년 6월
이장욱
0. 밤하늘의 수수께끼
1. 크리스마스 캐럴
2. 코스타 델 솔의 아침
3. 미래의 연인을 기억하기
4. 렛 미 인
5. 마네키네코의 아침
6. 21세기 로망스
7. 체스의 딜레마
8. 람페는 잊어야 한다
9. 골목에서 골목으로
10. 휘파람을 불며 휘파람을 불며
11. 자정의 사무실은 어디에
12. 도미노
13. 타우마타와카탕이항아코아우아우오타마테아투리푸카카피키마웅아호로누쿠포카이웨누아키타나타후
14. 지하에서 지하로
15. 태양의 해변에서
0. 여기서부터 미래의 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