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내용, 복잡한 심리, 인간성에 가닿는 예리함……
손바닥만 한 길이의 소설에 담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정수!
“짧다, 그러나 여운은 길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우리에게 『설국』으로 잘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짧은 소설 122편을 모은 『손바닥 소설 1・2』(유숙자 옮김)가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새롭게 리뉴얼되어 출간되었다. 2010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손바닥 소설』이 그중 68편을 선별해 묶어냈다면, 이번에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손바닥 소설 1・2』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이 작품집을 완역하여 펴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책의 제목인 ‘손바닥 소설’이란 ‘손바닥에 써질 정도로 짧은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번에 출간된 『손바닥 소설 1・2』에 실린 작품들도 그 이름에 걸맞게 대부분 200자 원고지 15매 안팎의 분량이며, 짧은 것은 심지어 2매, 긴 것 또한 32매 남짓하다. 즉 이 책에 실린 작품들 대부분이 길어야 겨우 30매가 될까 말까 한 극히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길이가 아니다.
평론가들은 ‘가와바타 문학의 고향’ 혹은 ‘가와바타 문학을 여는 열쇠’라는 표현으로 이 작품집에 의미를 부여했다. 작가 자신 스스로가 이 소설을 가리켜 ‘나의 표본실’이라 불렀을뿐더러, 가와바타 문학의 권위자인 마쓰자가 도시오松坂俊夫가 지적한 대로 질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와 더불어 그 작품 수 또한 매우 많기 때문이다. ‘손바닥 소설’은 잠깐 중단된 시기도 있었으나 20대 초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가와바타 전 생애에 걸쳐 집필되었으며, 연구자에 따라 적게는 120여 편에서 많게는 175편에 이르는 작품 수에서 드러나듯 작가 자신의 남다른 애착과 열정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특히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소재, 발상, 문체 등은 바로 가와바타 문학의 원점을 형성한다고 할 만하다. 다시 말해 ‘가와바타의 모든 것’이 여기에 응축된 것이다. 남녀 간의 미묘한 심리, 부부 사이의 애정 표현, 복잡한 인간 심리, 풍속적인 내용, 새와 짐승을 소재로 삼은 작품, 소년 소녀의 사랑, 자전적인 작품, 윤회 사상, 일상과 이탈, 야성적 미에 대한 동경 등 다채로운 소재와 내용이 그 어느 소설보다도 실험적인 기법으로 때로는 기괴하게, 때로는 환상적・몽환적인 분위기를 띠며 곳곳에 매복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와바타는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사랑과 이별, 꿈, 고독, 죽음, 젊음과 늙음 등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한 갈피씩을 냉혹하고 적나라하게, 그러나 따듯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은 ‘손바닥만 한 길이’라는 특성상 한층 간결하고 섬세하게, 함축적인 울림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따라서 『손바닥 소설 1・2』는 한마디로 ‘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소설이 시적 감흥으로 넘치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무한대로 팽창시킨다. 소설은 끝났는데 이야기의 여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돈다.
이 중 「고맙습니다」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대표작이다. 어머니가 딸을 팔러 가기 위해 함께 버스를 타는 데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는 데서 끝난다. 좁디좁은 산길을 달릴 때마다 갓길로 비켜주는 승합마차와 짐수레와 인력거, 심지어 말에게까지 ‘고맙습니다’를 잊지 않는, ‘고맙습니다 씨’라고 불리는 마음 착한 운전사 때문일까. 어머니가 딸을 팔아야 하는 극도로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짤막한 소설은 더없이 따스하고 훈훈하게 읽힌다. 또 다른 소설 「동반 자살」은 애정의 속박, 허무와 슬픔을 다룬 작품으로, 손바닥 소설의 정점에 있다는 극찬을 받는다. 쇼트 쇼트short-short 형식의 소설을 다작한 호시 신이치는 이 작품을 가리켜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도 ‘도저히 쓸 수 없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가와바타 자신의 자전적인 작품으로는 이 책에 첫번째로 실린 「뼈 줍기」를 들 수 있다. 앞을 못 보는 조부의 죽음에 대해 쓴 ‘열여덟 살의 문장’이 기술된다. 알려진 대로 가와바타는 어린 시절 잇달아 부모를 잃고 16세 때까지 조부와 단둘이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체득된 허무감, 덧없음은 가와바타 문학의 뿌리로 자리 잡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되는 『설국』에서 겹겹이 감춰진 상징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구사한 가와바타의 문체는 『손바닥 소설 1・2』에서도 생생하게 빛을 발한다. 이 책에 실린 각 작품의 발표 시기와 같은 시기에 발표된 중・단편 소설들의 주제 및 발상이 서로 호응 관계에 있다는 점, 스토리 중심의 소설이라기보다 시적인 서정성이 돋보이는 『설국』이 여러 ‘손바닥 소설’들로 구성되어 그 기법의 특징을 드러낸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손바닥 소설 1・2』가 가와바타 문학 세계가 품은 시혼詩魂의 전형이자 정수라는 평가가 과하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책 속으로
올해는 감 풍년이라 산 가을이 아름답다.
반도 남단의 항구. 막과자가 진열된 대합실 2층에서 자줏빛 옷깃의 노란 옷을 입은 운전사가 내려온다. 밖에는 빨간색 대형 정기 승합자동차가 자줏빛 깃발을 세우고 있다.
어머니는 막과자가 든 종이봉투 주둥이를 다잡아 쥐고 몸을 일으키며, 구두끈을 말쑥하게 묶고 있는 운전사에게 말한다.
“오늘은 자네가 당번이로구먼. 그렇구먼. ‘고맙습니다’ 씨가 데려가준다면 이 아이한테도 행운이 찾아와줄 테지. 좋은 일이 생길 징조구먼.”
운전사는 곁의 처녀를 보고 말이 없다.
“언제까지고 미뤄본들 기약 없으니께. 더구나 이제 곧 겨울이니께. 추울 때 이 아이를 멀리 내보내는 건 가엾으니께. 기왕 보낼 거면 날씨 좋을 때가 좋겠다 싶은겨. 데려가기로 했다네.”
운전사는 잠자코 끄덕이고는 병사처럼 자동차로 다가가 운전석 방석을 단정히 매만진다.
“할머니, 제일 앞쪽으로 타세요. 앞쪽이 덜 흔들려요. 한참 가야하잖아요.”
150리 북쪽, 기차가 있는 마을로 어머니가 딸을 팔러 가는 길이다. (1권 「고맙습니다」, 110~11쪽)
그 소리의 메아리처럼 다시 남편한테서 편지가 왔다. 지금껏 어느 때보다 더 낯설고 먼 지역이 발신처였다.
(너희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장지문을 여닫지도 마. 호흡도 하지 마. 너희 집의 시계도 소리를 내선 안 돼.)
“너희들, 너희들, 너희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영원히 가냘픈 소리조차 내지 않게 되었다. 즉, 엄마와 딸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녀의 남편도 베개를 나란히 한 채 죽어 있었다. (1권 「동반 자살」, 145~46쪽)
내가 이 이야기를 보고하는 것은 단지 자네를 짓궂게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자네의 사진을 함께 불단에 장식한 것도 자네와 처제의 사랑을 묻어버리라거나, 자네가 무덤까지 처제를 따라가라는 식으로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합장하고 분향하고 염불을 올리기도 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이니 난 우스꽝스럽더군. 검은 리본 아래 자네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까. 이처럼 인간이란 죽은 자에게 예배할 작정으로 산 자에게 예배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산 자를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그 그림자에 죽은 자가 있기도 한 거지. 자네가 기차 창문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자동차를 보았을 때 그것이 애인의 장례 행렬이기도 한 거지. (1권 「영구차」, 162~63쪽)
“당신은 저를 이등 기차를 타는 여자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 탓이 아니라 제가 그리 보이도록 평소에 애쓰고 있기 때문이죠. 어제는 무심코 삼등 대합실이라고 말씀드려, 그만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어요. 그리고 집에서 곰곰이 생각했죠. 저를 이등 기차에 타는 여자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제 싫어졌어요.”
도쿄 역에서 기다리다 지쳐 돌아오자, 그녀에게서 이런 편지가 와 있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비천하게 보임으로써 실은 그를 비웃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이 일로 다시 당분간 삼등 대합실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리라. 그러므로 삼등 대합실은 그 순례자와 승려의 모습을 빌려, 로맨틱한 인상을 그의 머리에 간직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는 그 순례자가 범죄자의 변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그녀가 삼등 기차를 타는 여자라고 믿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1권 「삼등 대합실」, 277쪽)
아내는 신기하기 짝이 없다. 단골을 찾아 나선다고 말했는데, 교토 시내를 변소 빌려줍니다, 변소 빌려줍니다, 하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건가 싶어 한참 궁리하다 지친 참에, 어느새 돈 통에 8푼을 던져 넣고 변소에 들어간 처녀가 있다. 그다음부턴 잇따라 들락날락 손님들이 좀처럼 끊이지 않기에 아내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며 지키고 섰는데, 머잖아 중간 휴식 팻말을 내걸고 변소 통을 퍼내는 소동―드디어 해 질 녘까지 변소 대여료 8,000푼, 그리고 다섯 짐을 퍼냈다.
“아무래도 남편은 문수보살의 환생인가? 참말로 그 사람이 말한 꿈같은 일이, 난생처음 정말 이루어졌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아내가 술을 사놓고 기다리는 그때, 애통하게도 업혀 들어온 것은 남편의 시신.
“하치베의 변소에서 복통 발작을 일으켰는지 죽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집을 나가자마자 3푼을 내고 하치베의 변소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남이 열려고 하면,
“에헴, 에헴……” 기침을 하고 그 기침에 목소리도 쉬고 낮이 긴 봄날, 일어설 수도 없게 되고 말았나. (2권 「변소 성불」, 49쪽)
“오늘 밤 애송이들이 그 끈을 잡아당기러 갈지도 모르는데……” 하고 분장실에서 아파트로 전화를 걸자 남편은 졸린 목소리로,
“그래? 그렇담 끈을 끌어 올려놓지 뭐.”
“아니에요,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란코는 미소 지었다.
“껄렁껄렁한 녀석들이긴 해도 무대 위의 나한테 호응을 해주기도 하니까. 내 소중한 홍보 담당자예요. 아주 세련되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뭐라도 좋으니 먹을거리를, 단팥빵 같은 걸 끈 위에 매달아줘요. 어차피 아침부터 밥 구경이라곤 통 못 해봤을 녀석들이니까 엄청 좋아하겠죠. 란코는 멋지다고, 인기를 얻을 걸요.”
“으음.” 하품 뒤섞인 대답을 하긴 했어도 가난한 시인인 그에게 빵을 살 만한 돈이 없었다. 방 안을 빙 둘러보니 란코가 받아 온 화환뿐이었다.
그런데 빵보다 꽃을 더 반기는 기풍이 불량소년들에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런가. (2권 「매여 있는 남편」, 110~11쪽)
“일반적으로 데스마스크라는 건, 그게 누구 것인지 모르고 보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지요. 예컨대 베토벤처럼 우람한 얼굴의 데스마스크도 물끄러미 보노라면 여자의 얼굴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여자다운 여자는 없었던 터라 데스마스크도 참으로 여자다우려니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이처럼 죽음을 이길 순 없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성 구분도 끝나는 거지요.”
“그녀의 일생은 여자라는 데서 오는 기쁨의 비극이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더할 나위 없이 여자였어요. 그 비극에서 그녀가 이제야 완전히 벗어난 거라면” 하고 그는 악몽이 사라진 후련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며,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아도 좋겠군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이 데스마스크 앞에서.” (2권 「데스마스크」, 150~51쪽)
손바닥 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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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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