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

장승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1년 3월 22일 | ISBN 9788932038285

사양 변형판 128x205 · 92쪽 | 가격 11,000원

책소개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텅 빈 얼굴로 속삭이는 고독의 시

생의 근원적 아픔을 명징하게 응시하는 시선으로 주목받아온 장승리의 두번째 시집 『무표정』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 열여덟번째 책으로 복간되었다. 2012년 문예중앙시선으로 처음 출간되어 “정확한 칭찬이라는 정확한 사랑을”(문학평론가 신형철) 선사하고 싶다는 평을 받으며 문단과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된 시집이기도 하다.
“아프지만 간절하고 쓸쓸하지만 다정한”(시인 권혁웅) 시어들로 씌어진 『무표정』은 ‘너’라는 인칭대명사로 지칭되는 누군가를 향한 발화로 가득하다. 그런데 시인의 표정이 무(無)인 이유는 그 어떤 언어로도 좁힐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너와의 거리감 탓이다. 그 간극에서 비롯된 쓸쓸함과 고통으로 인해 “아무리 크게 웃어도 반은 우는 얼굴”(「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불가능한 만남을 경유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너라는 꿈을 꾼다. 닿을 듯 좀처럼 닿지 않는 환영적 대상을 끊임없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사랑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새로운 장정으로 돌아온 『무표정』을 읽는 일은 여전히 유효한 장승리 시의 애틋한 감성과 미학적 깊이를 다시금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베일과 베일 안쪽 풍경이
분리되지 않는 곳에서
신기루에 깃발을 꽂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지 마세요
―「양산」 부분


네가 없는 자리에서 감지되는 너의 한기

『무표정』에서 너는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정황은 “닿을 수 없는 봄의 정원”(「한번, 한 번」), “꽃을 건네려는 순간 계단이 사라지네”(「기별」), “내 몸에서 네 부재로”(「우리 멀리」) 같은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너와의 괴리는 나로 하여금 실존적 추위를 느끼도록 만든다.

너는 왜 모르는가 내가 너의 가장 차가운 피부라는 걸 내가 막 눈송이 하나가 되어 떨고 있다는 걸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들 수 없는 우리는 덩그러니 마주 보며 서 있는 골문 같다
―「직사각형 위에 정사각형」 부분

나는 너와 “마주 보며 서 있는 골문”처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눈송이 하나가 되어 떨고 있다”. 그 사실을 너는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모를 것만 같다. 여기서 독자들은 “‘너’가 환기되는 시간의 온도가 간극의 바로미터”(문학평론가 조강석)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너를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이의 거리감을 확인하는 일이고, 그것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가장 차가운 피부”로 얼어붙는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모순된 이미지 속에서 가능해지는 만남

그렇다면 닿을 수 없는 너로 인한 추위를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시인은 서로 다른 화성을 정밀하게 교집하여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내는 대위법을 활용한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이미지들을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불가능했던 너와의 접촉을 실현하고자 한다.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귀향길
왼쪽에는 아카시아뿐인 산
오른쪽에는 길게 늘어선 야자수
포개질 수 없는 풍경 속
포개지는 길 위로는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난다」 부분

너에게 다가가는 길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귀향길”처럼 모순적인 상태로만 성립 가능하다. 그것은 길을 에워싼 풍경이 아카시아와 야자수가 동시에 늘어선 비현실적 이미지라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이렇듯 “포개질 수 없는 풍경 속”에서 가까스로 “포개지는 길 위로” 나아갈 때에만 나는 너라는 꿈에 가닿을 수 있다. 시인은 그것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꿈이 물이 되고 물이 꿈이 되”(「밸런스」)어 아침 햇살에 증발해버릴지라도 그 여정을 반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무표정』은 매번 새롭게 시도되는 장승리 시의 순전한 사랑의 고난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시인이 고독의 언어로 빚어낸 미적 충만함은 오늘날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뭉근한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 시집 속으로

너는 몇번째 너니 눈을 깜박이는 사이 방문이 저 혼자 삐거덕거리고 네 옷장 속에 내 눈물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다 눈물로 마지막 눈동자를 만들 순 없을까 나는 너를 볼 수 있지만 나는 너를 엿볼 수 없다
―「(1974〜 )」 부분

손을 놓았다
가장 잘한 일과
가장 후회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체온」 부분

누르는 힘만큼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blue, blue, blue
가라앉지 않는 마지막 인사를 반복하며
별과 별이 멀어진다
―「우리 멀리」 부분

나는 질문을 채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넌 정답을 말하는구나
―「주이상스의 요람」 부분


■ 시인의 말

전속력으로 당신이 서 있다.

목차

시인의 말

목걸이/말/(1974~ )/흙비 내리는 일요일/사월/이상한 얼굴/무표정/다른 시간/송곳니/강물/울프의 지팡이/방향 없는 진지함/무생물의 손/콤플렉스 산책/밸런스/방랑자/직사각형 위에 정사각형/상행선/밀실 정원/모르고 하는 슬픈 일/깨끗한 침대/게임 오버/러닝 타임/푸가의 기법을 들으며/두번째 창문/명사의 과거형/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기별/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난다/국어사전/체온/보름/눈, 동냥/한번, 한 번/우리 멀리/유리 우리/나는 악몽을 글로 옮겨 적지만 당신은 악몽을 만들잖소/나머지 결혼식/외출복/여기/저기/노라의 집/나뭇가지 끝/세금/주이상스의 요람/까마귀 떼가 익사했다/바짝바짝 작은 별/양산

해설 | 실존과 이미지의 푸가·조강석
기획의 말

작가 소개

장승리 지음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2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습관성 겨울』 『무표정』 『반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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