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2019년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최인훈,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1차분으로, 이어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의 중단편선이 2020년 2차분으로 출간되었으며, 올해는 김원일 중단편선을 선보인다.
“여보, 날 거기로 데려가주이소. 제발 날 거기로 데려가주이소.”
김원일 중단편선 『도요새에 관한 명상』
“분단 시대 한국 문학의 드라마틱한 별자리”(우찬제)를 새기며, 분단과 전쟁에서 오는 체험을 소설로 그려온 김원일의 중단편선 『도요새에 관한 명상』이 문지작가선 여덟번째로 출간되었다. 김원일은 한국전쟁 중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장남으로 대구에서 성장한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을』 『불의 제전』 『겨울골짜기』 등의 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그의 대표작 『마당 깊은 집』은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에 대한 직간접적 체험을 제공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한국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중단편선에는 「어둠의 혼」(1973),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 「미망」(1981), 「깨끗한 몸」(1987), 「비단길」(2014) 등 작품 활동 초기부터 최근까지 김원일의 대표 작품이라 할 만한 소설 8편을 수록했다.
수록 작품을 선별하고 책의 해제를 쓴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김원일은 오로지 분단 시대 한국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특징적인 소설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 작가”라고 말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한국전쟁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분단의 경험이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모양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등에 관한 집요한 그의 문제의식은 성인의 몸으로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한 선우휘, 오상원 등의 작가와는 다른 결을 만드며 분단문학 2세대로서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중단편선의 표제작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분단문학이란 김원일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시에 현재 중요한 사회 현안로 떠오른 생태 문제와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2021년에도 울림을 준다. 소설은 낙동강 하구 도요새 도래지를 배경으로 한 생태소설로, 북에 가족과 약혼녀를 남겨둔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경제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의 파괴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유독 물질의 비밀을 파헤치며 희귀종 보호를 위한 환경운동을 지속하는 형 ‘병국’과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돈벌이 삼아 새를 포획하는 일을 쫓아다니는 동생 ‘병식’의 대립은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 아래에서 무엇이 희생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실의 재현으로 등장하며 지금까지도 유효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외에도 「어둠의 혼」 「미망」 「깨끗한 몸」 등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아득바득 생계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와 장자로서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아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김원일표 가족소설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원일 소설 속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그 강인한 표상이 인상적으로 그려지면서, 장자인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동력이자 주요한 기호로서 김원일 소설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키워드로 작용한다.
가장 보편적이면서 또한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개인사와 가족사, 민족사와 시대사를 가로지르며, 분단 한국과 한국인의 운명”을 그려낸, “20세기 한국 분단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우찬제) 김원일의 대표 작품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슴 아픈 우리네 이야기를 만나보자.
■ 본문에서
나는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아버지 얼굴을 본다. 아버지 얼굴은 피칠갑을 한 채 표정이 찌그러져 있다. 눈을 부릅떴다. 턱은 부었고, 입은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버지가 저렇게 변해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만 같다. 낡은 검정색 국민복 단추가 풀어진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 가슴은 내가 어릴 적, 그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던 가슴이다. 이제 아버지 가슴은 그 두려운 보라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 내던져졌다.
「어둠의 혼」(p. 36)
전쟁은 모든 걸 망쳐. 전쟁을 통해 통일을 도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구적인 분단이 오늘을 살기에는 편해.” 내 말을 형이 반박했다. “너희 세대는 통일의 중요성을 몰라.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건 잘못된 교육 탓이야.” 형 말에 아버지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모든 게 오늘의 교육 탓이라고 했다. 이 물량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젊은 애들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게 했다며, 교육계에 몸담았던 티를 냈다. “통일을 외치는 아버지나 형보다 저희들은 통일에 무관심한 세대죠.”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은 정직이 중요한데 네 생각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말에 잘못은 없었다. 아버지는 정직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도요새에 관한 명상」(p. 56)
연 장사가 괜찮은 장사거리가 될 리 없었다. 다음 일요일에 순희와 내가 스무 개 연을 들고 저수지 공터로 나갔지만 판 연은 겨우 네 개였다. 미끼로 지렁이나 떡밥을 파는 장사보다 못했고, 낚시꾼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연 팔이가 왠지 부끄러웠다. 그때도 아버지는 집에 머문 지 두 달을 못 채워, 북으로부터 도요새, 들오리, 물떼새가 몰려들어 주남저수지가 새 떼 울음으로 분답시끌해질 무렵, 철새처럼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해도 저문 세모가 임박해서야 예의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또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저건 증말 무신 늠으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며 아버지를 원망했으나, 아버지가 연을 만드는 일을 방해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돈 한 푼 벌어들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늘 그 정도의 잔소리로 타박을 그쳤다.
「연」(p. 133)
말다툼이라면 서로 삿대질하며 맞대거리해야 마땅하나 두 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 쪽에서 먼저 발작적으로 할머니의 마땅치 못한 행동거지를 두고 험구했고, 그러면 할머니는 조개가 아가리를 다물듯 침묵으로 며느리의 그 따가운 수모를 묵묵히 견뎌냈으니, 다툼은 일방적이라 말해야 옳았다. 제 분에 못 이긴 어머니가 새삼스레 옛 모화 시절의 케케묵은 과거까지 꺼내어 짧게는 10여 분, 길게는 30여 분을 할머니와 아버지까지 싸잡아 닦달을 놓다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 때까지, 할머니는 자리 뜨지 않고 돌아앉아 그 말을 죄 새겨들으며 담배질로 응어리진 한을 눌러 삭였다.
「미망」(p. 152)
“강정댁이 지 새끼 몸 씻기는 거 보모 사람을 쥑이드키 하는 기라. 털 뽑은 달구 새끼가 따로 읎구로 얼매나 쌔기 씻기는지 아아 새끼를 빨갛게 맹글어놓는다 카이” 하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의 자식 몸 씻기기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고문이었다.
해 질 무렵이 되어 어머니가 진영을 떠날 때까지 내가 어머니로부터 당해내야 할 두 가지 일로 나는 이래저래 풀이 죽어 그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마 칵 죽어뿠으모, 할 정도로 살기가 싫어져 멍청하게 앉아 있자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꼴로 오줌까지 마려웠다. 방 안에는 요강이 없었고 벗고 앉은 몸이라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무슨 재미있는 궁리를 생각해내야 할 텐데 떠오르는 감도 없었다. 한참을 무료하게 앉아 있다 겨우 짜내게 된 생각이, 바로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내가 곧 끌려가게 될 목욕탕이었다.
「깨끗한 몸」(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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