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를 펴내며
발화가 발화하는 곳
좀 느닷없지만, ‘민주주의는 합의가 아니라 계쟁을 먹고 자란다’라는 랑시에르식 명제 옆에, ‘오래 살아남는 것은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형식이다’라는 모레티식 명제를 나란히 놓아보자. 간단히 말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명제 사이에 어떤 매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 의도이다.
노사와 양당과 좌우와 남녀가,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합의’하는 이상적인 공론장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공론장은 발화 (불)가능성의 장이기도 해서, 그 안에 ‘발화 자본’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 이른바 ‘몫이 없는 자들’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서 기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성이 모두 발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쟁은 따라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말로서 정립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물론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이토 준이치의 어법에 따라 ‘발화 자본’을 ‘담론 자원’이란 말로 바꿔보자. 그에 따르면 “‘담론 자원’은 공공성에의 실질적인 접근을 근본적으로 좌우한다. 그 이유는 공공성에서 의사소통이 바로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담론 자원’을 가진 자들이 ‘헤게모니’를 쥔다”(『민주적 공공성』, 윤대석 외 옮김, 이음, 2009, p. 33). 물론 이때 ‘담론 자원’의 활용 여부는 말할 것도 없이 공론장의 규칙을 지배하는 언어/문화적 코드의 습득 여부와 관련된다. 가령 적격한 어휘나 적당한 어법 등에 따라 코드화되지 못한 소리는 그저 소음일 뿐 말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발화가 항상 어려운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발화의 내용이 구태의연한 담론장의 규칙 속에서 발화되는 사례들(가령 박노해의 ‘서정시’)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도해왔던가!
새로운 발화 자본의 유입, 그리고 새로운 발화의 형식이 기존의 공론장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몫을 요구할 때, 그 균열의 지점이 바로 계쟁이 발화하는 장소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보이던 공론장이 요동을 치는 시기일수록,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발화의 내용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식을 통해 발화되는가 하는 점이 실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 발화의 내용이 그 유의미성을 소진한 뒤에도, 그 발화의 형식은 공론장 내에 남아 일종의 ‘물려받은 형식’으로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마도 발화 형식들의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1970년대 지사적 지식인과 문인 들의 ‘대표/대신해서 발화하기’가 1980년대 무크지운동이나 집단창작, 수기, 르포 등의 발화 형식에 의해 어떻게 도전받았는지를 돌이켜보는 일은 오늘의 관점에서도 자못 흥미롭다. 기존 공론/문학장에 몫이 없던 자들로서의 민중이 직접 발화(요즘 유행하는 비평적 언어로는 ‘1인칭의 역습’)하기 시작했을 때, 발화의 형식은 요동쳤다. 1990년대의 내면적 발화, 문학주의적 발화, 진정성의 발화는 아마도 요동치던 1980년대 공론장의 안정화 혹은 진화 과정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고, 2000년대 후반 이후 문학과 정치, 문학과 젠더 담론의 폭발적 재등장은 공론장 내 계쟁의 재발화 과정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이것은 모레티식 파동 곡선인가?).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강남역 살인 사건, 성폭력 말하기 해시태그운동 등이 촉발한 새롭고도 다양한 글쓰기/발화 형식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들’에도 말이다.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바로 그 형식의 능력과 무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레티의 말마따나 발화자가 (부지불식간에) 고안한 어떤 형식은 발화자 혹은 발화 내용보다 힘이 세고 또 더 많은 소리를 말로 만든다.
물론 우리 시대의 공론장 내에서 다양한 발화 형식이 요동치는 이유가 비단 정치/사회적 변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루카치적인 의미에서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인터넷(특히 SNS) 환경이 각종의 발화 형식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발화가 매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매체가 발화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한다는 매체 이론가들의 주장을, 어떤 수정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다.
『하이픈』 초입에 언론학자인 남재일의 「한국 공론장의 분열과 틈새」를 배치한 것은 그런 이유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최근 한국 공론장의 상태를 “다양한 비윤리적 발화의 “수사학적 형식들”이 “정파적 담론을 생산하는 효율적 수단으로 동원된다. 언론장을 특징짓는 발화의 양식은 ‘적대의 언어’라 할 수 있다”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각 절을 달리해 ‘언론의 정파성’ ‘혐오 발화’ ‘발화 문법의 파괴’ 현상 등을 분석하면서 그가 정작 찾고자 하는 것은 공론장의 그와 같은 분열상 속에 여전히 잠재해 있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혐오와 정파주의가 실은 과녁을 잘못 택한 분노의 이면일 수도 있다는 그의 진단은 새겨들을 만하다.
박소정의 「#해시태그로_말하는_여성들」은 SNS를 통한 ‘간편한’ 발화가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만 한 위력이 있는지를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한다. 비단 한국의 경우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해시태그운동들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그 간편한 SNS상의 글쓰기가, “페미니즘 담론장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낮추고, 여성들 간의 정동적 공동체를 만들고, 여성의 목소리를 아카이빙하면서” “새로운 행위능력을 지닌 주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필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조금 더 쉽고 간편하게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상진의 「발화의 경계와 질서를 겨냥한 도발—게으른 도발의 예정된 실패」는 ‘도발적인 도발론’이다. 이 글이 ‘도발론’인 것은 최근 ‘도발’을 발화의 장기로 삼은 논객들의 수사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도발’을 일종의 학적 대상의 자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이 ‘도발적’인 것은 실명들까지 거론해가며 조단조단, 유머러스하면서도 반어적인 어법으로 도발자들을 도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한 글이 주는 읽기의 즐거움과, 도발이 주는 통쾌함을 두루 맛볼 수 있는 글이다.
이수명의 「시와 발화의 문제」는 문학, 특히 시에서 자아, 즉 1인칭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 파울 첼란의 ‘자아와 예술’이라는 대립쌍을 글의 골조로 삼아 두 계보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는 시사적 안목이 남다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후반부, 최근 시의 한 경향으로 ‘1인칭 발화 형태’의 주류화를 꼽고, 그 전망을 타진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 등의 기의 위에 성립한다. [……] 그런데 이것은 21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의 상황에 낯설고 어울리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도 극히 분화되어 있다. 리얼리즘이 원하는 (또는 의지할 수 있는) 모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경우 리얼리즘의 회로 안에서 어떤 집단이 대체 모형으로 간택될 필요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여성을 비롯해 소수자가 새로운 시대의 가상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후속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 중요한 지적으로 읽힌다.
김민조의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스탠드업 코미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에 관해」는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 작업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히 한 코미디언의 작업에 대한 작품론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데, 이른바 ‘발화의 당사자성’에 대한 첨예한 질문이 이 글의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코미디를 통해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고, 오직 펀치 라인을 위한 긴장 조성의 수단으로 전용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돌파하기 위해 개즈비가 수행했던 ‘코미디로 코미디 부수기’를 예로 들면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발화자와 청자 간 상호 윤리로서의 “취약성의 연대”이다.
이번 호 『하이픈』의 마지막 글은 조효원의 「궁지에서 궁진하기—학문과 탐구와 웃음에 대하여」이다. 기획의 맨 끝자리에 배치하게 된 것은 이 글의 성격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조효원의 글은 이번 기획 전체에 대한 추상도 높은 원거리 지원 사격에 가깝다. 그만큼 발본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처한 상태를 성찰하게 하는 글이다. 필자에 따를 때 우리 시대는 막스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 곧 ‘계산을 통한 지배’가 극한에까지 이른 시대다. 심지어 계산의 논리성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 아전인수와 견강부회의 시대이자 ‘탐구주의’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시대다. 아마도 저 수많은 악의적이고 몰상식한 발화들의 역사철학적 기원이 거기일 것이다. 그럴 때 필자가 여러 사상가를 우회해 제안하는바 대안적 윤리는 탐구주의자와 아이러니스트의 상호 방문이다. 그들의 상호 방문이 “프루스트적 웃음”을 낳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일말에 불과하지만, 사유하는 자는 그 일말을 포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번 호 〈지성〉에는 신호재의 「문학과 예술을 위한 현상학적 시론: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싣는다.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설」을 주 텍스트로 삼아 현상학 일반을 알기 쉽게 개관한 글이다. 이 글의 미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현상학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이기에 적당한 글이란 점이다. 그리고 다른 미덕은 이 글이 바로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현상학을 ‘주체와 대상 세계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히려는 학문’이라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주체와 세계의 접촉면을 최소화하려는 ‘뉴 노멀’의 시대를 예감케 하기 때문이다.
〈리뷰〉에는 김보경, 김지윤, 소유정, 임지훈, 최현식, 홍성희, 박서양, 백지은, 정홍수, 한영인 평론가의 소중한 원고들을 싣는다. 유독 독자들에게 소개할 만한 신간이 많이 나온 계절이었다. 제한된 지면 탓에 더 많은 신간을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문학과사회』의 창작란은 이번 호도 역시 풍성하다. 마종기, 함성호, 김미지, 정한아, 김이강, 안미옥, 오은경의 시들을, 그리고 최수철, 손보미, 조남주, 정소연의 단편소설과 구병모의 장편 연재 2회분을 싣는다.
독자들에게 제10회 문지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한다. 수상작은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이다. 자세한 심사 경위와 심사평은 본권을 참조해주시길 바란다. 분명 길고 추울 것 같은 겨울이 온다. 부디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가 독자들의 겨울나기에 작으나마 힘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동인 김형중
겨울호를 펴내며
시
마종기 흰나비의 증언 외 1편
함성호 나만 모르는 일 외 1편
김미지 기중기 생각—내부는 외력과 평행해 있다 외 1편
정한아 부엌엔 팥죽이 끓고 외 1편
김이강 바흐 이덴 외 1편
안미옥 파각 외 1편
오은경 더하기 외 1편
소설
최수철 모든 막간은 불안하다
손보미 해변의 피크닉
조남주 매화나무 아래
정소연 발견자들
구병모 상아의 문으로[장편 연재 2회]
리뷰
김보경 이인칭 나
—오은경, 『한 사람의 불확실』
미로의 책
—김유림, 『세 개 이상의 모형』
김지윤 사라진 시절과 부재의 자리에 남는 것
—김현, 『호시절』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소유정 직립–하기
—이다희, 『시 창작 스터디』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임지훈 바구니에 담긴 단어들로 만들어진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최현식 ‘잃어질 것’들을 위한 연가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홍성희 첫눈에게
—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서양 감정 수행의 건축학
—기준영, 『사치와 고요』
—백수린, 『여름의 빌라』
백지은 여자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
—김금희, 『복자에게』
—손보미, 『작은 동네』
정홍수 다가오는 것들, 그리고 ‘광장’이라는 신기루
—황정은, 『연년세세』
—김혜진, 『너라는 생활』
한영인 폐허의 반복, 이면의 낙관
—박민정, 『바비의 분위기』
—한정현, 『소녀 연예인 이보나』
지성
신호재 문학과 예술을 위한 현상학적 시론: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설」에 대한 해제
제10회 문지문학상 발표
임솔아 희고 둥근 부분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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