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두 가지의 무대가 있어.
그 하나는 당연히 형상들이 보여지는 무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무대이지.”
문학과지성사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의 다섯번째 책으로, 프랑스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가 ‘무대’라는 개념을 주제로 나눈 대화 10편을 묶은 책 『무대』가 출간되었다. 두 철학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재직하던 시절에 만나 평생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가 되었으며, 이후 40여 년에 걸쳐 『문학적 절대』 『문자라는 증서』 등 다수의 공저를 발표하고 수차례의 공동 강의를 개최하는 등 많은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주제는 바로 무대라는 연극 개념이다. 왜 연극일까? 낭시는 “오늘날 철학적 작업 속에서 무대에 관한 문제가 여러 주제들의 매듭 혹은 교차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낭시는 또한 연극이 “현전을 현시하는 특권적인 방식”이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배역과 배우, 텍스트와 공연, 말과 몸처럼 이중성을 지닌 연극의 특성과 관련된다. 더불어 이는 이데아와 현상, 현전과 재현, 진리와 현시, 존재와 현존재 등 철학적 개념쌍들을 연극과 함께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개념은 재현, 미메시스의 문제와 닿아 있다.
책에 실린 대화는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1992년 주고받은 다섯 개의 편지로 『신정신분석지』에 게재되었던 것이고, 두번째 대화는 12년 후인 2004년 열린 학술대회에서 앞의 서신에 덧붙이는 추신 형태로 기획된 다섯 꼭지의 대화이다. 낭시가 책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 대화의 목표는 “언제나 두 대화 상대자 사이에서 새롭게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었으며 이 책 말미에서도 못다 한 토론은 다음 기회에 이어가기로 기약했으나 2007년 라쿠-라바르트의 죽음으로 인해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두 철학자 장-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무대’를 테마로 주고받은 10편의 필담!
이 책에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대화’라는 고전적인 연극 형식에 기대어 질문과 답변, 동의와 수긍,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는 첨예한 논쟁을 펼친다. 두 철학자는 이전에도 적지 않은 공동 작업을 수행해왔지만 『무대』는 논쟁을 통해 이들 간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저작이다. 예컨대 연극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논의를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쟁점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6요소 중 하나로 꼽은 옵시스 개념이다. 낭시는 흔히 스펙타클이라 번역되는 ‘옵시스’를 문자 그대로 ‘무대에 놓기’라는 의미에서 무대화(미장센)로 명명한다. 하지만 라쿠-라바르트에게 옵시스는 단지 시각적인 요소, 스펙타클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러한 옵시스 혹은 무대의 문제는 곧 ‘형상’이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낭시는 최소한의 형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라쿠-라바르트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낭시에게 연극에서의 스펙타클은 용인되는 것이지만, 라쿠-라바르트에게는 결단코 불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철학자의 대화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의견 대립 혹은 ‘불화’(낭시의 표현)를 짚어보면서 이들이 설명하고 있는 개념들 각각의 복잡성을 인지해가는 일은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며 지적인 지평을 한층 넓혀줄 것이다.
무대란 무엇인가? 무대라는 공간에서는 무엇이 발생하는가?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불화의 지점을 읽다
라쿠-라바르트는 무대화라는 용어 대신 행위화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굳이 무대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라쿠-라바르트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한발 물러선 무대를 가정한다. 그는 눈앞에 있는 ‘재현’ 속에 비가시적인 것을 담으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재현을 거부하기에 그는 미메시스를 재현이 아닌 뜻으로 다시 정의하기를 원한다. 그에게 미메시스는 재현이 아닌 현시, 즉 드러남 그 자체이며 무대는 형상으로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드러남의 자리다. 그런데 이 드러남의 자리는 무엇을 현재화하는가? 그것은 “거기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는 곳”인 원초적인 간격으로서의 공간이다. 이는 원-무대이며 원-연극이다. 원-연극은 스펙타클, 재현의 저편에 있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연극이다. 원-연극을 무대화하는 방식은 물러섬으로, 이는 형상 없는 형상을 그리는 것이다. 형상을 제거하면 목소리만 남는다. 즉 라쿠-라바르트에게 기원은 언어이다.
낭시는 라쿠-라바르트의 방식을 “현시되지 않는 현시”라 부른다. 낭시가 보기에 라쿠-라바르트의 입장은 예술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일 뿐, 연극이라는 구체적인 장르 혹은 하나의 연극작품을 설명하지 못한다. 라쿠-라바르트가 텍스트를 발화하는 목소리를 강조할 때, 낭시는 그것을 발화하는 몸의 일부인 입에 주목한다. 입은 발화되는 텍스트를 형상화한다. 이때 입은 하나의 기표이다. 라쿠-라바르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원-연극을 향해 금욕적인 엄격함으로 모든 형상을 잘라내며 스스로 원-연극과의 간격을 줄이려 하는 의지적 행위를 연극이라 정의한다면, 낭시는 매번 잠시 진리와 접촉했던 몸을 다시 잘라내면서 진리가 머물렀던 흔적을 그려나가는 것을 연극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 무대와 극 텍스트, 예술 장르는 물론 재현, 현시, 현전 등에 관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사유를 압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추상적 개념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잇따르고 이들이 다루는 레퍼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라르메까지 방대하여, 짧은 분량임에도 읽기에 녹록지만은 않다. 하지만 옮긴이의 정연한 해설과 함께 읽다 보면, ‘대화’라는 연극의 형식으로 연극을 사유하는 두 철학자의 논지에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무대화’라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오늘날 사용하는 바의 의미에서는, 옵시스의 번역어가 될 수 없다는 거야. 자네가 인용하고 있는 『시학』 6장의 구절에서 옵시스는 분명 ‘스펙타클’ 이상의 것을, 다시 말해서 단지 본다는 사태, 혹은 보여지는 어떤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는 거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재현’을 뜻하는 것이지. 우리가 연극에서 보는 바로 그것 말일세. (18쪽)
연극이 오늘날 그저 하나의 ‘위기’라기보다는 총체적인 불안감 속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네. 연극은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에 완전히 장악되었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극은 볼거리와 소멸 사이에서 분할되어, 아니 차라리 찢겨져 있다고 할 수 있지. 자네가 말했듯이 “볼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볼 게 하나도 없는 것”으로 말이네. (39쪽)
예술은 실제적으로 이미 현시된 것 혹은 잠재적으로 현시 가능한 것을 현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야. 예술은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것 혹은 거기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것의 영역 밑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야 비로소 현시를 만들어내지.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형상의 필요성에 대한 자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네. (62쪽)
미메시스가 바로 ‘현시’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면 […] 그것은 여기에 무대라는 것이, 무대미술이라는 것이 혹은 원래 본래적인 ‘무대장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실존의 여러 방식의 발현체들 모두를 하나의 형태로 무대에서 드러내지는 못해. 반대로 무대는 분할되고, 여러 개의 무대들로 배분될 수도 있지. […] 그것들 속에서 말 그대로 ‘무대적인 것’을 특별히 보여주는 자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극장이네. (75쪽)
예전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텍스트를 혼자 독서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말해본다면, 당연히 나, 독자인 나는, 텍스트의 일부 혹은 텍스트의 순간으로서의 등장인물의 이름을 ‘행동하게’ 해야만 하지. 그렇지만 발성되는 대사들로 이루어진 텍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는 텍스트의 이 일부는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갖지. […]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지. 연출가든 배우든 그 누구의 개입이 있기 전에 텍스트는 이미 무대화되고 있다는 것. 텍스트는 이미 ‘행동하고 있다’는 것. (86~87쪽)
행위가 연극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때, 대화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유형학을 끌어들이지. 극 행위가 특이하게도 형상을 태동시키는 거야. 철학자들이 하나의 사유의 등장인물이 되고 배우가 되는 것은 철학에서는 당연한 일이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철학자 자신의 실존의 ‘시나리오’를 만들지. 철학자 자신의 뮈토스 말일세. 거기에 그의 에토스가 달려 있어. 단지 그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이 달려 있다는 말이네. (100~101쪽)
연극, 대화로서의 연극이 재현하는 것, 즉 그것이 현시하는 것은 바로 간격이야. 간격이 구축이며, 심지어 ‘공동성’의 척도라고도 말할 수 있네(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성’이라는 주제가 하이데거에게는 골칫거리였던 것이지. 하이데거의 공간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소위 ‘헤겔주의적’ 사유에 우리가 제기했던 것과 유사한 근심을 오늘날 작동시키고 있네). (106~107쪽)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예술들이 연극의 규범에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내 의도는 연극을 ‘예술의 본질’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네. 하이데거는, 그리고 그 뒤의 모든 ‘이상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통은 시를 예술의 본질로 삼으려 했지. […]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어. 연극이 모든 예술의 전제라고. 혹은 모든 예술은 ‘무대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네. 받아들이세. 사실 그 무엇도 정말 내 맘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네. (114~15쪽)
■ 차례
무대
대화에 대한 대화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