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원하는 한국 현대소설 시리즈 <문지클래식>.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도서 중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 작품’들로 구성된 <문지클래식>은 ‘고전classic’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동시에 현세대가 읽고도 그 깊이와 모던함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만한 시리즈이다. 한국전쟁 이후 사회의 모순과 폭력을 글로써 치열하게 살아내며, 한편으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인류사적 과제를 놀라운 감각으로 그려낸 한국 문학사의 문제작들이 한데 모였다. 의미적 측면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폭넓게 사랑받으며 지금까지 중쇄를 거듭해온 문학과지성사의 수작들이다. 그간 우리 문학 토양을 단단하고 풍요롭게 다져온 작품들로 앞으로 더욱 충만해질 <문지클래식>은, 각 작품들의 현대적 가치를 새롭게 새기고 젊은 독자들과 시간의 벽을 넘어 소통해낼 준비를 마쳤다. 우리 사회 가장 깊은 곳에 마르지 않는 언어의 샘을 마련할 <문지클래식>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낭만과 현실 사이의 씁쓸함이여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도서 중 한 권이었던 홍성원의 소설집 『주말여행』이 <문지클래식>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주말여행』은 홍성원의 초기 중⋅단편소설 중 총 일곱 편의 대표 작품을 추려 묶은 책이다. 이 책은 1970년대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의 자유와 낭만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구습과 폭력적 사회상을 교차시키며 70년대 청년들의 삶과 도시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여행이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소설적 상황을 화자에게 부여함으로써 청년들이 쉽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그려냄과 동시에, 이를테면 “우리들의 장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비극”이라고 말하며 짧은 청춘의 시기를 지난 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상 가능한 삶에 대한 예감을 세심하게 끌어낸다. 물론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수십 년 전 젊은이들의 삶에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잔 다르크”(「늪」)가 되고 싶었던 소녀가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의 ‘부인’이 되기를 희망하거나 이후엔 그마저도 꿈꿀 수 없게 되어버리는 데에서 오는 씁쓸한 감정은 낭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라는 시대를 불문한 문제로 이어지면서 독자를 가장 보편적인 삶의 문제로 이끌어간다.
작가 홍성원은 『남과 북』 『먼동』 『그러나』 등의 장편소설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장면들(한국전쟁, 식민지 시대 등)을 다룬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을 이어받은 자녀 ‘홍 자매(홍진아, 홍자람)’는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등으로 대중에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지난 2020년 5월 1일은 작가 타계 12주기이다.
본문 발췌
“네.”
“댁은 그럴 용기가 있으십니까?”
“그런 걸 댁은 용기라고 부르나요?”
그렇다. 그런 건 용기가 아니다. 용기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 속에서만 보여주는 물건이다. 나는 요즈막 우리 주위에서 용기라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보여줄 기회가 없는 것이다.
_「늪」
그는 대개의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절대로 공중들 앞에서는 앞으로 나서지 않기로 하고 있다. 그는 이 아마존족의 후예 같은 억척스런 차장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 그러나 그는 자기 대신 다른 사람, 즉 약간 조급하고 화를 잘 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 대신 나이는 어리지만 베어링처럼 닳고 닳아서 걸핏하면 싸움을 걸려고 하는 이 차장에게 ‘차를 좀 정비해서 다녀라, 이게 굴뚝이지 어디 버스냐’ 하고 호통을 쳐주기를 바란다.
_「즐거운 지옥」
우리 나이 또래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대개 한정된 종류의 퍽 초라한 것들뿐이다. 소주 석 되를 단숨에 마시고, 다방 레지 미스 고와 함께 잤으며, 성당 앞에서 오줌을 쌌고, 해병대 두 명을 직사하게 패주었다는 자랑 정도는 만일 김이 아니라면 내가 먼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다 아는 자랑들을 우리는 피차 감동하여 듣는 척하기로 약속하고 있다. 이런 자랑을 반박할 만큼 우리 모두에게는 별다른 자랑이 없기 때문이다.
_「무전여행」
늪
무전여행
프로방스의 이발사
사공과 뱀
즐거운 지옥
괴질
주말여행
해설/내 생각대로 살 수 있을까?_우찬제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