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신작 장편소설 출간!
나만 몰랐던 나의 또 다른 이야기
손보미의 신작 장편소설 『작은 동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이후 3년 만이다. 작가는 “결정적인 대목을 말하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덕에 더욱 강렬”(권희철)한 스토리 구성 능력과 “한국 소설의 미학적 지형을 흔드는 신선함”(이광호)을 갖춘 개성적인 감각으로 다수의 문학상(젊은작가상 대상, 한국일보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 꾸준한 실력을 보여왔다.
이번 소설은 교보생명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통해 2018년 11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을 묶은 것이다. 1인칭 여성 화자를 내세워 ‘나’의 현재와 내가 살았던 ‘작은 동네’에서의 과거 이야기를 오가는 방식으로 서술되었으며,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기억에서마저 지워진 나와 엄마의 서사를 복구하는 추리극이다. 작가는 근래 「밤이 지나면」 「크리스마스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단편소설을 통해 ‘열 살 여자아이’로 그려지는 인물에 작가적 관심을 보여왔는데 이번 장편소설 역시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으로서 손보미의 근래 작품을 따라 읽어온 독자에게는 작가의 확장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여백으로 완성되는 삶의 진실
부정기적으로 시간 강사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겐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는 남편과 지난해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있다. 엄마가 죽기 전 나에게 자신의 삶을 끝도 없이 복기했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어머니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사람이 죽기 전에는 누구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복기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잃은 누군가에게 “당신 부모님도 돌아가실 때 그토록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으시던가요? 그게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던가요?”라고 질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남편이 스크랩해둔 그 수많은 글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한동안 어머니가 내게 남긴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닷속에 던져진 사람처럼 말이다. (pp. 12~13)
엄마가 남긴 말들이 내 삶을 온통 뒤흔들고, 나는 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마와 나의 과거를 반복적으로 상기한다. 사건의 또 다른 면모는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에서 드러난다는 진실을 떠올려본다면 엄마가 말하지 않은 그 공백에 대한 힌트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첫번째 힌트는 역시 엄마가 남긴 말들이다. 비단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뿐이 아니다. 살아생전 나에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첫 단서가 될 것이다. 두번째는 이 소설이 반복해서 돌아가는 장소, 옛날 그 ‘작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일 것이다. 내가 가족과 열한 살까지 살았던 그 동네에 사건의 단초가 될 기억들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는 남편의 스크랩북이다. 남편의 수많은 스크랩북을 ‘나’는 종종 펼쳐 보고는 하는데, 어쩌면 이 안에 엄마와 나의 기억 속에는 없는 또 다른 정보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보미의 책을 읽는 재미는 다양한 인물의 사연들을 겹겹으로 촘촘하게 쌓아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되 작가 스스로는 판관의 위치에서 벗어난 채 독자들을 사건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작가가 노련하게 배치해놓은 힌트들과 능숙하게 치고 빠지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손보미표 추리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소설에 던져진 얘기의 꼬리를 추적해가며 어떤 힌트를 길잡이 삼아 엄마가 남겨둔 말의 공백을 채울지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이는 사라져버렸거든요.”
사라진 사람들, 그들이 말해주는 것
“그 여자아이가 한물간 여자 가수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왜 그런 건지는 몰라요. 아마도 제가 요즘 들어 예전 여성 디바들의 무대 영상을 자주 봤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한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그 여자들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들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_<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인터뷰 중에서
이 소설에는 여자 연예인 두 명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남편의 회사에 소속된 배우 ‘윤이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 작은 동네에 숨어 지내다시피 했던 여가수이다. 먼저 윤이소. 혼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던 윤이소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 그 여가수는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물로 어린아이였던 나와그 작은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는 세간의 시선을 벗어나 지내는 중이었는데 뜻밖의 계기로 나의 가족은 그의 삶을 목격한다. 작가는 사건 하나를 던져두고 그의 이면이 될 수도 있는 다른 사건을 은근하게 섞어놓음으로써 진짜 사실과 흐릿하게 남은 기억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독자에게 고민거리를 던진다. 사라진 윤이소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과거 내가 보았던 여가수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 불행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현재 사라진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오가며 전개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마치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삶과 내가 아직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이야기에 대응하여 전개되면서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엮어내어 읽고 또 읽을수록 숨겨진 이야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손보미 소설의 장점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손보미가 만들어놓은 다수의 갈림길 앞에서 어떤 선택지를 고를지, 그 길이 다른 길보다 나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밟아가는 조심스럽지만 적극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나는 가끔 이런 식으로 모든 상황을 농담처럼 흘려버리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과 쓸데없는 갈등을 겪지 마. 그냥 웃어버려. 모난 돌이 정 맞는 거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으며 자랐다. 농담은 내가 생각해낸 최고의 방어였다. 그리고 때때로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득을 주기도 했다. (p. 10)
어쩌면 누군가는 어머니가 일부러 과장해서 밝은 면만 보려고 노력하는 유의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게—보려고 노력한다는 바로 그것—핵심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중이었고, 어떤 종류의 관점을 적용시킬 건지는 순전히 어머니가 결정할 몫이었다. (p. 31)
포장지 안쪽을 내 스스로 갈라서 파헤쳐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포장지째로 던져 주는 것. 그것은 어른들의 비겁한 행위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증오하지 않았고, 기가 죽지도 않았다. 그런 식의 비겁한 행위 속에는 슬프지만 우스꽝스러운 일면이 있었고, 나는 어머니가 그런 방식을 택한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p. 74)
송년회에 다녀온 이후로 무언가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시절로 빠져들어갔다. 그건 절대로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불시에 떠오른 그 사소한 모든 것들이 기억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뇌관을 잘못 건드린 서투른 병사처럼 나는 우왕좌왕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 보면 나는, 한밤중에 남편을 깨워서 아버지를 만나야겠다고 말한 후, 나와 남편이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곤 했다. (p. 84)
■ 차례
1. 반작용
2. 지상과제
3. 무신론자
4. 교환
5. 또 다른 여자
6. 멋진 깔개
7. 우린 실패한 거야
8.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이 책 무언가 기분좋고 흡인력있는 책이네요 ㅎㅎㅎㅎㅎㅎㅎ 손보미 소설가님 존경하고 사랑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