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름휴가

허희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6월 25일 | ISBN 9788932036649

사양 변형판 126x189 · 208쪽 | 가격 13,000원

수상/추천: 문학나눔사업 우수문학도서

책소개

“오로지 오해들로만 설명되고 싶다”

이해할 수도 장악할 수도 없는 세계에서
미세한 파편들로 빚어내는 미묘한 알리바이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허희정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2018, 19년 문지문학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Stained」 「실패한 여름휴가」를 포함해, ‘“오로지 오해들로만 설명”되는 텅 빈 감정과 감각의 세계’(이광호)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주는 소설 7편이 수록돼 있다.
허희정은 『실패한 여름휴가』에서 “온전히 도저히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작가의 말」), 곧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적 인과로 설명하기 힘든 불안의 감각을 형식과 이미지로 구체화해낸다. 문장을 무대 장치처럼 쌓아올렸다가 부서뜨리고,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기를 거듭하면서 흔적과 파편을 층층이 겹쳐 만든 그의 소설은 섣부른 정의나 명명을 비껴나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언어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쓰기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또렷이 자각하면서도 “자의식과 우울에 빠지지 않고 소설의 막다른 벽을 넘어보려는 경쾌한 몸짓”(신인문학상 심사평)을 통해 장르 구분 없는 다채로운 시도를 첫 소설집에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불안은 간단히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아무리 도망치고 무시하려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영속적인 긴장이다. 허희정의 소설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불안을 모른 척하거나 손쉽게 해소하지 않고 침착하고 끈질기게 천착하는 힘이 있다. 인아영(문학평론가)

허희정의 소설은 아직까지 또는 언제까지고 규정되거나 규명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자기 세계를 담아내기에는 언어가 미치는 영역이 비좁다는 듯, 쓸쓸했다가 모호했다가 재기 넘쳤다가 모험도 하고 실험도 하고 혼자 다 하면서 자신의 문장이 착륙할 최선의 자리를 탐색한다. 구병모(소설가)


불안으로 만든 모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것의 정체를 더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표지의 사물들은 언뜻 균형적으로 배치돼 있지만 묘하게 이질적이다. 바로 다음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실패한 여름휴가』에서 허희정은 불안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먼저 그는 단언과 확언 틈으로 빠져나가는 의미에 주목한다. 마침표 대신 쉼표로 문장을 이어가며 망설임을 드러내고, 소거법과 가정법을 교차하면서 멈칫거린다. 허희정 작품 속 인물들은 “한없이 불안해”질 때조차 “이 불안 역시 나에게 할당된 역할의 일부일 뿐”이라며 거리를 둔다. “스스로가 아닌 무엇을 연기하고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수많은 감정”을 “가장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그 어떤 감정의 소유자인 적도 없었”고 “내가 온전히 나였던 적조차 없었”다며 판단을 의심한다(「실패한 여름휴가」). 끊임없는 진자운동의 결과일까. 감정은, 특히 불안은 마음속에 깊게 파고드는 대신 외부로 빠져나와 구체화된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의 하늘에 나타난 매끈하고 거대한 투명 삼각형은 문득 땅으로 내리꽂히며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게 한다(「Stained」). 어서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집요하게 독촉하는 종이 남자의 목소리와 날카롭게 칼질된 백지의 단면은 종이에 베인 듯한 고통을 즉시 연상시킨다(「페이퍼 컷」). 이처럼 허희정이 수집해 작품 속에 심어놓은 “두께도 질량도 부피도” 없는 불안의 이미지는 쌓아올려졌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문장들 곁에서 감각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장악한다. SF, 판타지, 스릴러, 연애소설, 추리소설, 메타소설 등 여러 장르가 조합된 『실패한 여름휴가』 속 소설들은 개별적 특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불안이라는 장치를 통해 연결된다.


흔적으로 그린 몽타주

“기억을 믿지 않는다,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록을 파기할 것이다, 그것을 손상시킬 것이다”

허희정의 소설은 누군가가 떠나가고 남은 공백에서 시작하곤 한다. 작품 속 인물은 곁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곧 사라질 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 우울증을 앓다가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면서(「파운드케이크」), 대재난 이후 지구 복귀를 위해 파견됐던 프로젝트에서 실종된 탐사 파트너를 떠올리면서(「우중비행」),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뒤 함께 알던 또 다른 친구에게 뒤늦은 안부를 묻는 편지를 쓰면서(「망가진 겨울여행」), 록밴드 해외 공연 티켓을 양도해준 팬카페 회원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오랜 불안을 되새기면서(「인컴플리트 피치」) 이야기는 시작되고, 타인의 흔적을 침착하고 집요하게 되짚어나간다. 그러나 기억은 기록이 되는 과정에서 사실과 사실 아님이 뒤섞인 채 불완전한 단서가 되어버린다. ‘까맣게 덧칠된 필름, 잘려 나간 페이지, 이미 섞여버린 반죽’(「실패한 여름휴가」)처럼, 층층이 쌓인 흔적으로 그려진 그 ‘누군가’의 모습은(혹은 행방이나 떠난 이유는) 희미할 수밖에 없다. 결국 빈 자리는 채울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허희정은 소설 속의 사람이든 소설 밖의 사람이든 “온전히 도저히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쓰고, 쌓고, 허물고, 다시 쓴다(작가의 말). 우리는 허희정의 미완성을 향한 이러한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시도들을 지켜보고 예민한 감각적 경험을 함께하면서 은유로 존재하던 감정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함부로 짐작하고 멋대로 확신”(「망가진 겨울여행」)하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허희정의 다음 소설은 또다시 보기 좋게 예측을 비껴나갈 것이다. 무섭도록 집요하고 진지한 동시에 놀라울 만큼 산뜻한, 허희정의 소설이 만들어낸 도망칠 수 없는 미로 혹은 미궁을 겪어보길 바란다.


본문에서

지구에 대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로 대재난 이전의 세계를 다루고 있었다. 세대와 세기를 거듭하면서 지구와 지구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분해되고 다시 조립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 속에서 지구는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만인의 고향으로 둔갑했고, 지구 탈주의 과정에서 내려진 비겁한 결정들과 그 결정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그로 인해 가장 먼저 버려진 이들의 이름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우중비행」, p. 44)

내가 흉내 내고 억지로 손에 넣으려 들고 피부 위에 걸치려 드는, 접착력이 떨어져가는 접착제로 덕지덕지 가져다 붙이려 하는 그 수많은 감정, 나는 언제나 내가 가진 것 이상의 감정을 가장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정작 나는 그 어떤 감정의 소유자인 적도 없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실패한 여름휴가」, p. 84)

잠을 자고 싶었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할 일인 것처럼, 죄책감도 의무감도 없이, 악몽도 길몽도 없이 본분처럼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Stained」, p. 91)

그대로 서로 소식이 끊겼으면 좋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듣고 싶지 않은 소식들을 더 듣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자꾸 가능성을 타진해보지만 과거는 이미 선택된 미래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아마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망가진 겨울여행」, p. )


작가의 말

언젠가부터, 온전히 도저히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설 밖의 사람들과 소설 속의 사람들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차이가 있다면, 소설 밖의 사람에게 칼을 들이밀었다가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범죄자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가 아니더라도, 소설 밖의 누군가를 다 쪼개어 분해해버린다고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종이를 전부 다 찢어버려도, 지면을 이루는 섬유의 방향과 모양을 찬찬히 세심하게 분석해보아도, 찢고 자르고 조각내는 대신 이 종이 위에 얹힌 잉크 방울을 활자의 모양과 그들이 남기는 흔적을 활자를 이루는 망점의 간격을 하나하나 살펴보아도 소설 속에 사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소설 안이든 밖이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소설을 쓸 때마다, 도무지 구조를 파악할 수 없는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으면 이 미로에서 더 빨리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끝도 모르게 솟은 벽의 무늬가 그 벽 위를 흐르는 차가운 공기가 재미있어서 신선해서 마음을 끌어서 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해서 그냥 그대로 선 자리에서 빙빙 맴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다면 그건 분명히 사랑하는 당신들 덕분일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탈출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2020년 여름
허희정


추천의 말

비슷한 줄로만 알았던 미로와 미궁에는 실은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전자는 한번 들어간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데(출구를 못 찾을 수도 있다! ) 후자는 설계된 모든 길을 따라 걷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언젠가는 그 중심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곱 겹의 모퉁이를 지닌 미궁의 입구에 들어서서 정치한 언어와 의식의 벽을 더듬어 나아가는 동안, 첫 소설집으로 이후 작가가 갈 곳의 좌표를 소략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인식을 바꿨다. 허희정의 소설은 아직까지 또는 언제까지고 규정되거나 규명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자기 세계를 담아내기에는 언어가 미치는 영역이 비좁다는 듯, 쓸쓸했다가 모호했다가 재기 넘쳤다가 모험도 하고 실험도 하고 혼자 다 하면서 자신의 문장이 착륙할 최선의 자리를 탐색한다. 독자들의 뇌리에 선명한 필압을 남기고 싶은 동시에 흔적도 없이 부재하고 싶은 소망의 충돌을 온몸으로 버티어내는 이가 작가라면, 실로 방심할 수 없는 장력과 개성을 지닌 한 명의 작가를 기분 좋은 충격과 함께 만났다. 구병모(소설가)

목차

차례

파운드케이크
우중비행
실패한 여름휴가
Stained
망가진 겨울여행
인컴플리트 피치
페이퍼 컷
해설 | 사물과 사랑 · 인아영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작가 소개

허희정 지음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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