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마니아 독자층을 확보한 소설가 이상우의 세번째 책
이미지를 직조하며 써 내려간 이 시대의 감각
『프리즘』 『warp』 두 권의 책으로 마니아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온 작가 이상우의 세번째 소설 『두 사람이 걸어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2018년부터 씌어진 것들로 각기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되었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이면서 장편소설의 형태로 편집⋅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이번 책에는 한국에 아직 소개된 적이 없는 인도네시아 작가 그라티아구스티 차나냐 롬파스Gratiagusti Chananya Rompas의 소설이 함께 수록되었다. 이상우가 직접 자신의 소설을 롬파스에게 소개하고 원고를 청탁함으로써 이상우의 소설과 잘 어우러지는 멋진 작품이 실렸다. 롬파스의 소설은 이 책과 같이 “두 사람이 걸어가”를 제목으로 하고 있으며 번역은 소설가 한유주가 맡았다.
이 책은 소설의 내용을 뛰어넘어 책의 실물 디자인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책 속의 화자가 계속해서 졸다가 깬다,라는 상황에 맞추어 곳곳에 끼워 넣은 검은색 속표제지 사이로는 기존 소설책들의 전형적인 디자인 틀을 벗어난 본문을 배치했다. 이상우의 이번 소설은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느낄 수 있을 법한 감각을 전달하기 위한 방향으로 구성한 것이다. 처음부터 천천히 살폈을 때에야 비로소 전체를 통으로 ‘느껴’볼 수 있는 소설을 소개한다.
“한번 떠올려봐. 뭘?”
영상처럼 흐르고 이미지로 읽히는 문장들
다이너 테이블 접시 위로 버터 조각이 올려진 팬케이크 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투명한 시럽이 액체적 미디어이자 가상 혹은 디지털 감각의 다차원 위상공간이 되어 겹겹이 쌓인 팬케이크라는 도시들을 연결시키는 99페이지짜리 개소리도 있겠지. (p. 5)
별빛 같은 빛깔들이 옥상 펜스 너머로 나타나면 회전 소리만 가득히 거리와 골목 사이로 몇몇은 올려다보던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홀짝이고 현찰을 뽑고 키스를 다시 이어나가고 머리 밖으로 멀어지던 정찰 헬리콥터 흰빛으로 휩싸이며 직선에 가까운 섬광 거리로 쏟아낼 때 닿지 못할 높이로부터 비스듬히 건물 외벽으로 스며드는 새하얀 빛의 안과 밖 한순간 모두 가상 같았지요. 여름부터 가을, 매일 아침부터 새벽까지 눈부셨지요. 한 손으로 눈앞을 가리고서 손가락 사이로 갈라져 오는 빛을 보았지요. 발레복을 입고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았지요. 양팔 가득 시장바구니 안고 가는 동성 연인의 커플 쇼트 팬츠를 보았지요. 스쿠터 헬멧을 쓴 강아지를 보았지요. (p. 203)
이 책의 화자는 느닷없는 장소에서, 느닷없는 상황에서 잠에 빠지는 행동을 반복한다. 깜박 졸다가 깨고 다시 졸다가 깼을 때 화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무언가를 ‘본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데에 있어 이 ‘보다’라는 감각에 주목할 것이다. 작가는 ‘처럼’과 같은 조사나 ‘바라보다’ 등의 서술어를 문장의 재료로 활용하여 글을 읽어가는 동시에 이미지가 연상되도록 언어로써 조형해낸다. 중요한 건 이 책에서의 이미지는 현실 공간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영화⋅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로 매개된 (어쩌면 우리가 실제 풍경보다 더 자주 마주할지도 모르는) 화면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디지털적 감각으로 느껴지는 눈앞의 이미지들은 구체적이고 고정적인 실제 장소라기보다는 “흘러내리는 투명한 시럽” “겹겹이 쌓인 팬케이크”처럼 유동적인 가상 공간일 것이다. 독자들은 이 가상 공간에 대한 공통된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 다른 공간에 있을지라도 문장을 읽어내려감에 따라 감각되는 이미지를 즉각 환기한다.
특히 이상우는 “집 앞 푸드 트럭에서 핫도그 먹었다”와 같은 문장처럼 의도적으로 ‘을/를’ 등의 목적격 조사를 생략하여 필수적인 정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조사가 삭제된 문장들을 통해 작가는 여백의 장면을 빠르게 뛰어넘고 중요한 장면을 느리게 재생하는 것과 같이 주로 영상에 적용되는 효과를 문장에 부여한다. 작가가 절묘하게 조정한 속도에 맞춰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를 얹고, 그 위에 또 다른 이미지를 겹겹이 쌓아 올리도록 해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심상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과 영상처럼 재생되는 감각의 재현 방식은 이상우의 충실한 독자층이 영상에 매우 익숙한 세대라는 점을 떠올렸을 때 몹시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시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겹칠수록 투명해지는 것
트램이 떠나가고 트램을 기다리고 기대보다 이르게 희망의 종착지에 남겨진 채 고개 내려 나가유미 씨의 메일 읽을 때면. 제 얼굴을 비추는 아이폰 불빛 어디에선가 나가유미 씨의 얼굴 또한 비추고 있는 모습 떠오릅니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 닿지 못하도록 흘러가면서 닿을 수 있는 시선 주위를 오가는 새들 따라 조금씩 드러나는 거리의 윤곽 나가유미 씨가 적어준 풍경과 겹쳐져 가로등과 건물들 자라나듯 나타날 동안 똑같은 파장의 불빛 속에서 서로가 모르는 장소로 밝혀지는 우리의 얼굴을 말이지요. 잎갈나무 가로수 무리 뒤로 고가교의 전철이 지나가고 고개 들면 사라져버린 전철 불빛처럼 믿을 수 없이 희박한 감각들만이 남아 빛의 해상도로 미래를 베끼는데 서로의 메일을 읽는 우리, 언제 어디인지 모르게 각자의 동시에게 비춰지는 얼굴 밖으로 우리의 시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pp. 204~05)
감각적으로 제시된 이미지들 사이사이에 이상우는 ‘케이와와’ ‘링’ ‘조시’ ‘나가유미’ 등의 등장인물들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을 끼워 넣는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주변 풍경에 속해 있다는 느낌보다는 조금씩 포개지거나 조금씩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각각이 ‘그냥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경한 감각은 이상우의 문장이 보여주는 장면들이 ‘누가’ 보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 실제로 이 책에는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다수 등장한다. 계속 등장하는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등장인물들이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유미의 메일을 스마트폰으로 읽으며 나가유미가 있는 공간을 그려보는 화자의 얼굴이 다시 스마트폰에 비치고, 역시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서 온 메일을 읽으며 그가 있는 공간을 떠올리는 나가유미의 얼굴이 휴대전화 액정에 비친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상상한 서로의 공간은 “희박한 감각들”로 각자의 머릿속에 공통의 장소를 지각하게 해준다. 가상의 공간에 대한 경험은 디지털을 매개로 각자의 인물들에게 동시적인 감각을 부여하고, 그런 감각들이 겹쳐질수록 투명해지는 레이어 속에서 “우리의 시점”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 본문 중에서
거의 태어날 때부터 쓰레기 같은 소설만 써서 평단과 독자와 부모에게까지 버림받은 소설가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몰라, 트럭에 밟히거나 빙판길에 미끄러져 언덕을 굴렀을 거고 큰 사고였으니 큰 수술을 해야 했겠지 근데 이 빌어먹는 소설가는 당연히 보험도 들어두지 않아서 도저히 병원비를 낼 수가 없는 거야. 병실에 사지가 묶인 채로 천장의 얼룩을 삶의 은유처럼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제안을 하는 거지. 당신을 살려주겠다. 영원히. 저는 돈이 없는걸요. 내가 다 지불하겠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음 날 소설가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로봇이 되어 있는 거지. 그게 너가 받은 영감이라고? 저 교수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똑같이 따라 한 거잖아? (p. 4)
케이와와와 자피로를 대신해 팽과 산책했다. 시립 수영장 근처에서 아이들이 덜 마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팽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서 달려들었는데, 팽을 어루만지거나 다 같이 깡충깡충 뛰면서 누구도 팽의 다리 한쪽이 왜 없는지 묻지 않았다. 팽과 함께 다니며 졸지 않기 위해 계속 풍경을 의식하며 걸었고, 팽이 졸 때면 혼자 주위를 빙빙 걸었다. 어쩌면 대화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주머니 속의 스키틀즈에 대해? 의도치 않게 타인의 우울을 목격하는 일에 대해? 엘리베이터마다 바닥 중앙에 그려진 문양들에 대해? 살아 있다는 것을 깜빡하는 일에 대해? 잠든 팽을 보거나 코를 벌렁거리는 팽을 보거나 뒤돌아 눈을 마주해오는 팽을 허리 숙여 마중하면서 불가능한 기분이 생겼다. (p. 83)
바닥에 물기를 질질 흘리며 돌아다니던 남자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발 아래로 물이 고일 때까지 흐느끼다 돌아갔는데, 휘청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골목의 화창함 속으로 증발되듯 사라져가는 남자를 지켜보던 자피로는 다락에 올라 평행오변형을 펼쳐보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뒤져봐도 손바닥 그림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또 새벽에 자피로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전과 같은 각도로 얼굴을 비켜둔 낯선 이의 체구가 낮에 본 남자와는 달랐고 , 자피로는 몸도 움직일 수 없이 졸음처럼 기울어진 어둠의 깊이에게서 어떤 표정이라도 나타나길 기다리다 결국 또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잠들어버렸다. (p. 96)
방학식이 끝나고 할머니와 걸었지 운동장을 떠나며 바람이 가벼웠고 볕 부드러운 상점가를 떠도는 개에게서 비냄새가 흩날렸지 왜인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서 쫓아오던 개는 할머니가 돌아보지 않으니 다시 떠돌던 곳으로 땅바닥에 턱을 기대 누웠지 스쿠터 탄 학생들 지나가고 이어폰 빼내며 택시 안에서 링이 내릴 동안에 하복 입은 중학생들이 랩을 하면서 언덕 골목을 내려와, 물기 머금은 농구공 표면이 중 학생들 손 사이로 오고 가며 매끄러운 반짝임 오돌토돌 짧게 깎은 머리와 대충 길게 묶은 머리칼 우산 없이 빗방울 솎는 바람 소리 품에서. 소리 내지 않는 할머니의 작은 발을 따라 걷다 보면 말을 할 필요 없었고 양복 입은 부모님 손을 잡고 차에 타던 반장을 떠올리다가 배가 고파졌지. (p. 155)
두 사람이 걸어가
두 사람이 걸어가_그라티아구스티 차나냐 롬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