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정크space-junk가 우주에 버린 인간의 쓰레기라면
정크스페이스junk-space는 지구에 남겨둔 인류의 찌꺼기다.”
렘 콜하스가 묵시록적으로 그려내는
항구적 현재 속에 유폐된 세계
그 속에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신호를 탐지해낼 수 있을까
네덜란드 출신의 건축가 렘 콜하스의 아방가르드적 에세이 「정크스페이스」와 함께 그의 사유에서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미래 도시」를 함께 묶었다. 렘 콜하스가 이끌었던 하버드 대학 디자인 스쿨 세미나 ‘도시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쇼핑 안내서』에 수록되었던 글 「정크스페이스」는 “20세기에 건축은 실종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지금 도처에서 끝없이 뻗어 올라가고 있는 저 건축물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 따르면 그것은 정크스페이스, 즉 쓰레기공간이다. 건축은 더 이상 기념비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고, 영원한 변화를 갈망하며 언제나 새롭게 재편되길 기다리는 공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단지 건축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의 종말, 이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영원한 현재에 유폐됨을 의미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콜하스가 그려낸 정크스페이스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 묵시록적 세계에서 우리는 탈출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정크스페이스는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인가
“토끼는 새로운 소고기”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성형은 새로운 우주다”로 종결되는 독특한 형식의 글 속에서 정크스페이스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해내기는 쉽지 않다. 콜하스의 정크스페이스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건축과 문화 사이에서, 물리적 공간과 추상적 공간 사이에서, 단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난해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리를 걷다가 혹은 건물 안을 배회하다 종종 마주치는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와 같은 표지판들은 정크스페이스의 기표라고 할 수 있다. 표지판 뒤 가림막이나 널빤지로 가려진 암흑의 공간들은 줄을 지어 보수와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물질적 구체화는 잠정적이고 그 무엇과도 대체 가능하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변화다. 이는 건축이 후기자본주의의 유동성과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한때 역사와 유토피아적 꿈을 담아내고자 했던 건축가의 소명은 이제 옛것의 파괴와 끝없는 재활용, 공간의 끊임없는 유희와 재배치로 축소된다. 정크스페이스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 모두를 뒤섞어 솔기 없는 깔끔한 패치워크를 만들어낸다. 의미는 사라지고 중립성의 지옥이 펼쳐진다. 정크스페이스는 도처에서 창궐한다. 콜하스는 박물관, 공항, 시내, 학교, 병원, 심지어는 뉴스와 방송, 교육, 인터넷까지 모든 곳에서 정크스페이스를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우리의 육체까지도 잠식해 들어간다.
“쇼핑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공적 활동의 마지막 형식이다.”_렘 콜하스
건축가가 참조해야 할 단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쇼핑이다. 쇼핑이 도시 계획과 건축의 궁극적인 원리가 되었다. 모든 공간에 쇼핑의 영혼이 깃든다. 공항은 쇼핑몰이 된 지 오래고, 학교는 ‘현명한 소비자의 훈육’이라는 모순형용을 모토로 삼는다. 이제 쇼핑은 더 이상 문화적, 사회적 선택 사항이 아니다. 쇼핑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공적 활동의 마지막 형식이라고 콜하스는 선언한다. 이는 쇼핑이 오늘날의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궁극의 원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정크스페이스는 인간 주체를 양육하고 재생산하는 생태 환경을 대신한다. 우리는 쇼핑을 통해서만 도시를 경험한다. 우리는 원근법을 상실한 공간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쇼핑을 하고 우리의 욕망을 알기 위해 쇼핑한다. 쇼핑은 우리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이 쇼핑을 위해 펼쳐진 공간이 바로 정크스페이스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예견’하는 묵시록적 선언문
「정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보기 드문 역작이지만, 이 텍스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콜하스가 수행해온 건축 프로젝트와 대도시 전반에 대한 관심, 아키그램의 영향, 르코르뷔지에와 살바도르 달리를 결합시킨 듯한 그의 건축적 비전에 대한 통합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미래 도시」는 콜하스의 비전과 「정크스페이스」가 등장한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매우 유용한 텍스트다. 제임슨은 현대 도시와 건축,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쇼핑과 상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광범위하게 수행하면서 「정크스페이스」가 갖는 의미와 잠재력을 포착해낸다. 제임슨은 「정크스페이스」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텍스트이며 완전히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크스페이스에 대한 묘사는 정크스페이스의 논리와 속성 그 자체를 언어적으로 모방한 듯 강박적이고 광란적으로 증식해나가고, 여기에 광고 문구, 캐치프레이즈, 상품명, 브랜드명, 개념과 용어에 대한 저작권 표기 등 자본주의의 온갖 클리셰가 동원되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정크스페이스 스스로가 그려낸 자화상처럼 보일 정도다. 비평가 할 포스터가 지적한 것처럼, 콜하스가 발명해낸 이 새로운 형식의 선언문은 현재의 악몽을 ‘예언’한다. 이 균질한 공간 속에는 폐허의 흔적도 미래를 향한 출구도 없다. 역사의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은 현재로 환원된다. 정크스페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방향감각을 앗아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정크스페이스에서 탈출로를 찾고 역사의 시계를 다시 돌리는 작업이다. 제임슨은 「정크스페이스」가 역사로의 탈출을 위해 기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제임슨은 콜하스의 글쓰기 방식에 주목하는데, 그가 광란적이고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글쓰기라는 공성 망치는 우리의 모든 존재 형식을 관통하는 동일성이 드러나도록 집중 타격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동일화된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만들고 대문자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견고한 장벽을 돌파할 수 있게 해준다. 「정크스페이스」는 우리가 붙들려 있는 악몽 같은 세계의 모습을 증언함과 동시에, 우리가 시간과 역사 속으로 그리고 단단한 미래 속으로 다시 한 번 돌진할 수 있음을 예언한다.
본문 속으로
‘정체성’은 못 가진 자를 위한 새로운 정크푸드, 정치적 권리를 상실한 자를 위한 세계화의 사료… 스페이스정크space-junk가 우주에 버린 인간의 쓰레기라면, 정크스페이스junk-space는 지구에 남겨둔 인류의 찌꺼기다. 근대화가 건설한 생산물은 근대 건축이 아니라 정크스페이스다. 정크스페이스는 근대화가 진행된 이후에 남겨진 것,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대화의 낙진이다.(「정크스페이스」, 9쪽)
정크스페이스는 개념의 버뮤다 삼각지대며, 버려진 세균 배양 접시다. 그것은 구별을 거부하며, 해결을 방해하고, 의도와 실현을 혼동한다. 그것은 서열화하기보다는 축적하며, 합성하기보다는 첨가한다. […] 정크스페이스는 수백만의 우리 친구들과 영원히 자쿠지 욕조에 들어가야 한다는 판결을 받은 것 같다… 몽롱한 무경계의 제국, 그것은 높은 것과 낮은 것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곧은 것과 굽은 것을,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를 모두 뒤섞어 영원히 아귀가 맞지 않으면서도 솔기 없이 깔끔한 패치워크를 만들어준다.(「정크스페이스」, 13쪽)
정크스페이스를 처음 생각해낸 건축가들은 이를 메가스트럭처Megastructure라 칭하며, 자신들이 봉착했던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종 해결책이라 여겼다. 이 거대한 상부구조는 바벨탑처럼 영원히 존속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인 하부조직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라 여겨졌다. 물론 변화의 방향은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크스페이스에서는 모든 것이 뒤바뀐다. 상부구조 없이 오로지 하부조직만이 존재한다.(「정크스페이스」, 18쪽)
건축은 ‘항구적인 진화’를 보여주는 시간적 배열로 변화되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계속적인―변화이며, 이는 아주 드문 경우에 ‘복원’을 동반한다. 이 과정은 역사의 새로운 장들을 정크스페이스로 포획한다. 역사는 부패한다. 절대 역사absolute history는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아무런 감동도 없이 무엇인가 접목되고 이로부터 색깔과 형질이 제거된다. 이 밋밋함이 옛것과 새것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정크스페이스」, 29쪽)
정크스페이스는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인류의 절반은 생산으로 오염되고, 나머지 절반은 소비로 오염된다. 제3세계의 자동차, 오토바이, 트럭, 버스, 공장,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오염물질을 다 합한다고 하더라도 정크스페이스가 생산해내는 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크스페이스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안락과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함으로써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포토샵에 의해 선언문이 되고, 상호배타적인 것들이 모순 없이 결합된 청사진이 되며, 투명하지 못한 NGO 단체들에 의해 중재된다.(「정크스페이스」, 33쪽)
정크스페이스는 묵시록을 다시 쓴다. 우리는 산소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다… 과거에 정크스페이스의 복잡성은 부속 시설들의 단순함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주차 건물, 주유소, 유통센터가 그러한 시설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더니즘의 원초적 목적이었던 기념비적 순수성을 일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요즘에는 서정주의를 대량 투여함으로써, 예전에는 디자인이나 취향 혹은 시장과는 전혀 무관했던 이런 부속 시설마저도 정크스페이스의 세계로 편입되었으며, 정크스페이스는 야외로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정크스페이스」, 45~46쪽)
인류는 언제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만약 공간이 인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될까? 정크스페이스가 우리의 몸속으로 침략해 들어올까? 핸드폰의 전파를 통해서? 정크스페이스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나? 보톡스 주사는 어떤가? 콜라겐은? 실리콘 이식? 지방흡입술? 음경확대술? 유전자 치료라는 것도 결국은 정크스페이스에 따라 총체적 재건설을 천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각자가 미니 공사판이 되는 것인가?(「정크스페이스」, 53쪽)
『쇼핑 안내서』에 수록된 글 「정크스페이스」는 렘 콜하스가 직접 기고한 것으로 대단한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창작물일뿐더러, 역사에 대한 새로운 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다. […] 혐오감과 희열감의 어울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유한 특성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교본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다.(「미래 도시」, 77쪽)
이것은 더 이상 건축 이론이 아니다. 또한 건축가의 관점에서 쓴 소설도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새로운 공간의 언어로, 자가증식적이며 자기영속화를 위한 문장으로 말한다. 공간 그 자체가 대문자 역사의 새로운 순간에 중심적인 약호로 그리고 지배적인 언어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언어의 토대인 정크스페이스는 공간 자체를 병들게 하고 궁극적으로 멸종하게 만들어버린다(「미래 도시」, 80쪽)
「정크스페이스」는 역사로의 탈출을 위한 기획이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공상과학소설의 장르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즉 부재하는 미래 속에 내재된 한 가지 파괴적인 성향을 선택하여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것이 그 자체 묵시록적인 것이 되어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세계를 폭파시키고 만다.(「미래 도시」, 87쪽)
정크스페이스_렘 콜하스
미래 도시_프레드릭 제임슨
해제: 정크스페이스와 유토피아의 변증법_임경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