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 「시인의 말」
거침없고 솔직한 직진의 언어 속에
약하고 아픈 생을 품는 한참의 사랑
쓰는 사람, 김민정
사랑받는 시인이자 성공한 편집자.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검은 나나의 꿈」 외 9편의 시가 당선된 이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등을 펴냈고,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았다. 또한 1998년 한 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해, 2005년 문예중앙에서 40여 권의 시집을 만들었고, 2009년부터는 문학동네에서는 중임을 맡아 시인선을 론칭하기도 했다. 시를 쓰고 책을 만든 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문학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여전히 한참이고 한창이다.
마흔네 살의 겨울, 마흔네 편의 시가 담긴 네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묶어낸 시인, 김민정. 시집 장인답게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시인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 파격적인 제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문학을 향한 제 열망과 욕심에 비해서 문학 본령의 구멍은 늘 너무 작았기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자꾸 헤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근데 ‘헤어졌습니다’가 아니라 ‘헤어지는 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와중이라는 자체가 ‘시의 존재감’과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PAPER』 2019년 가을호)
시인의 씀을 향한 열망은 강렬했고, 시는 그녀를 살게 했다. ‘시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수식은 시인과 오래 함께했다. 데뷔작에서부터 시인이 끈질기게 질문해온 시와 언어. 단단했던 관습의 벽을 유연하게 늘려내고 우리가 외면해온 세계에 언어를 부여하는 김민정의 이번 시집에서는 여전히 그녀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의지, 소명이 엿보인다. 가장 큰 사랑은 없지만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결국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품는 사람이기에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당신,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당신,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당신들을 안아주러 떠난다. 이미 출발한 지 오래되었다.
먹고 들리고 쏟는 나날들
김민정의 시는 언제나 커브 없는 직구였다. 직설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가 끓어오르던 초기 시들은 ‘좀 불편하게 하는 시’ “거칠고, 극단적이며, 즉흥적이고, 난폭하다”(이장욱)라는 평을 받곤 했으며, “희극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유희가 아니라 그러한 웃음을 거세하고 차단하는 ‘검은 유희’”(강계숙)를 발견하게끔 했다.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운 “강렬한 공격력”을 보여주었으나, 이를 통해 “비루하나 어딘가 유쾌한 면이 없지 않은 이 시대의 풍경을 포착”(김인환)해가며 그 깊이와 무게 또한 더해왔다. 시인 이원은 그녀의 직전 시집 발문에서 “결정적 순간의 방식. 돌려 말하기는 꿈에서도 하지 않으므로, “삶을 현장에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현장에서 체포”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번 시집에서도 김민정은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으며, 자유분방하지만 가볍지 않은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1월 1일 일요일」)이라 다짐해보지만, “징그러 아주 그냥 지긋지긋해 집에 와 김치 넣고 고추장떡이나 부치며 소주나 따르면서” 생각한다. “왜 다 태어나서 이 고생일까?”(「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환각은 있고 기대는 없음/환상은 있고 기대는 없음/기대는 있고 포옹은 없음/포옹은 있고 당신은 없음”. 이 부재와 상실의 시간에 “구두 밑창에 들러붙은 개똥 떼면서 개씨발거리는 내가 있”다(「나는 뒤끝 짱 있음」).
보이는 마음은 써야 하는 마음. 쓰인 마음은 읽어야 하는 마음. 읽힌 마음은 들킨 마음. 들켜진 마음은 번지는 마음. 시는 그렇게 들불처럼 퍼져서 비밀이 안 되어야 하는 마음. [……] 아직은 오늘이 어제가 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나의 마음. 이 마음. 그건 오늘 내가 쓴 시를 내일 내가 읽을 수 있고 오늘 내가 읽은 것을 내가 내일 찢을 수도 있는 나의 마음. 이 마음. 편애보다 편육이 편하다고 말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나의 마음. 이 마음. 가없지 않고 가 있다는 솔직함이 말이 되는 나의 마음. (「네 삽이냐? 내 삽이지!」 부분)
시인이 지닌 고유의 예민한 감각은 세계 이면을 보아내는 눈이다. 10년 전 처음, 느끼기 시작했던 그녀 안에 다시금 뒤꿈치를 드는 누군가가 있다. 먹고, 들리고, 홀리고, 쏟아내어 끝끝내 써 내려가는 기나긴 굿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소설 같기도 한 시. 개똥이든 치질이든 씨발이든 그녀의 시 안에서 모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생을 토해내는 그 솔직함 속에 빛나는 눈[目] 때문이 아닐까.
없음의 있음을 향한 진심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화두는 ‘곡두’, 즉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이다. 그간 시인의 많은 시들이 여성의 문제를 다루며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한 생생한 내러티브를 담았다면, 이번 시집 또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한편 그 지평이 넓게 확장되어 우리 주변에 존재하면서도 부러 깊게 보지 않았던 이웃들,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해외 여성들의 삶까지 그 시선이 뻗어 나갔다.
한국 다시 온 지 넉 달 되었어요. 들어갔다가 또 나왔어요. 들어갔다가 또 나왔어요. 한국 좋아서요. 왔다 갔다 10년도 넘었어요. 마사지는 스무 살에 배웠어요. 나 힘이 세서 손님들이 좋아해요. 나는 서른세 살요. 남편은 톈진에서 살아요. 오래 못 봤어요. 보고 싶죠. 몽골 좋은데 가면 심심해요. 별만 있어요. 그래도 몽골 별 같은 거 한국에서 못 봤어요. 몽골 별 사진 보여줄까요?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 부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들 모두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 모든 이의 이름은 그녀의 존엄을 뜻한다. 이 말은 조립 라인에서 일하던 시절 깊은 깨달음을 준 구절이다. 나의 이름은 정샤오충이다. 나를 중국의 어느 여성 노동자로 부르지 말기를 바란다.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부분)
시인은 보아낸다. 분명 함께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부러 보지 않고, 그래서 있는데도 보이지 않다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허깨비 같은 사람들을. 실제 일어난 일들은 너무 충격적이라 픽션이라고 쉽게 믿어버리고 은폐하면서, 예쁘게 꾸민 이야기는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편협의 세상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좁고 답답하다. 하여 이번 시집에서는 지워진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바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다가서서 언어로서 연대하려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 뒤표지의 시인 산문에서 말하듯 “화두는 곡두./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이 곡두들의 이야기는 시인을 쓰게 하는 큰 동력이자 원천일 것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나는 나의 부록”이라고, 자신이 본인에게 언제나 맨 나중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안다. 가장 마지막은 없다. 단지 많은 사랑이 있을 뿐이다.
본문에서
엉덩이가 시려 보니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반팔 티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정글짐도 있고 그네도 있고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 는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정말 없는 걸까 노려보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누가 불러 나왔나 내가 홀려 나왔지 혼자니까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발에 묻은 모래 털기 귀찮으니까 모래 속에 발을 더 파묻어가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어느 밤 그랬으니까 다신 그런 밤 없기를 하였는데 또 까먹고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부분이거 어쩌기 어려운 한 이거 어쩌기 쉬울 때까지는 앙심과 양심 사이에서 계속 두루마리 휴지 풀겠지. 그치, 그런데 그거 본 적 있어? 1977년도 <10대가수가요제>에서 혜은이가 「당신만을 사랑해」 노래하는데 옆에서 길옥윤이 색소폰을 불지.예쁘게 웃으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양 볼 오지게 깨가면서 불지. 혜은이 목소리는 알아도 길옥윤 목소리는 모르지. 제 목소리 뽐내는 것도 아닌데 길옥윤은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 색소폰을 불었을까. 그렇게 불더니 지금은 어디가서 무엇을 불까. 모르지. 모르니까 썼다 지웠다 그러다가 없을 것이란 얘기지.
―「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 부분젯밥 너 하나 못 먹어서 끝나는 게 아니야
그 잘난 고추 하나도 못 뽑을 거면서
저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다 어쩔 것이여 살림 들어먹을 년들
시방 혀 차기도 아깝다니까 쯧쯧 하시니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저 곰방대 할배
검은 갓 쓰고 옥색 두루마기 입고 와서
검은 갓 벗고 옥색 두루마기 벗고 나서
졸라 드시는 거죠 촵촵거리면서
저 같잖은 말도 말이라고 저 입에다가
아귀수육하고 민어 살 뜨고 육전 부치고
소갈비 재고 게장 담그고 새우 튀기는
엄마는 미쳤어 엄마는 미친 거야
그래 나 미쳤다 미쳤으니 네 아빠랑 살지
감 깎는데 양자 새끼 이 집에 들이기만 해봐
내가 이걸로 눈 다 후벼버릴 거야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부분
추천의 말
꼭 저녁 같습니다. 시인이 만들어낸 시의 경계를 두고 하는 은유입니다.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 펼쳐지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박준(시인)
뒤표지 글(시인의 글)
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1월1일 일요일/사발이 떴어/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꿈에 나는 스리랑카 여자였다/나는 뒤끝 짱 있음/그니깐 여름이 부르지 마요/쾰른성당/실마리/이제니가사람된다/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니고/나의 까짐 덕분이랄까/네 삽이냐? 내 삽이지!/어느 날 저기는 자기가 되고 어느 날 자기는 저기가 되어 /기적은 왜 기적을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마 들어봤나 마/하여간에 선수인 것 같은, 끝/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둘/열하고도 하루쯤 전일 거다/수경의 점 점 점/모르긴 몰라도/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철규의 감자/준이의 양파/그 들통/다른 이상함은 있다/베이다오北島/감삼甘三 사는 제이크/제이크의 문자/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우리는 그럴 수 있다/저녁녘/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끝물과 꿀물/깨지, 깨/귀가 귀 가/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난데요/삼세번/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발문
우리도 폴짝・박준
good j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