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 시인선 30(재판)

고정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11월 15일 | ISBN 9788932035284

사양 변형판 128x205 · 130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우리들 어둠은 사랑이 되는구나
우리들 어둠은 구원이 되는구나”

바다에서 태어나 산으로 사라진 시인, 그가 남긴 삶의 치열한 여백, 시편들
새롭게 살아난 고정희 시의 정수, 『이 시대의 아벨』

올해(2019년)는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의 품속에 안긴 지 어느덧 28년이 된 해다. 시인의 마지막은 그가 시작(詩作)으로 좇았던,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에 가닿아 있다. 세상의 만류와 주위의 우려를 뒤로 하고 한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한 사람은 악천후를 속에서 ‘산’을 오른다. 오름 끝에, 오름 중에 맞이할 죽음을 알고도, 또 모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 예수와 시인 고정희는 그 깊은 고독 속에서 구원을, 시를 마무리한다. 외로움을 지고 오르며 세상의/과 소통을 이룬다.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고정희 시인은 해남과 광주에서 잡지사 기자, 사회단체 간사, 문학동인・문학회 회원 등으로 사회활동을 하다가 스물일곱(1975)이 되어서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에 입학한다. 그해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 목요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작가회의) 이사 등을 지내며 ‘문학’과 ‘사회’를 아우른다. ‘또 하나의 문화’ 창립(1984) 동인으로, 『여성신문』 초대 주간(1988~89)으로 활동하며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데도 큰 몫을 담당한다. 1991년 6월 9일, 시인의 마음속에 신앙처럼 여겨온 지리산에 오르다 실족, 마흔다섯 해 동안의 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시인은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이후『실락원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등 11권의 시집을 남겼다.


자유로운 거리에서도 안전한 통치를 청탁하는 시대, 불쑥 일어선 시편들

고정희의 시는 짙은 시대성으로 어쩔 수 없이 시가 씌어진 당대의 세상을 불러일으킨다. 납작하게 누워 있던 그 세상은 벌떡 일어나 이곳의 사람들에게 묻는다. 살아지는지 살아가는지, 그리하여 살 만하신지 안녕하신지…… 지금, 당신들이 바라는 안녕은 안전하게 통치해달라는 청탁이 아닌지,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인터넷 댓글 창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닌지…… 다양성의 사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아이러니한 세상. ‘금지를 금지하자’던 반(反)권력의 시대는 가고 이제, 고소 고발과 청원이 난무하는, 권력에 금지를 청탁하는 시대. 또한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적 구원이 될 수 없는, 세련된 기복신앙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고정희 시인의 시편들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여기에서 호명되는 이유는 그 치열함이 만든 여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빈틈을 넓혀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어느 밤낮은 지금의 어떤 날, 그 시대의 어느 골목은 이곳의 어느 거리이다. 호명됨으로써 더욱 새로워지고, 소환됨으로써 그때와 지금을 연결하는, 틈을 메우는 여백, 여백을 채우는 시.

[……]
유산 없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
—「서울 사랑—절망에 대하여」 부분


참여의 시, 여성의 시, 내성(內省)의 시, 영원한 ‘이 시대의 아벨’의 시

권력이 사랑이 시가 배달되는 시대, 반성도 사과도 성찰도 전시되는 시대, 지성은 집단에서 생산되고 개인은 그것을 소비하는 시대, 스스로 아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카인인, 살아남은 자의 이중성, 또는 이기적 모순의 시대. 1983년의 『이 시대의 아벨』은 아벨 되기를 갈망하는 살아남은 자의 속죄이고 실천이라면, 2019년의 『이 시대의 아벨』은 살아남은 자의 손을 내려다보게 한다. 그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칼끝으로 찌른 그 몸은 누구의 몸인지.
역사는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지만, 시는 언어를 넘어섬으로써 미래에 다가간다. 당대의 삶에 천착하지만 사회 현상의 깊은 속으로 흐르는 저류를 발견하는 것은, (당대의) 언어로는 불가능하다. 그때의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는 지금의 언어에 닿아 있고, 언어를 넘어선 그 무엇, 즉, 시에 닿아 있다. 고정희 시인의 시가, ‘참여’로만 머물렀다면 그의 시는 이미 지난 세기에 박제되었을 것이다. 참여의 시로서, 또한 여성의 시로서 시대를 관통하는 목소리는 밖으로만 향해 있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나가는 경로를 지닌다. 자신을 성찰하는 내성(內省)의 시는 고정희 시의 밑바닥을 흐르는 힘이다. 유연한 폭력에 내성(耐性)이 생긴 이 시대의 ‘카인’에게 ‘당신은 아벨이 아님’을 성찰케 하고 그 아픔을 자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이 시대의 아벨이 되라고 한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고정희의 시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축이다. 그는 몹쓸 인간과 악덕의 현실에 분노하고, 삶의 허무함에 좌절하고, 때론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고독에 쓸쓸해한다. 그것은 인간을 황폐하게 하는 문명의 근본적 죄악으로부터 오기도 하며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그는 결코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 의지는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린다는 의식이 그의 생각 깊숙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한 갈대가 한 계절 흔들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하늘 아래”에서라는 생각이다. 하늘 아래 아니라면, 어디서 상한 갈대가 한시인들 버틸 수 있으랴. 결국 아무리 버림받고 핍박받은, 혹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이라도 하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올바른 정신만 갖고 있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주연, 「고정희의 의지와 사랑」 시집 초판(1983) 해설에서


시집 속으로

설흔두 살의 늦가을
징그러워라
설흔두 살 여자의 독기와 슬픔으로
설흔두 해 뿌리 내린 머리를 깎았다
나치 수용소의 유대 여자들처럼
나는 내 땅에서 삭발했었다
자수성가 세대의 아픔을 헤집고
즈믄 강물 휘도는 소리
간간이 들으면서
유대 여자처럼 거울을 보았다
파르스름한 벌거숭이산 위에
튼튼한 원목들 쿵쿵 쓰러지고
거센 마파람 맨발로 몰려와
열두 번도 더 추위를 덮었다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모자 속에서 너를 바라보았을 때
세상은 어김없는 빈집이었다
허천들린 외로움의 세상을
타는 목젖으로 벌컥벌컥 들이키며
유대 여자처럼 나는 걸었다
(하느님도 침묵하신 잘 익은 땅이여)
껄끄러운 입안에서 아직
단내가 풍기지만 그래도
푸른 신호등이 잘 보이는 두 눈에
철철 넘치는 총명한 눈물,

설흔두 해 뿌리 자르고 나서도
그리움 하나만은 끝내지 못했다
종말론적 벼랑에서 너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이제 어둠의 꽃이었다
단발령의 격문이었다.
―「그해 가을」 전문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 물린 아벨
일흔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 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이 시대의 아벨」 부분

시집 초판 뒤표지 글(시인의 글. 1983)

시 쓰는 행위가 곧 신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와 행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구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나의 시가 관심하는 문제는 삶 자체이지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우리의 삶의 영역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전통의 문제들이 곧 우리 삶의 현장이며 그것들과 내 삶이 부딪는 장소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나의 시는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의 고뇌의 궤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가도 사회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니지만 개개인의 삶이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들의 규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러한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였다.

시집 초판 시인의 말(1983)

두번째 시집 『실락원 기행』(1981) 이후에 발표된 2, 3년 동안의 작품을 제5부로 묶었다. 올해 5월에 상재한 장시집 『초혼제』가 그 1부에 속한다면 이 시집은 제2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1년에 두 권의 시집을 묶는다는 사실이 외형적으로 내게 상당한 부담이 되어왔지만 그러나 기왕에 정리된 작품들을 단지 출판일을 늦추기 위해서 갈무리해두는 것은 나로서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허물은 제때에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통해서 보다 견고한 자기 점검의 기틀이 마련되기를 자숙하고 싶다.
1983년 9월 20일
고정희

목차

시인의 말

I. 서울 사랑
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서울 사랑—절망에 대하여
서울 사랑—두엄을 위하여
서울 사랑—각설이를 위하여
서울 사랑—죽음을 위하여
서울 사랑—말에 대하여
서울 사랑—침묵에 대하여
서울 사랑—다시 핀 꽃에게

II. 이 시대의 아벨
박흥숙전
이 시대의 아벨
그해 가을
망월리 비명
망월리 풍경
독주

III. 벌거숭이산을 위하여
청산별곡
풀어주소서 나 두려움에 떨도다
벌거숭이산을 위하여
회생
군무

현대사 연구・1
한림별곡
디아스포라—슬픔에게
디아스포라—환상가에게
디아스포라—발에게
디아스포라—길에게
사랑을 위한 향두가

IV.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객지
봄 여름 갈 겨울
황혼 일기
산지기를 노래함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김춘수
히브리전서
서정민 소전
가을 편지

V. 사랑법
사랑법 첫째
사랑법 세째
사랑법 네째
사랑법 다섯째
사랑법 여섯째
사랑법 일곱째

해설
고정희의 의지와 사랑・김주연

작가 소개

고정희 지음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시선집 『뱀사골에서 쓴 편지』,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1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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