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지난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타계 1주기에 맞추어 특별히 먼저 출간한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외에,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이어서 2차분으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의 중단편선을 내년 1월 선보일 예정이다.
현실의 변화와 마주하는 글쓰기
윤흥길 중단편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된 이후, 올해로 등단 51년을 맞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문지작가선 다섯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같은 작품을 표제작으로 한 두번째 소설집이 1977년에 출간되었는데, 소설가 이문구가 그다음 해에 “1977년은 소설가 윤흥길의 해였다”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직선과 곡선」 「창백한 중년」 「날개 또는 수갑」으로 이어지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은 1970년대 말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역작이자 198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성민엽,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의 현재적 의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신판 해설, 1997) 이번에 문지작가선으로 다시 묶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윤흥길 초기 소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황혼의 집」(1970)과「집」(1972), 분단 문학의 두 가지 방향을 보여주는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1978)와 중편소설 「쌀」(1993) 등 반세기를 이어져온 윤흥길의 소설 세계에서 중요한 지점에 놓인 아홉 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이 책의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해제에서, 윤흥길의 소설에 대한 “분단과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포착하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미학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와 같은 “동시대의 과제에 대한 소설적 대응으로서의 의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 역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을 낳으며 여전히 문제성을 생산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중단편이 과거의 결과물만이 아닌 여전히 힘을 가진 작품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황혼의 집」과 「집」은 “전쟁 직후의 유년기를 회상하면서도 사실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 윤흥길 초기 소설의 고유한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년의 기억을 가진 인물들이 성장하여 현실 속으로 진입한 이후의 이야기가「엄동」(1975)과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이어진다. ‘성남’을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 역시 ‘집’이 소설의 몸체를 이루지만, 이러한 초기 소설들과의 연관성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 두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타자와의 사이에 놓인 간극을 해결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엄동」을 거쳐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오면서, “주체로 하여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성적 유혹의 존재로부터 인간적 연민과 계층적 연대의 존재로 한 단계씩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 매우 의미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표적인 분단 소설인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와 「쌀」에서는 분단 극복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전자는 윤흥길 소설에서 그다지 낯설지 않은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후자는 “모순 그 자체와 마주하는” 방식으로 분단 문제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를 확인하는 독서의 과정은 현실의 변화와 마주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우리 시대의 소설적 흐름을 이끌어온 작가 윤흥길의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그의 작품이 항상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갖게 되는 힘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 본문에서
사흘 아니면 나흘 만에, 어떤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며칠을 계속해서, 언제나 집채를 사를 듯한 붉은 햇살이 주막 창문에 번득이기 시작하면 할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참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여우의 목청마냥 길고 날카로운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 울음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욕심으로 일부러 그처럼 엄살을 피우는 것같이 들렸고, 누구의 잘못을 호되게 나무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참을 수 없는 아픔을 아무에게나 호소할 때 사람의 입에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그런 무시무시한 비명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 울음소리가 들리면 나는 벌레 먹은 어금니 하나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 나는 할멈의 얼굴이 항상 붉은 이유가 늘 마시는 술 때문인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차차로 그것은 기우는 햇살과 유리창에 번득이는 저녁놀이 얼굴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황혼의 집」(pp. 20)“오 선생, 이래 봬도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
그것뿐이었다. 내 호주머니에 촌지를 밀어 넣던 어느 학부형같이 그는 수줍게 그 말만 건네고는 언덕을 내려갔다. 별로 휘청거릴 것도 없는 작달막한 체구를 연방 휘청거리면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땅을 저주하고 하늘을 저주하는 동작으로 내 눈에 그는 비쳤다. 산 고팽이를 돌아 그의 모습이 벌거벗은 황토의 언덕 저쪽으로 사라지는 찰나, 나는 뛰어가서 그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돌팔매질을 하다 말고 뒤집어진 삼륜차로 달려들어 아귀아귀 참외를 깨물어 먹는 군중을 목격했을 당시의 권 씨처럼, 이건 완전히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팍 들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p. 165)아, 나는 모르겠다.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쌀에 대한 장인 장모의 그 병적인 집착이 조상 전래의 도령 신앙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인지 나로서는 헤아릴 재간이 없다. 옛날 우리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두 노인의 고향 재령산인 양 행세하는, 자그마치 10년씩이나 케케묵은 그 가짜배기 이북 쌀로 믿음을 다해 잠밥을 먹임으로써 아내 말마따나 장모의 회향병이 진짜로 완쾌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나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다. 만일 통일의 그날이 형편없이 늦어진다면, 만일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는다면, 만일 장모의 여생이 늦어지는 통일의 날만큼이나 오래 지속된다면, 만일 이인모 또는 리인모 노인의 송환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앞으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면 우리 장모님은 두고두고 얼마나 더 많이 회향병을 앓아야 되고, 그럴 적마다 얼마나 더 자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 아니면 이북 쌀 속에 깃들인 도령의 그 신통력에 의지해야 될 것인가.
다만,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뱃구레를 채우기 위해 입안으로 꾸역꾸역 들여보내는 단순한 음식물에 지나지 않는 쌀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쌀 아닌 그 어떤 것, 쌀 이상의 그 무엇,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혼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때로는 병을 고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슬픔을 어루만지기도 하다가 종당에는 구원마저 가능케 만들어주는, 놀라운 신통력을 지닌, 영검한 존재로, 초자연적인 존재로 매우 황감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치과 의사의 죽음」(pp. 452~53)
황혼의 집 | 집 | 엄동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땔감 |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 오늘의 운세 | 매우 잘생긴 우산 하나 | 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