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지난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타계 1주기에 맞추어 특별히 먼저 출간한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외에,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이어서 2차분으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의 중단편선을 내년 1월 선보일 예정이다.
인간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청준 중단편선 『가해자의 얼굴』
『가해자의 얼굴』(문지작가선4)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내밀한 고난을 성찰적으로 가로지르며 울창한 서사의 숲을 이뤄온 이청준의 소설 세계를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 책이다. 등단작 「퇴원」(1965)부터 수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병신과 머저리」(1966), 글쓰기에 관한 심도 깊은 고민이 담긴 「지배와 해방」(1976), 영화화되면서 또 한 번 주목받은 「벌레 이야기」(1985) 등 엄선된 11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렸다.
책임 편집과 해제를 맡은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이청준의 작품이 인물의 문제성이나 제재의 역사성도 깊지만, 무엇보다 인물과 제재를 다루는 작가의 반성적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작가가 즐겨 사용한 액자소설 방식에서 드러나듯, 그의 작품은 이야기 속 사건과 그것을 조망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통해 ‘무엇’을 향한 응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라는 방법적 고찰에 닿고자 한다. 이는 근대 이후 치유 불가능한 상실감에 시달리게 된 4․19세대의 초상이자, 그럼에도 억압적 질서에 맞서려는 자유로운 산문정신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이청준이 쌓아올린 높고도 깊은 문학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이 아무리 괴롭고 절망스럽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그런 삶을 보아야 하고, 그런 삶 속으로 함께 섞여 들어가 살아야 하는 것이 또한 숙명이니까요. 미래로든지 과거로든지 우리 인간들의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삶 속을 흐르고 있으니까요.
「시간의 문」(p. 396)
성찰적 작가 인식은 후기에 이르러 한층 더 깊어지면서 ‘가해자의 윤리’로 집약된다.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오롯이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하기 위해 타인이 아닌 자신의 허물을 먼저 인정하고 뉘우치는 전복적 인간학을 실천하는 것이다(「벌레 이야기」). “그런 뼈아픈 가해자 의식을 통해서만이 참으로 진정한 수난자의 얼굴이나 또 다른 시대에서의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깨달음은 표제작 「가해자의 얼굴」에서 가장 선명한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이처럼 작가는 험하게 일그러진 세상, 좌절과 절망이 변수가 아닌 상수처럼 넘실대는 현실 속에서 외부가 아닌 내면의 그늘부터 되짚어야만 인간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통찰한다. 고달픈 자기반성을 거듭하는 태도만이 진실한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으리라 예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청준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모두에게 요청되는 인간다움과 그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되새기는 경험이 될 것이다.
■ 본문에서
형은 언젠가 자기가 동료를 죽였다고 말했지만, 형의 약한 신경은 관모의 행위에 대한 방관을 자기의 살인 행위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형은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웠다. 언제나 망설이기만 할 뿐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였다.
「병신과 머저리」(p. 69)한 작가가 그의 이념적 세계 지배의 수단으로서 어떤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그것을 확대해나간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가 이전에 없었던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온 세계에 대한 새 시선의 발견이나, 있어온 세계에 대한 자유라는 새로운 질서의 부여 행위를 뜻할 터입니다.
「지배와 해방」(p. 246)내가 사진 찍는 일을 생각해보세요. 난 내가 찍는 사진을 당시로선 아무것도 해석을 하려 하지 않아요. 다만 사진을 찍는 것뿐이지요. 해석은 훨씬 나중의 일이에요. 사진들은 나중에 인화가 될 때 비로소 내 해석을 얻게 되고 현실의 의미도 지니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진을 찍은 일은 무엇이 됩니까. 나는 오히려 미래의 시간대를 찍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때의 내 시간은 미래의 이름으로 살아지고 있는 셈이구요.
「시간의 문」(p. 378)
퇴원 | 병신과 머저리 | 마기의 죽음 | 이어도 |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 3 | 잔인한 도시 | 선학동 나그네-남도 사람 3 | 시간의 문 | 벌레 이야기 | 가해자의 얼굴 | 지하실 | 해제 얼굴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