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지난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타계 1주기에 맞추어 특별히 먼저 출간한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외에,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이어서 2차분으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의 중단편선을 내년 1월 선보일 예정이다.
세속적인 삶의 현실을 통과하여 타인의 삶을 느껴보는 소설
서정인 중단편선 『귤』
문지작가선 세번째 책은 서정인 중단편선『귤』이다. 1962년 발표한 등단작 「후송」부터 2017년 발표한 단편 「뜬봉샘」까지, 총 13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서정인이 문학사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반세기 전 작가가 아님은 책의 마지막에 실린 「뜬봉샘」의 발표 연도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서정인의 소설 언어와 문체는 그의 작품을 거론할 때 가장 중요시된다. 1976년 발간된 소설집 『강』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은 “서정인 소설의 가장 큰 특색은 그의 문체이다”라는 말로 해설을 시작하고, 이어서 서정인 문체의 특성은 “문학 언어가 일상 언어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려는 그의 의도”라고 역설했다. 또한『강』의 1996년 신판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서정인을 “소설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탐문한 작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일상(현실)에서 쓰이는 것과는 다른 언어를 구사하여, 다시 현실(일상)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탐문하는 과정을 통해 서정인이 소설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책의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이 해제의 서두에 밝히고 있는바, 서정인 소설의 핵심은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세계의 ‘사실적인 것’을 포착하는 데 있지 않”고, “정말 사실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에서조차, 어떤 것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힘쓴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일에서든 사실적인 것 혹은 사실을 발굴하거나 탐구하는 데” 있다. 소설 속 인물이나 화자의 지각과 의식은 ‘사실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더 가까이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백지은은 “서정인 소설에서 ‘사실’이란 사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사실들”이라고 설파한다. 소설집 『가위』의 2007년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우찬제가 “서정인은 속악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형식으로 소설을 택한 작가다”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서정인이 발굴한 ‘세계의 사실들’이란 변두리 인물들의 누추한 생활과 사연들이다.
군대라는 공간에서 후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통과 어긋남을 한 개인의 내면을 통해 보여주는 첫 소설 「후송」과 시골 학교 선생들의 알력 다툼을 그린 「나주댁」, 노름꾼 남편한테 맨날 돈이나 뜯기는 술집 주인 ‘경자’의 하루를 담은 「남문통」과 오래 묵은 빚과 감정을 끝내 청산하지 못하는 이야기 「귤」, 쌀 도둑을 잡으려는 한량 남편의 계획을 보여주는 「밤 이야기」, 그리고 늙음과 죽음, 추억과 망각, 인연과 이별이 일상화된 노년의 실존을 드러내는 「뜬봉샘」까지, 인간 일반의 경험과 사태를 증언하고 그로부터 삶의 다양한 결을 사실로서 추구하려는 작가 서정인의 의지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상적 삶의 한 귀퉁이에서부터 밀착해 들어가는 소설 속 인물과 함께 세속적 삶의 현실을 통과하는 특별한 독서 경험으로, 『귤』에 실린 서정인의 대표작 13편은 독자에게 “남이 될 수 있는 힘”을 선사할 것이다.
■ 본문에서
모든 풍경은 새로워 보였다. 거울을 통해서 거꾸로 볼 때처럼 같은 세계가 또 하나의 다른 세계로 나타났다. 그의 수정체는 채색되어 있었다. 그것은 편리한 채색이었다. 각도를 달리해서 볼 때완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 보이는 대로 보는 대신에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었다. 보았던 것을 안 볼 수도 있었고, 안 보았던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풍경화가 더 진실에 가까웠는지 말하기 어려웠다. 이쪽 수정체가 젖어 있다면 저쪽 수정체는 습관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하나의 풍경에 두 개의 풍경화… 성 중위는 드문 풍경화를 보고 있었다. 하늘이 기울고 지평선도 따라서 기울었다. 확실히 지구는 움직이고 있었다.
「후송」(pp. 47~48)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가로등 없는 캄캄한 골목길을 미친 듯이 뛰어갔다. 포장된 큰길이 길가 가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그는 문득 멈춰 서서 그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30년을 하루같이 걸어 다녔던 길이었다. 지난 5년 동안의 공백도 그 길이 그에게 대해서 갖는 친밀함을 덜지 못했다. 그는 30년 묵은 옛길을 그것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새로움을 가지고 쏘아보았다.
길 건너 청과전에는 귤과 노랑, 파랑, 빨강 사과들이 탐스럽게 쌓였다. 그는 문득 손가락들을 바짝 말아서 쥐는 태권도식 주먹으로 그 과일들을 내리치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주먹을 내리치는 대신에 귤 두 개를 샀다.
「귤」(p. 223)“멋쟁이고 돈 많고 학식 많고, 왕년에는 다 알아주는 한량이었지. 거, 시키지 않고 왜 직접 부엌 출입을 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것 쉽다. 너늠마 어려운 것은 알고 쉬운 것은 모르냐? 며느리가 미안해서 그랬다. 왕년이 무슨 소용이냐? 왕년에 끗발 안 선 사람 있냐?”
“하, 그때, 일이 요상하게 될라고, 며느리가 불 켜진 것을 보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아버님, 저녁 식사 한 지가 얼마나 된다고.”
“식사라니, 거기가 군대냐? 식사 군기가 문란하냐? 왜 요즘 것들은 아무한테나 식사를 앵기냐?”
“며느리는 무심코 말했다. 그것이 아까웠겠냐? 전생에 원수 졌냐? 시아버지도 조금 무안했겠지만, 그게 뭐 어떠냐? 허, 허, 내가 널 깨웠냐? 가서 자거라. 오냐, 어서 자거라. 그러고 끝났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왜 아무 일도 아니냐? 음식 끝이 얼마나 맵고 모지다고! 한술 밥에 눈물 난다. 점잖은 노인이 음식 끝에 뽀쳤으니, 그 체면을 어쩔거나.”
“니가 남의 속을 어찌 그리 잘 아냐?”
“그것이 남의 일이냐?”
「치과 의사의 죽음」(pp. 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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