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하여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타계 1주기에 맞추어 특별히 먼저 선보이는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외에, 1차분으로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8월 말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며 문학은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문지작가선>의 첫 책,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달과 소년병』(문지작가선1)은 7월 23일 최인훈 1주기 ‘추모의 밤’ 행사에 발맞춰 선보이게 되어 좀더 뜻깊다. 최인훈 소설의 경계 없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이 책에는 등단작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와 <최인훈 전집>에 미수록되었던 표제작「달과 소년병」(1983),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온 중편 「구운몽」(1962),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반영된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 제1장」(1970) 등 총 9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렸다.
이 책의 책임 편집과 해제를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최인훈의 소설을 관념적인 것, 분단의 연대기에 한정된 것으로 좁게 읽은 기존의 평가를 바로잡는다. 그는 수록 작품들 면면에 날카롭게 드러나 있는 최인훈의 실험과 도전에 주목하면서, ‘최인훈 이후’ 한국 문학사에서의 모든 언어적 실험과 시도의 유형들 역시 나타나 있음을 짚어낸다. 그에 따르면 ‘최인훈의 소설이 무섭도록 현재적인 것은 최인훈의 실험적인 글쓰기가 장르와 형식의 문제를 넘어서 근대 소설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둘러싼 민족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주체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판․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는 행동을 거부하고 철저한 무위를 주창하는 청년 모임이 불온 단체로 오인받아 국가 권력의 개입을 통해 해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무해/무력한 공동체조차 용납하지 않은 당대 현실을 드러내는 단편소설이다. 흥미롭게도 이 (일종의) ‘한량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남성 인물들의 허위와 남성 우월주의는 여성 인물 ‘키티’에 의해 끄집어내지고 있다.
“여자들한테 그런 멋대로의 풀이를 붙인다는 건 남자들한테도 안 좋아요. 이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변히 굴겠어요. 제가 말씀해드리지요. 여자는 남자와 꼭 같이 사람입니다. [……] 왜 벌써 입센 시대부터 환해진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니, 입센보다도 숫제 사람이 만들어진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짐승이었지요.”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p. 28)
단편「국도의 끝」(1966)에서 기지촌 여성인 ‘그녀’는 같은 버스에 탄 한국 남자 취한(醉漢)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참다못해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거대한 미국 담배 조형물 쪽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제시하며 작가는 이중적으로 작용하는 당대 사회의 정치적 층위와 젠더적 층위를 드러낸다. 지배자에게서 당한 탄압과 혐오를 사회적 약자에게 내리 물림하는 방식은 소설이 씌어졌을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구태다.
한편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개인적․집단적 무의식에서 은폐된 상상적 현실을 발굴하여 “소설적 고고학”을 선보이는 ‘최인훈식’ 환상소설은 「웃음소리」(1966), 「가면고」(1960), 「총독의 소리」(1967~76), 「주석의 소리」(1968)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 비밀 조직’이 한국에 잔존한다는 역사적 가정 아래 총독의 담화를 기술하여 근대 민족 국가적 욕망을 비판적이며 풍자적으로 드러낸 「총독의 소리」는 일본과 외교무역적 마찰을 빚고 있는 이때 더욱 주목할 만하다. 독립군 소년병이 망원경 너머로 가족들을 죽인 원수인, 그러나 조국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인간이기도 한 적들을 바라보며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통해 ‘국가-제국’의 폭력을 드러낸「달과 소년병」과 함께 살펴보기를 권한다.
사회적 모순이 모습을 바꾸며 재생산되고 있기에 최인훈의 소설은 언제나 새롭게 읽힌다. 우리는 『달과 소년병』을 읽으며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며 문학은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 본문에서
그런데 여기 그의 어린 시간이 있었다. 어질머리를 어질머리로서 살 수 있는 오직 한 번의 기회로서의 한 사람의 소년의 시간. 그는 세계라는 어질머리와 자기 사이에 책이라는 완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음악처럼 읽었다. 등장인물이라는 이름의 선율들이, 그의 책의 페이지 위에서 아름다운 어질머리를 풀어나갔다. 아름다움을 남보다 더 누린 사람은 반드시 그 갚음을 해야 한다. 월남 후 그는 그 갚음을 하기에 이십 년을 허비했다. 그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슬픔이었고, 그가 어질머리라 생각했던 것이 무서움임을 알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구보에게는 이 삶은 한 견딤, 한 수고受苦였다.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p. 547)오후 망보기를 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진지를 다 끝내고 쉬고 있다. 야산에 자란 잡목 그늘에 누워도 있고, 천막 안에도 있고, 서너 명이 학교 쪽으로 걸어간다. 소년은 긴장한다. 왜병들이 울타리도 없는 운동장에 들어가서 선다. 구경을 한다. 그러더니 줄다리기에 두 편으로 갈라서 끼어들어 어울린다. 흰 이가 드러나는 왜병들과 아이들 영차영차 소리, 사람들이 와르르 흔들린다. 망원경을 잡은 손이 제 손 같지 않게 흔들리는 것이다.
「달과 소년병」(p. 576)대저 반도에 대한 제국의 전통적인 정책은 이 지역에 풍족하고 자리 잡힌 국민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고 전란과 혁명으로 지새우게 하며 그러면서도 제삼국의 손아귀에 안전히 들어가게는 놓아두지 않음으로써 반도로 하여금 사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닌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지경에 머무르게 하여 제국의 번영을 위한 울타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 반도인으로 하여금 반도인을 고달프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반도인들은 그들의 처지를 몸서리치도록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다는 것을. 죽음의 검은 그림자는 반도의 산하에서 걷히지 않았다는 것을.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금년에도 또 온다는 것을. 이런 사실들을 이들은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반도인들이 앞으로도 군비軍備의 짐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암마. 그들이 기르고 있는 엄청난 병력이야말로 반도인들의 발에 매달아놓은 쇠사슬입니다. 그들은 빈곤의 늪에서 쇠사슬에 묶여 철거덩 철버덕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군비를 낮출 수 없을 것
이외다. 더욱더 증강해야 될 것이외다. 아무리 벌어도 소용없을 것이외다.
「총독의 소리」(pp. 2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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