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것들에 대한 미지의 글쓰기
‘쓰다’의 매혹이 만드는 경계 없는 산문의 세계
문학과지성사의 새 산문 시리즈 1차분 4권 출간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출간되었다. 1975년 창립 이래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문학과지성 산문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국내외 유수한 작가들의 산문을 꾸준히 출간해왔다. 그러나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는 글들을 명징한 이름 하나로 묶어낸 것은 특별하고 새로운 시도다.
<문지 에크리>는 지금까지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유는 이 시리즈가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지 에크리>는 무엇, 그러니까 목적어의 자리를 빈칸으로 남겨놓는다. 작가는 마음껏 그 빈칸을 채운다. 어떤 대상도 주제도 될 수 있는 친애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이렇게 태어난 글은 장르적 경계를 슬쩍 넘어서고 어느새 독자와 작가를 잇는다. 완성도 높은 문학작품으로만 접해 속내를 알기 힘들었던 작가들과 좀더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가장 먼저 독자들을 찾아갈 작가로는 각 분야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온 故김현(문학평론가), 김혜순(시인), 김소연(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를 선정했다. 각각 일상에서의 비평적 시선, ‘여성’으로서 경험한 아시아 여행기, 맨눈으로 다시 바라본 사랑, 고양이로 그려낸 침묵과 고독을 담아낸 네 작가의 글은 한손에 들어오는 모던한 장정에 담겼다. 표지 디자인은 2016년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 부문을 수상한 석윤이 디자이너가 총괄했으며, 앞으로의 작업도 전담할 예정이다. 애정 어린 대상에 대한 특색 있는 사유를 담은 <문지 에크리>는 앞으로도 시인 이제니, 이장욱, 나희덕, 진은영, 신해욱과 소설가 정영문, 한유주, 정지돈 등 다양한 작가의 사소하고 비밀스러운 미지의 세계를 소개할 계획이다.
오랜 질문에서 시작된 여행의 책
우리가 모르는 우리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서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그리핀 시문학상 수상 시인 김혜순의 아시아 여행기 『여자짐승아시아하기』가 <문지 에크리>로 출간되었다. 올해 시작(詩作) 40년을 맞이한 김혜순은 여성시인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거대 담론과 남성적 세계를 향한 비명에 가까운 시쓰기를 지속해왔다. 13권의 시집에서 ‘프랙털 도형’처럼 모습을 바꾸며 무한 증식하고 확장하여 스스로 움직여온 김혜순의 시적 언어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다종다양한 답변 같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시와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일까. 김혜순의 산문 역시 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산문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과 시론집 『여성, 시하다』(2017)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왜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인가를 묻는다면, 그 기록들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적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성적 원전에 부대끼면서도,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서양적 담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사는 제3세계의 여성시인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 이 이중 삼중의 식민지 속에서 나는 여성의 언어로 여성적 존재의 참혹과 광기와 질곡과 사랑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는 현실 판단과 “여성시인의 언어는 여성시인 스스로가 자신을 이방인, 난민으로 경험, 인식하는 것, 혹은 그에 따른 학습, 사유가 있지 않고는 발화될 수가 없다”는 자기 인식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되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여성을 포함하여)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들의 모든 바깥을 ‘하기’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여행기인 동시에 시쓰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시인의 눈은 유적보다는 골목과 거리를 빼곡히 채우는 사람들에 닿아 있다. 시인이 천착해온 바리데기 설화나, 사이와 변두리의 존재들에 주목하고 이입하여 문법적인 경계를 허물어버리려는 시도들은 김혜순의 시적 여정이 어떤 식으로 이어져왔는지에 대한 힌트로 읽히기도 한다. 머리말에서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다뤄질지 간략하게 조명한다. 시인이 티베트에서 설인 예티에 대한 벽화를 보고 영감을 얻은 「눈의 여자」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찾으려고 해도 찾아지지 않는 것, 국민적 욕망의 잠재의식을 읽어보려 노력했던 흔적이다. 또한 「쥐」에서는 인도의 쥐 사원에서 발견한 인간과 쥐의 친밀함, 인간과 짐승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살펴보면서 나와 짐승의 간격을 흐릿하게 만들어 “언어적 담론과 권력에 의해 구성된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새로운 생기의 장에 도착하고자 했다. 38편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붉음」은 중국 소수 민족 마을과 몽골, 사막 등에 대한 붉고 뜨거운 기록이다. 이 글들은 또한 ‘대문자 국가’ ‘대문자 인간’을 벗어나 오히려 ‘스스로 비천하기’를 감행하는 어떤 이상한 움직임의 발견이기도 하다. 2007년경 『문예중앙』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다듬고 더했다. 10년 남짓 지났지만 쉬 바뀌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글이기 때문에 언제 읽어도 유효할 것이다.
■ 본문에서
나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로 실재하는 아시아를 여행했다. 여행은 ‘나’라는 존재가 붙박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운동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여행은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어 분산시키는 하나의 작용이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설설 끓는 솥에서 분출하여 사라지는 안개처럼, 당신의 얼굴이 사라진 다음 그 주위를 맴도는 부사처럼. 아련한 그 모습, 여자이면서 짐승이기도 한 아시아의 ‘아시아’가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느꼈다.
_「여자짐승아시아하기」(p. 14)그년/눈의 여자. 욕설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비천한 것. 여성을 동물과 동일시해버리는 것처럼, 미지의 것을 무참하게 이성을 침범하는 요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의 본모습을 하나의 여성적 화신으로 발명했다. 그러기에 감각과 의미,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한 존재자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변신을 향한 가리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그 화신이 그년/눈의 여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하대해 눈의 여자를 상스러운 ‘그년’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것일 것이다.
_「눈의 여자」(pp. 51~53, 55)나는 이곳에서 내 더러운 것이 내 더러운 것을 닦는 것을 경험한다. 내 더러움에 익사하자 내 더러움이 잠시 깨끗해진다.
_「쥐」(p. 138)
여자짐승아시아하기―책머리에
눈의 여자―티베트
쥐―인도
붉음―실크로드, 산동성, 운남성, 산서성, 청해성, 미얀마, 캄보디아,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몽골
붉은 목탑
붉은 먼지
붉은 모래 붉은 노래
붉은 모래
피눈물
붉은 경보
붉은 팥
붉은 자두
흰 식탁, 붉은 식탁
낙타하다
붉은 가위
열병
붉은 책
3단
붉은 등 디제잉
붉은 내장
노을 속에서 떠오르는 신비한 공
청바지 입은 마에스트로
땅속의 붉은 나라
꽃무늬 팬티
붉은 찻물
소녀의 붉은 뺨
해 질 녘 댄스
붉은 비단길
붉은 가사
붉은 고백
붉은 뱀
핏줄기
노스탤지어의 노스탤지어
붉은 물집
밤에 만나서 새벽에 헤어지는 부부
피의 루비
토마토
붉은 망토
똥 덩어리 부처
붉은 설치 작품을 위한 노트
총!
지독히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