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해석학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결국 타자 이해라는 에움길을 거친 자기 이해다.”
타자와 치열하게 대화하며 실천적 지혜의 길을 모색하는
리쾨르의 해석학 이론 깊이 읽기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폴 리쾨르의 지적 여정을 살피고 그가 구축한 해석학의 지형도를 그려낸 연구서 『해석의 에움길: 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문학』이 출간되었다. 폴 리쾨르는 200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하버마스, 데리다와 더불어 ‘20세기 살아 있는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인물로서 종교현상학, 언어학, 인지과학, 분석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 폭넓은 대화를 펼치며 독자적인 사유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리쾨르의 제자였던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리쾨르 곁에서 역사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기도 했다.
리쾨르는 동시대 철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지적 행보를 걸었던 학자이다. 무엇보다 그는 “대화의 철학자”로서 수많은 타자와 치열하게 대화하며 넓은 사유의 폭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대화를 통해 앎을 행동으로 이끄는 실천적 지혜의 길을 모색했다. 리쾨르의 철학은 서양 고대철학에서부터 구조주의,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기에 그의 철학 세계를 몇 문장으로 압축해 설명하기란 매우 힘들다고 여겨져왔다. 더욱이 기존의 국내 연구서들은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서이거나, 철학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주체 물음에 접근하는 것, 혹은 신학이나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악, 사랑, 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 『해석의 에움길』은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리쾨르의 대표적 저작들을 통합적으로 조망하고, 특히 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텍스트 해석학에 초점을 맞추어 조밀하게 들여다본 해설서이다. 저자 김한식 교수(중앙대 불어불문학과)는 리쾨르의 대표작 『시간과 이야기』를 국내에 번역 소개한 연구자로서, 리쾨르의 삶에서부터 그의 사상적 결실까지 끈질기게 파고들며 리쾨르와의 또 하나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 책을 통해 해석학의 여러 갈래에서부터 리쾨르 사유의 핵심 지점까지, 리쾨르 해석학의 전체 윤곽을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리쾨르,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다
『의지의 철학』부터 말년의 『기억, 역사, 망각』에 이르기까지 리쾨르의 주요 저서들은 의지와 악, 상징과 은유, 시간과 이야기, 역사와 진리, 텍스트와 행동, 주체와 정체성, 기억과 역사, 사랑과 정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의 저술 활동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5~6년 간격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이전 책에서 남겨진 문제들을 다음 책에서 이어 발전시키는 방식을 통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해석의 에움길』은 그러한 리쾨르의 저서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연대순으로, 그리고 주제별로 정리해 보여준다. 리쾨르는 칸트와 헤겔을 거쳐 야스퍼스,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 레비나스, 프로이트, 그리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철학, 영미권의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풍경들을 가로지른다. 서로 각을 이루는 사유들 사이의 긴장을 부각시키고, 모순되는 것들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충돌시키고 나서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때 다름과 차이를 배제하거나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탐사하면서 충돌 지점을 찾아내서 깊이 파고드는데, 저자는 이를 일종의 “화쟁의 방법론”이라고 평하며 주요 쟁점들을 충실하게 독해하고 있다.
리쾨르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보다 인간이 삶의 주체로서 ‘좋은 삶’을 살아갈 능력, 즉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행동을 통해 삶을 바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의 철학이 다양한 학문 분야와 폭넓은 대화를 펼치는 것도 바로 그에 대한 해석과 비판을 통해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의식을 나침반으로 삼아 개인의 내면성을 존중하면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향해 열린 철학을 지향한다. 이러한 리쾨르 철학의 전개 과정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이 책 『해석의 에움길』은 입문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문학 텍스트의 에움길을 거쳐 자기 이해에 다가가는 리쾨르 해석학의 정수
리쾨르는 상징, 은유,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통해 철학적 성찰을 펼친다. 리쾨르의 철학적 성찰에는 소포클레스,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보들레르, 프루스트 등 거의 언제나 문학이 동반자로 등장한다. 문학 텍스트의 구조적 특징은 무엇인지, 문학작품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저자의 의도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독서 행위와 관련하여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한 그 일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 묻는 것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문학 텍스트는 언어의 창조성, 즉 ‘의미론적 혁신’을 통해 현실을 다시 기술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이 문학 연구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공통된 물음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의 대가 리쾨르의 사유를 한 권으로 만나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현대 해석학과 폴 리쾨르의 텍스트 해석학」에서는 리쾨르의 삶과 지적 여정을 개관하고 서구 해석학 전통에서 리쾨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해석학이란 무엇이고 어떤 과제를 안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다른 철학자들과 어떤 영향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무엇보다 리쾨르가 설정한 문제의식은 동시대의 지적 흐름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짚어본다.
2부 「문학 텍스트의 해석학을 위하여」에서는 언어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삼중의 미메시스, 이야기 정체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리쾨르의 해석학이 문학 텍스트에 어떻게 접근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분석 방법을 제시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 해석을 통한 자기 이해라는 해석학적 과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망해본다.
3부 「해석학과 문학 연구」에서는 현대 문학 이론들을 리쾨르의 텍스트 해석학에 접목해본다. 저자-텍스트-독자의 축을 따라 이루어지는 문학적 의사소통을 전형상화-형상화-재형상화로 이어지는 삼중의 미메시스에 적용하면서 저자의 의도는 텍스트의 의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텍스트 세계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텍스트 속에서 독자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리쾨르의 지적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 상대였던 구조주의와 정신분석을 중심으로 문학 텍스트 해석을 둘러싼 쟁점을 정리한다.
■ 책 속으로
리쾨르는 죽음을 향한 결단보다는 삶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존재의 의미에 더 무게를 둔다. 나의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표상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은 때로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로 간주하고 현세의 삶 자체에만 의미를 두거나 아니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유로 이끌기도 하지만, 철학자로서 리쾨르의 소망은 소박한 종말론적 표상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죽음 이후를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내일 죽을 존재로 나 자신을 취급해서는 안 된다.” [……] 살아 있는 한 죽기 전까지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혜를 잇고자 한 그의 지적 여정은, 죽음을 앞둔 리쾨르가 쓰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죽기 전까지 살아 있는”이라는 짧은 말에 함축되어 있다. (1부 1장 「폴 리쾨르의 삶과 지적 여정」, 30~31쪽)
「악의 상징」에서 말하는 악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직관을 통해서는 인식할 수 없으며,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리쾨르의 해석학적 입장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전승된 위대한 텍스트들, 철학과 문학, 종교 등의 분야에서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텍스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간 속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경험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우리는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질서를 부여하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한다. 또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시간 경험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 유형으로 간주된다. (1부 3장 「의지의 철학에서 의지의 시학으로」, 126~27쪽)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 텍스트가 던지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일단 자기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텍스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가 던지는 물음에 나름대로 답을 찾고, 텍스트가 건네는 말을 이어가면서 텍스트를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서 텍스트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기를 빼앗기는 것이 된다. “이해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인 만큼 자기를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해석 과정에서 반성이 들어가고 반성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면서 해석은 완성된다. (2부 1장 「해석학과 언어」, 170~71쪽)
리쾨르는 특유의 변증법적 종합, 즉 더 많이 설명하는 것이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명제 아래 역사적 설명과 서사적 이해를 연결하려 한다. [……] 역사란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줄거리 구성을 통해 취사선택된 것이기에 역사적 설명과 서사적 이해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역사적 설명 그 자체가 이미 이야기 형식을 띤 담론 유형이며, 설명은 독자가 역사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할 따름이다. (2부 3장 「시간과 이야기」, 233~34쪽)
리쾨르는 미메시스 개념의 확장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비극과 서사시라는 장르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일반 이론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미메시스와 뮈토스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비극을 특징짓는 일련의 패러다임들이 서사 영역 전반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확장되었는가? 이에 대해 리쾨르는 그렇다 하더라도 ‘행동의 재현’이라는 미메시스의 의미가 완전히 충족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행동이라는 용어는 시학이 담당하는 상상력의 영역만이 아니라 현실 영역에 동시에 속하기 때문에, 미메시스는 뮈토스와의 등가성을 넘어 프락시스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메시스는 실천적 영역에서의 인간의 행동을 재현하는 것이며, 그러한 재현 행위를 통해 관객은 카타르시스라는 ‘고유의 즐거움’을 느낀다. (2부 4장 「이야기, 미메시스」, 268쪽)
지금까지 우리는 “텍스트 해석과 관련된 이해 작업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되는 리쾨르의 해석학이 구체적으로 상징과 은유, 이야기라는 문학작품 고유의 언어에 어떻게 다가가며 또 그 결실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겹뜻의 상징에서 출발하여 은유의 부적절한 주술 관계, 이야기의 이질적인 것의 종합을 통한 의미론적 혁신, 역사와 허구의 교차와 이야기 정체성 개념, 그리고 이야기 해석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삼중의 미메시스와 이야기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리쾨르는 문학을 인간의 언어 활동이라는 넓은 틀에서 사유하며 문학의 가능성을 다양한 차원에서 탐색한다. (3부 1장 「해석학과 문학, 이론과 쟁점들」, 339~40쪽)
정신분석은 욕망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수많은 증례 이야기는 바로 욕망이 담론 차원에서 만들어내는 상징이자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욕망은 스스로를 감추면서 드러내고, 그 이야기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에, 욕망의 뿌리에 다가갈 수 있다. 실제로 내담자는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즉 직접적으로 주어진 경험을 이야기라는 매개를 통해 재현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자신의 욕망에 형상을 부여한다. 그리고 분석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의미, 자기도 몰랐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난다. (3부 3장 「정신분석과 해석학」, 454쪽)
내 삶의 이야기에는 소리 없이 우리를 부르는 여러 목소리들이 뒤섞여 있다. 욕망을 부추기는 이드의 목소리도 있고, 그 욕망의 고삐를 죄는 초자아의 목소리도 있으며, 사랑으로 이끄는 에로스의 목소리도 있고, 미움과 증오로 빠뜨리는 타나토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 목소리들이 나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그런 행동들이 모여 나의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 하지만 삶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는 점에서, 나는 내 삶의 이야기의 화자는 될 수 있으나 저자는 될 수 없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삶의 이야기의 저자는 아닐지라도 그 화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 이해란 결국 나의 삶의 이야기의 화자를 찾아가는 것이며, 자기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주인공이자 화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3부 3장 「정신분석과 해석학」, 493~94쪽)
들어가며
리쾨르의 저서 약어 표기
1부 현대 해석학과 폴 리쾨르의 텍스트 해석학
1장 폴 리쾨르의 삶과 지적 여정
2장 해석학의 전통과 현대 해석학의 과제
3장 의지의 철학에서 의지의 시학으로: 리쾨르의 텍스트 해석학
2부 문학 텍스트의 해석학을 위하여
1장 해석학과 언어
2장 상징과 은유
3장 시간과 이야기
4장 이야기, 미메시스
5장 이야기와 자기 해석학
3부 해석학과 문학 연구
1장 해석학과 문학, 이론과 쟁점들
2장 구조주의와 해석학
3장 정신분석과 해석학
참고문헌
찾아보기(개념)
찾아보기(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