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무는 삶의 수수께끼
우리는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한국형 서스펜스의 최선두에서 끝없는 도약을 일궈온 편혜영의 소설집 『소년이로少年易老』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됐다. 작가의 열번째 책이자 다섯번째 소설집으로, 『밤이 지나간다』(2013) 이후 6년 만에 그간의 단편소설들을 묶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게재되면서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이끌어낸 「식물 애호」와 현대문학상 수상작 「소년이로少年易老」가 실렸다. 작가는 장편소설 『홀』(2016)로 지난 2017년 셜리 잭슨상을 수상하며, 미국 문학 시장에서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증명해낸 바 있다.
편혜영의 소설들은 마치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처럼 인물들의 눈앞에 뿌연 막을 드리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신 앞에 놓인 사건 사고들의 원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인생에 드리웠던 장막이 조금씩 걷히고 숨겨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어둠을 지워내려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편혜영의 문장과 만나 독자들을 숨 막히는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고 작품 속 추리극에 동참시킨다. 일단 발을 들이면 이 난제의 답을 찾을 때까지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 우리는 작가가, 아니 삶이 만들어놓은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깊이 모를 심연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소설의 공간에 빨려들면서 자기 안 깊숙이 숨겨둔 생의, 혹은 세계의 민낯을 만나고 느닷없이 낯선 장소, 상황, 시간 속에 던져진 자의 가위눌림과 두려움에 전율하게 된다. _오정희(소설가)
삶의 곳곳에 감춰진 고통스러운 함정에 발 하나쯤 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건 그리 큰일도 아니다. 편혜영의 단편들은 함정 옆에 세워진 작은 경고판이다. 이 경고를 읽고 당신만은 무사히 함정을 피해 가시길. _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누구 잘못이래?”
어른이 된 우리 앞에 놓인 뜻 모를 함정들
표제작 「소년이로少年易老」는 주자의 문집에 수록된 시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의 앞부분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흔히 ‘소년은 늙기 쉽지만 학문을 익히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다. 소년이 어른이 된다는 변화에 초점을 두고 보았을 때 「소년이로少年易老」가 작품집 제일 앞에 놓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이 들어버린 소년, 즉 소설 속에서 어른은 어떤 모습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편혜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삶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도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너무나도 다정하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며 그 다정함을 잃어가고(「다음 손님」), 성실히 일했을 뿐인데 속수무책으로 큰 부상을 입게 되고(「원더박스」), 용량대로 제초제를 사용했지만 왜인지 마당은 엉망이 되어버린다(「잔디」). 상상도 못 한 일 앞에서 우리는 온몸이 굳어버린 듯 당황하고, 더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결국 하나의 질문에 집착하기에 이른다. 대체 누구 잘못이냐고, 누구의 잘못으로 내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냐고.
돌아갈 곳을 잃었다. 지금 잃은 건 아니었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잃었다.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결국 잃게 될 줄도 모르고 애써 달려온 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식물 애호」 부분소영이 보기에 수만은 더 신랄하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왜 자신이 김이 사는 아파트까지 찾아가게 되었는지 하는 것 말이다. 수만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나 무책임한 행동에 피해 입은 것만 생각하느라 거래 당시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제 실수는 잊어버렸다. 일부러 상관없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명백히 다른 사람 탓이 되니까.
―「원더박스」 부분
한번 묻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이 불운을 책임질 자를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에. 누구 탓이냐는 질문에 질문을 더해보지만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답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답, 바로 이 모든 불운의 시작에 내가 있다는 것. 언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치 내가 빠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생은 우리의 다리 한쪽을 당겨 이미 준비되어 있던 함정으로 끌어들인다. 자기 자신 외에 누구도 탓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얼굴은 어둠 속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무너지는 우리의 관계들, 그 허약했던 기반에 대하여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일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 옆에는 그들의 허우적거림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누구 잘못이냐고 묻는 수만 옆에 “그렇다면 나는 누구 잘못으로 종일 간병을 하느냐고” 되묻는 소영(「원더박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처남의 잘못을 왜 변호하고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명(「개의 밤」), 유준의 집이 망해가는 걸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목격한 소진(「소년이로少年易老」)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 ‘지켜보는 자’들 역시 삶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대신 우리가 잃은 것을 생각했다. 그것을 어떻게 되찾을지 궁리하고, 못 찾는다면 없는 채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했다.
남편에 대해 잘 알 만큼 오래 살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는 남편이 상대와 화제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5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나를 툭 치고 가는 임시교사에게 분노를 느끼는 인간이 될 줄 몰랐다.
―「잔디」 부분
그것은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관계에 대해 너뿐 아니라 나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깨달음에서 온다. 때때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을지언정 안정적이고 잔잔한 나날이 대부분이었던 인생에 감당하기 어려운 폭탄이 터졌을 때 우리 사이를 지탱하고 있던 많은 것들은 한번에 무너져 내린다. 나 때문에 누군가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상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 오로지 거기에 몰두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이 주는 서늘함은 아마도 단순히 서사의 미스터리에서 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 관계가 단숨에 엉망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앞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서 온다.
다시 「소년이로少年易老」로 돌아와본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혼란스러움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나이에, 유준과 소진은 단숨에 어른이 된다. 비정한 비밀을 감춘 채 혹은 사악한 함정을 파놓은 채 삶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사실 우지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쓰러진 충격이 상당한 와중에도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주기는 했다. 나를 마음 편히 보내주려는 윙크. 우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지.
“다행이야, 87일밖에 안 걸려서.”
_「우리가 나란히」지속적으로 누군가를 폭행하는 사람이 된 것은 처남의 선택이었다. 과거와 상관없이 처남은 후임을 폭행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후임과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둘 중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선택해서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_「개의 밤」유는 누워 있는 아버지를 안았다. 가느다란 여러 개의 호스가 방해되었지만 여전히 품이 따뜻했다. 미약하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유의 박동과 비슷한 간격이었다. 유는 누군가 안을 때면 사람마다 박동의 간격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는데, 아버지와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자 할 만큼 했다는 형의 말에 아무 반박도 안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_「월요일의 한담」종종 문자메시지에서 본 욕설이 떠오른다. 담당자와 통화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볼 때, 길에서 어떤 남자가 툭 부딪히고도 사과하지 않고 가버릴 때, 계산하려고 내려놓은 물건을 슈퍼마켓 계산원이 무심코 바닥에 떨어뜨릴 때, 그럴 때면 욕을 욱여넣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_「잔디」나는 눈을 감고 남자의 주먹을 받아냈다. 비로소 오래전부터 두려워하던 일, 내가 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아니라 동시에 두 사람 모두가 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남자가 주먹질을 멈추고 내게 인사했다.
먼저 가보겠네.
_「다음 손님」
■ 작가의 말
어쩐지 잘 써지지 않아 계속 품고만 있는 소설의 제목이 몇 개 있다. 아파트먼트, 우리들의 실패, 홀리데이 홈, 노인일쾌사, 사월의 첫 입맞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같은 것들. 노래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오페라에서 얻은 것도 있다.
이 책에 “우리들의 실패”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다. 우연에 미숙하고, 두려워서 모른 척하거나 오직 잃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그랬다. 하지만 아픈 사람들이 많은 소설이어서 실패라는 말을 나란히 두기 힘들었다.
앞으로 쓸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기다려왔다.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번째 책이다. 처음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생각지 못한 차례의 책. 곁에 있는 사람들의 배려로 계속 쓸 수 있었다. 책을 내주신 문학과지성사에, 책의 모양새를 단정히 만들어준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책을 묶는 일에 시간을 끌었는데, 그러면서 단편소설 쓰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랐던 것도 아닌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2019년 4월
편혜영
소년이로少年易老
우리가 나란히
식물 애호
원더박스
개의 밤
잔디
월요일의 한담
다음 손님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