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종교에 비친 근대의 출발과 와해!
파스칼의 『팡세』에서 카프카의 『성』까지
문학평론가와 신학자가 펼치는 열여섯 편의 강론
“문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위대한 작가들의 경전적인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는
모순에 가득 찬 근대 종교사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한스 큉과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발터 옌스가 근대 개막 이후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탐구한 열여섯 편의 강론을 담은 『문학과 종교』가 독문학자 김주연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문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근대와 더불어 종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서양 문화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의해 규정되어왔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와 사회, 교회와 신학에 대한 새로운 파라디그마가 탄생한다. 중세적 통일성이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새로운 가치관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점차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 책은 파스칼에서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작가들의 경전적인 작품들에 드러난 복잡하지만 생생한 그리고 모순에 찬 근대 종교사를 주시한다. 절대자와 대면한 인간의 모습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여덟 명의 작가들을 두고 벌이는 신학자와 문학자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따라가보자.
“인간은 신 없이 살 수 있는가?”
신앙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벌인 담론들
이 책은 파스칼의 『팡세』에서 그리피우스의 『시』, 레싱의 『현자 나탄』, 횔덜린의 『찬가』, 노발리스의 『기독교와 유럽』,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훈련』,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프카의 『성』까지 여덟 명의 작가와 여덟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그리고 근대가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이 책은 문학과 종교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호성, 양면성, 불화스러운 일치, 상호 조명, 변증법이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터인즉, 긴장스럽고도 두려운 관계.” 문학과 종교는 비록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이지만,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공멸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저자들은 갖고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근대 계몽주의 이후 생겨난 것으로 파악되는데, 큉은 그것이 “한때 여왕 같은 세도를 누렸던 종교가 이제 하녀, 별 권리 없는 국외자”가 됨으로써 유발된 것으로 본다. 서양의 경우 종교, 즉 기독교는 근대 이후 경홀히 취급되다가 무시되고 경멸당하고 마침내 추방되는 형세에 이른다. 그러나 세속의 무종교성 때문에 종교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새롭게 깨어났다고 그는 이해한다. 영성이탈은 종말로 이어지지 않고 영성쇄신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근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파스칼은 수학자이자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근대의 정신을 탁월하고도 독창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었지만, 사후에 발견된 『팡세』는 “기독교의 진리성”을 옹호하는 거대한 호교론이었다. 이렇듯 중세와 근대의 파라디그마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파스칼로부터 근대의 와해 속에서 등장해 “인간이 신 없이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암흑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려 했던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귀감적 작가들의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어왔는지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야누스처럼 양면적인 풍부한 대립을 안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문학이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모순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래의 문학: 위대한 신학과 위대한 미학의 새로운 결합
오늘날 근대의 각각의 국면을 거쳐 온 위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레싱의 에토스와 비판적 신앙심에, 횔덜린이 선포한 새로운 하느님 이해에, 노발리스의 평화의 비전에, 교회와 국가 속에 존재하는 전체주의와 대심문관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항의에 더 귀를 기울인다면 세계는 달라질 수 있는가? 또 우리 시대의 문학과 종교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문학과 종교는 많은 경우 극심한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참다운 종교, 위대한 문학은 결코 다른 자리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음을 이 책은 논증한다. 사제 서품을 받은 신학자이지만 교회의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는 등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다 가톨릭 교수직을 박탈당한 복잡한 이력을 갖고 있는 한스 큉과 전후 독일의 유력한 문학그룹인 ‘47년 그룹’의 멤버였으며 이후 텔레비전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소설가 발터 옌스는 각각이 신학과 문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큉이 신학에 더 비판적인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옌스가 더 종교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문학과 종교가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며, 이 둘이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래에 새로운 문학, “위대한 도약”을 감행한 문학이 탄생할 것이며, 그 문학 속에서 위대한 신학과 위대한 미학이 모범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본문 속으로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파스칼 시대에 세계와 사회, 교회와 신학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델에 대한 새로운 파라디그마의 계기가 주어졌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신학과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왔다. 급속도로 “세속화하는” 세계로부터, 교회와 신학의 후견에서 “해방된” 사회로부터 온 것이었다. [……] 17세기까지 서양 문화는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의해 규정되고 관철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정신생활은 교회와 관계없이(교회가 칸막이를 쳤으므로) 전개되었고 점점 교회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흔히 말하듯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13~14쪽)
그러나 이 근대적 파라디그마의 “일급 개혁자들” 가운데서 파스칼이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예리하게 인간에 대한 중대 결론을 도출해냈고, 인간의 근본적 상반 감정을 비할 데 없이 명료하게 분석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 성격의 양면성을 모든 가능한 상황·관습·우연성 속을 파고들면서 냉정하게 묘사했다(그는 이미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니체, 프로이트와 카프카에 앞서 심리적으로 이 문제를 들추어낸 사람이다). 파스칼은 “반론으로 진실을 제기하는” 사상가, 탁월한 변증가였다.(21쪽)
물론 뒷장에서 더욱 상세히 다루어지겠지만,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사르트르 또한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친 파스칼보다 결코 더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인간이란 무슨 망령된 것인가! 무슨 신발명품이며, 무슨 괴물이며, 무슨 혼란이며, 무슨 모순의 주체이며, 무슨 놀라운 것인가! [……] 진리의 관리인이자 불확실성과 오류의 하수구다. 이 세계 모든 것의 영광이자 쓰레기이다.” 이런 마당에 철학은 무엇일 수 있는가? 여기서 철학은 도대체 끝장난 것은 아닌가? 사실상 파스칼에게 이런 점에서 완전히 놀라운 전기轉機가 생겨났다. “교만한 인간아, 너 자신이 얼마나 역설적인지를 인식하라.” 인간에게 모순의 해결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인간은 자기를 능가하는 다른 어떤 것을 촉구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지상의 요청임이 분명해진다.(23쪽)
레싱은 드라마나 신학 분야에서도 혁명가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옛것을 노련하게 이용하는 개혁자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누구보다 훨씬 과도기에 있음을 의식한다. 즉, 온 인류와 함께 “완전한 계몽주의” “완성의 시대”로 가는 도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 완성의 시대에 인간은 선을 행할 것이다. 선은 보답받기 때문이 아니라, “선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싱 자신은 최후에 머리와 가슴 중 무엇에 의존하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 확실한 것은 이 『나탄』의 시인이 자신의 청년 시절 꿈들에 충실했고, 자유재판에 의해 명예를 박탈당해 감금되어 있다가 레싱 자신의 중재에 의해 구제되었던 한 유대인의 품에서 겨우 52세에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123쪽)
[……]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열려 있다. 완성되어 있지 않으며 변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심리학 도식에 일치되기를 거부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능력, 알려져 있지 않던 면모를 드러내는 능력,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 자기 배후로 물러날 수 있는 능력, 타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오늘은 신이었다가 내일은 악마가 될 수 있는 능력, 여기서는 냉소가였다가 저기서는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능력, 이 같은 놀라운 힘이 바로 자기 성격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33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기도의 형식이다. 광기에 이르기까지 몰고 가는 사냥, 내면의 최후의 한계를 향한 돌진이다. 왜? 카프카의 관심사는 그 지평 내에서는 질문이 있을 뿐 어떤 대답도 없는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시적으로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미결 상태다. 아무리 사소한 존재에게도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명제,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는 다만 인물들에게만 타당했던 이 명제가 카프카에 이르면 텍스트의 모든 세부에까지 통용되는 명제가 된다.(402쪽)
예수와 도스토옙스키, 신학과 문학, 양자는 부조화의 조화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이 부조화의 조화의 폭과 다가치성을 규명하는 것이 지금까지 여덟 작가의 초상화를 그려온 목표였다. 야누스처럼 양면적이고 풍부한 대립을 안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문학의 가능성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타자” “최후의 근거” “무제약자”를 시야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 시야가 인간을 세상에 붙잡아두지만 인간에게 불투명한 채로, 양가성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암흑의 심연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오직 문학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410쪽)
머리말
제1장 블레즈 파스칼, 『팡세』
한스 큉: 근대의 개막과 종교
발터 옌스: “확실성! 확실성!”
제2장 안드레아스 그리피우스, 『시』
한스 큉: 종교개혁 파문과 종교
발터 옌스: “칼이 쟁기로 바뀌고”
제3장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현자 나탄』
한스 큉: 계몽주의 과정과 종교
발터 옌스: “예로부터 나탄과 나는 한마음”
제4장 프리드리히 횔덜린, 『찬가』
한스 큉: 고대문화와 기독교의 화해로서의 종교
발터 옌스: “그리고 평화를 바라보라”
제5장 노발리스, 『기독교 혹은 유럽』
한스 큉: 낭만주의 시정신에 비친 종교
발터 옌스: “포연 어린 전장의 평화대동제”
제6장 쇠렌 키르케고르, 『기독교 훈련』
한스 큉: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종교
발터 옌스: “지금, 수많은 순교자가 필요한 때”
제7장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한스 큉: 무종교 항쟁과 종교
발터 옌스: “그러나 나는 보리라, 피살자가 부활하여 살해자를 껴안는 것을”
제8장 프란츠 카프카, 『성』
한스 큉: 근대의 와해와 종교
발터 옌스: “인간을 타락시키지 말라”
꼬리말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 문학과 종교, 멀리 떨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