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1월 1일 | ISBN 9788932034959

사양 변형판 128x205 · 189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이해하기 전에 느껴지는 고백과 독백들
여백에서 태어난 세상 모든 목소리의 시

 

이제니의 세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 문학과지성사의 새해 첫 책으로 출간되었다. 두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후 5년 만이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시인은 “어제의 여백”을 돌(아)본다. 상실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들, 오래 품고 있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은 이제니의 시에서 문장들 사이사이 문득 끼어드는 ‘어떤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그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사람, 헤쳐온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시인은 위로하듯 받아쓴다, 자신 안에 있는 자신과 자신 아닌 모든 목소리를. 담담하게 숙성된 61편의 목소리들을 하루에 한 편씩 읽어보길, 아니 ‘들어보길’ 권한다.

이 시집은 다성多聲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흘려 쓴 것, 그러니까 시인이 무언가를 겨우 포착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를 주저하면서 써나갈 때 오히려 텍스트 위로 당도하는 무엇. 그것을 기록하려 할 때 목소리는 비로소 탄생한다. 목소리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여백’을 통해 드러난다. 어떤 마음도 어떤 감정도, 어떤 절망도 어떤 슬픔도, 어떤 비극도 어떤 애도도, 어떤 기억도, 과거도, 미래도, 현재조차도, 목소리 속에서, 목소리에 의해, 발화의 반열에 올라선다._조재룡(문학평론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가.”
흔적에서 피어오른 겹겹의 목소리

 

사라진 것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흔적조차 흔적을 남긴다. 어제의 자리에서 어제의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듭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부분

이제니 시의 목소리들은 어제의 마음에서 태어났다. 되돌아볼 때 발견하는 감정이 있다. 시간이 지난 뒤 비로소 돌보고 돌아보려는 생각이 들어, 미처 못 했던 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쓴 시들은 누군가의 목소리와 그가 지금껏 겪어온 그 모든 사람과 삶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울음 같기도 물음 같기도”(「부드럽고 깨어나는 우리들의 순간」) 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목소리” “들리지 않으면서 들려오는 목소리”(「수풀 머리 목소리」)들에 시인은 오래 귀를 기울인다. “굴절된 시간을 통과한 빛과 어두움에 관한 것”들로 “다시 쓰는 마음의 음보”인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더럽혀지고 덧입혀졌는데도.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다시 일어서고 있는” 고백의 문장들로 가득하다(「발화 연습 문장―남방의 연습곡」).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 당신의 문장으로 무엇을 왜곡시켰습니까.”
점선으로 분명해지는 어제의 마음

 

흔히 ‘시적’이라 일컫는 함축적인 비유가 담긴 문장 한 줄은 가끔 의미 바깥만을 맴돌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히려 낱말 자체의 의미가 아닌 낱말들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문자의 표정”(「떨어진 열매는 죽어 다시 새로운 열매로 열리고」)을 관찰하면서,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을 부딪칠 때 생성되는 낯선 효과를 실험하려 한다. 건조하고 일상적인 문장들 사이사이로 문득 끼어드는 ‘목소리’는 “함축을 위한 문장을 버렸을 때 다시 들려”(「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온다.
“더 이상 많은 낱말과 낱말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더는 숱한 비유와 비유로 문장을 꾸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뒤늦게 알아차렸으나. 심연을 향해 나아가듯 같은 낱말이 또 다른 뜻으로 너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너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고.”(「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그래서 낱말은 시적으로 익숙한 의미를 벗어나 중의적으로 쓰인다. 시 곳곳에 단호하게 찍힌 마침표는 문장들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강세로 사용되어 앞 문장 혹은 뒷 문장과 호응하면서 흐름을 만든다. “점선과 점선들로 분명해지는 어제의 여백이 있다.”(「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이제니의 시에서 문장들은 시작점과 마침점이 분명한 실선이 아니라 흐릿한 점선이 되어 서로를 겹쳐 잇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임의의 선분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분 너머로 이쪽과 저쪽이 생겨났으므로. 각각의 자리에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부분

이번 시집에서 이제니는 줄곧 다시 시작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시집 후반부의 시 열세 편에는 모두 “발화 연습 문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시들에서는 내면의 불안을 들여다보는 화자가 등장한다. 처음 배우듯 말을 낯설게 대하고, 나 자신과 혹은 내 안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로 자아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문장을 변주해나가면서, 말의 운동을 통해 이제니의 시는 자체적인 의지를 드러내며 생명력을 얻는다. 시인은 붙잡아두려는 순간 이미 빠져나가는 고양이 같은 말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말의 운동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바꾸면서 전진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런 ‘발화 연습’ 문장의 결과로 생성되는 ‘목소리’는, 어떤 고통과 절망과 어둠에도 담길 수 있으며 개인의 상처와 비극에 대한 애도를 불러낸다. 처음부터 다시, 느리더라도 정직하게 움직이는 것이 이제니가 택한 방식이다. “한 걸음에 하나씩. 너는 지금 발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지금 발화 연습 문장을 쓰고 있다고 했다. 노래가 되지 않으려는 읊조림처럼. 단속적인 말의 속도로.”(「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시집 속으로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남겨진 것 이후에」 전문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도처에 도사린 어제의 구름. 물보다 묽은 오늘의 묵음.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으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두 손으로.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부분

 

너는 밤의 간격과 낮의 입술로 이쪽 의자에서 저쪽 의자로 다시 옮겨 앉는다. 너를 흔들어 깨우러 오는 말을 보고 싶다고 쓰면서. 울면서 넓어지는 마음을 만나고 싶다고 쓰면서.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너는 지금 발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지금 발화 연습 문장을 쓰고 있다고 했다. 노래가 되지 않으려는 읊조림처럼. 단속적인 말의 속도로. 어디선가 단선율로 흐르는 축복송이 끼어든다.
―「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부분

 

당신도 돌의 얼굴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돌의 주름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돌의 표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때로 부드러운 미소로 비치기를 바랍니다. 우는 얼굴이라면 우는 얼굴 그대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슬픔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언덕을 떠나지 않는 목소리의 말 없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발화 연습 문장―떠나온 장소에서」 부분

 

■ 뒤표지 글

부서지며 사라지는 윤슬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처럼. 눈멀어가는 마음으로 무한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자각하게 될 때. 그렇게 순간의 빛으로 현현하는 죽음의 한순간 속에서. 누군가의 울음인 듯 내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어. 무한의 표면을 만질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목소리의 질감으로 가만가만히 펼쳐지겠지.

 

■ 시인의 말

이제 나는
손을 하나 그리고
손을 하나 지우고

이제 나는
눈을 하나 그리고
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지웠다고 하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미웠다고 하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제 나는 깊은 밤 혼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는데
나를 울게 하는 것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다.

오로지 달빛
다시 태어나는 빛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2019년 1월
이제니

목차

시인의 말

남겨진 것 이후에
흑곰을 위한 문장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나무 식별하기
구름에서 영원까지
푸른 물이다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흐른다
동굴 속 어둠이 낯선 얼굴로 다가온다
부드럽고 깨어나는 우리들의 순간
또 하나의 노래가 모래밭으로 떠난다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
어제와 같은 거짓말을 걷고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떨어진 열매는 죽어 다시 새로운 열매로 열리고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
나뭇가지처럼 나아가는 물결로
멀어지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꿈과 현실의 경계로부터 물러났고
조그만 미소와 함께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노래하는 양으로
밤에 의한 불
너의 꿈속에서 내가 꾸었던 꿈을 오늘 내가 다시 꾸었다
한 자락
고양이의 길
나무장이의 나무
모자와 구두
언젠가 가게 될 해변
풀을 떠나며
나무 공에 의지하여
작고 없는 것
수풀 머리 목소리
처음의 양떼구름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꿈과 꼬리
하얗게 탄 숲
피라미드와 새
풀이 많은 강가에서
가장 나중의 목소리
열매의 마음
나무는 잠든다
남아 있는 밤의 사람
우리는 밝게 움직인다
새들은 어서 와요
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발화 연습 문장—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발화 연습 문장—어떤 고요함 속에서 곡예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리는 밤
발화 연습 문장—남방의 연습곡
발화 연습 문장—모두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발화 연습 문장—외톨이 숲을 걸어가는 이웃 새
발화 연습 문장—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한다
발화 연습 문장—떠나온 장소에서
발화 연습 문장—석양이 지는 쪽으로
발화 연습 문장—몰의 말
발화 연습 문장—황금빛 머리로 숨어 다녔다
발화 연습 문장—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발화 연습 문장—두번째 밤이 닫히기 전에

해설
목소리의 탄생・조재룡

작가 소개

이제니 지음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가 있다. 편운문학상, 김현문학패,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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