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 지구에서 상상 초월 사건들을 만나다
정답이 없는 고민에 빠진 아이들의 아주 특별한 선택!
“지구의 운명이 저에게 달렸다고요?”
현실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캐릭터로 10대 청소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며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놓치지 않는 작가 김혜정의 소설집 『지구를 안아줘』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청소년 문학에서 단편소설이 많지도 않거니와, 김혜정 작가도 여러 명의 작가가 참여한 공동 저서에 단편을 실은 적은 있지만 자신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을 출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구를 안아줘』는 장편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김혜정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과 경쾌한 문체, 개성 있는 캐릭터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강렬한 에피소드와 반짝이는 사유 그리고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오랜 여운을 남기면서 단편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김혜정은 누구보다 청소년의 고민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작가다. 이러한 모습은 작가가 펴낸 다수의 청소년 소설과 동화, 에세이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시시한 어른이 되지 않는 법』과 『고민해서 뭐 할 건데?』처럼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에세이에서, 작가는 청소년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절한 상담자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일까. 『지구를 안아줘』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도 청소년들의 다양한 고민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고민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키스를 할까, 말까? 화성에 갈까, 말까? AI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내일로 넘어갈 수 있을까? 폐허가 된 지구에서 교실에 갇힌 채 공부만 해야 할까? 지구의 운명을 끝낼까, 말까? 하지만 실제 청소년들의 고민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문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보면, 지금의 청소년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작품 속 아이들의 선택이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8년 우리에겐 조금은 낯선 환경에서 펼쳐지는, 그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여섯 개의 이야기. 김혜정 작가가 빚어낸 예측불가한 지구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만 열일곱 생일 전까지 키스를 해야 한다면?
화성행 편도 티켓이 주어진다면?
AI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오늘이 매일 반복된다면?
폐허가 된 지구에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면?
「키스 바이러스」는 만 열일곱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윤아에게 엄마와 아빠가 빨리 키스를 하라고 채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학교에 가도 온통 키스 이야기뿐이다. 특히 윤아처럼 태어나자마자 TAT 주사(감기 백신)를 맞은 고2 학생들은 생일이 있는 달 1일이면 상담실로 불려가, 우회적으로나마 키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게 모두 키스 바이러스 때문이다. TAT 백신에 의해 침투한 바이러스가 신체 나이 만 17세에 분비되기 시작하는 성장호르몬과 반응하여 이상행동을 나타내는 것. 그 이상행동이란 비 오는 날 자기도 모르게 미친 사람처럼 막 웃으면서 빗속을 뛰어다니는 것인데, 그때만큼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이 알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통제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 참사를 피하기 위해 키스를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는 윤아. 윤아의 키스는 성공할 수 있을까?
「화성에 갑니다」에는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선빈이 등장한다. 대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군대 갈 걱정에다 취업할 걱정까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추첨 운이라곤 단 한 번도 따라주지 않았던 선빈에게 일생일대 행운이 찾아왔다. 화성인 프로젝트 MARS-X에서 대한민국 대표 화성 이주인으로 선발된 것. 그런데 이주 준비를 해나가는 선빈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아빠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으로,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는 선빈의 화성행을 거세게 반대하기 때문이다. 보장된 미래와 불투명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지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선빈은 무사히 화성행 우주선에 몸을 실을 수 있을까?
「수리 7호」는 중학교 1학년생 연주와 연주의 반에 보급된 교실 도우미 로봇 수리 7호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재희와 같은 반이 된 연주는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늘 혼자 지낸다. 외톨이 연주에게 수리 7호의 손길은 사람인 다른 아이들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수리 7호 덕분에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연주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매뉴얼대로만 행동하는 수리 7호에게 상처를 받게 되는데…… 과연 연주와 수리 7호는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완벽한 오늘」의 범준은 전날 반 아이들과 함께 논리 선생님에게 무례한 장난을 친 것을 오늘까지 부모님께 말해야 하는 일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함께 장난을 친 반 아이들은 모두,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제 논리 시간에 벌어진 일이 똑같이 반복되었다. 범준은 어제 일이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매일매일 똑같은 날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아무도 범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범준과 같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전학생마저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아이들처럼 변하고 마는데…… 범준은 출구 없는 오늘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최후의 교실」은 제목처럼 대지진으로 원전이 폭발해 폐허가 된 지구, 그곳에 세워진 교실이 배경이다. 지구의 위험 상황을 대비하여 전 세계 스무 개의 국가에서는 지하 깊숙한 곳에 교실을 만들었다. 지구가 폐허가 되었을 때 지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건 ‘교육’이라는 믿음에서이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각국의 표본이 되는 보존 학생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각자 자기 나라의 교육을 받고, 그것을 대대손손 물려줘야 한다. 서윤은 착오로 이 교실에 오게 된 아이다. 같은 학교의 성과 이름이 같은 모범생 김서윤이 왔어야 할 곳이었던 것. 어쩔 수 없이 이곳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서윤은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 공부는 해서 뭘 할 건지, 바깥세상은 정말 위험한 건지.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나라 아이들과 출구를 찾는 서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구를 구하겠습니까?」의 주인공 재인은 친구의 남자친구를 홀렸다는 오해를 받아 전교에서 따돌림을 받는 처지다. 그런데 어느 날 재인에게 한 여자가 나타나 지구 연장 결정자로 선택되었다는 이상한 말을 건넨다. 여자는 지구생명결정센터 아시아 권역 팀장 ‘수이드.’ 그의 말에 따르면 종말론이 있던 시기마다 지구생명결정센터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전 세계 99명이 지구의 생명을 연장할지 말지를 투표로 결정했고, 이번에 재인이 99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 O X 표시가 있는 플라스틱 카드를 건네받고 고민에 빠진 재인 앞에 전학생 유미가 나타난다. 전교생으로부터 따돌림 받는 재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유미. 유미는 지구의 생명을 연장할지, 끝을 낼지 고민하는 재인의 고민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구라는 행성 그 자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여섯 편의 작품 속 아이들에게 이 지구는 가혹하기 그지없다. 키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화성행을 뛸 듯이 기뻐할 정도로 지구에서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학교생활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고, 매일매일 똑같은 날이 반복되고, 대지진으로 원전이 폭발해 폐허가 된 지구에서 살아남았지만 학교에 갇혀 공부를 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고, 오해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찾아온 이러한 위기와 고민의 상황은 결코 아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는 지구가 그렇게 돌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선택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다. 각 작품 안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결코 녹록지 않기에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쉽게 도망치지는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이들의 선택이 지구를 향해 있다는 것. 조금은 엉뚱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뭔가 잘못되기도 하는 아이들의 상황은 마치 내 맘대로 굴러가지 않는 지구와 닮았다. 각각의 소설 속 아이들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뛰어들어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독자들도 슬쩍, 그 아이들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 와락, 안고 싶어질 것이다.
김혜정 작가는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선택’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어른이 될 준비를 하게 된다고 말이다. 하여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청소년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만약 나라면?’ 하고 함께 고민해”주는 것이다.
■ 책 속으로
“아빠, 내가 여기서 뭐 하며 살 수 있을 거 같아? 나, 하고 싶은 게 없어. 좋아하는 것도 없고.”
이 말을 하면서 선빈은 서글퍼졌다. 자신의 현실을 이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해본 건 처음이다. 선빈은 왜 자신이 화성에 가야만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화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곳에서 개척자가 될 거 야. 지구는 저무는 해라고. 거기 지을 예정이라는 타운하우스 시설 안 봤어? 완전 최신식이야. 그걸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_「화성에 갑니다」에서연주는 폭,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다. 종종 연주는 수리 7호가 “사실 나 사람이었어” 하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러면 연주는 그럴 줄 알았어!라며 당황하지 않고 하하 웃을 자신이 있다.
“뭐, 괜찮아. 네가 로봇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어.”
연주는 넌 내 친구니까, 라는 말은 입에 넣어둔 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수리 7호에게 직접 하는 건 너무나 쑥스럽다.
_「수리 7호」에서“어쨌든, 매일이 반복되는 게 맞다는 거지?”
범준의 물음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몰라? 도대체 왜 아무도 모르는 거냐고.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범준은 그간의 답답함을 시안에게 토로했다.
“매일이 똑같으니까. 우리 일상은 그래. 어차피 어제든 오늘이든 내일이든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다들 눈치채지 못하는 거야.”
_「완벽한 오늘」에서이곳에서의 생활은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침 7시에 일어 나 아침밥을 먹고 8시까지 교실로 간다. 0교시 보충 수업을 하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계속 수업이 이어진다. 그리고 저녁에는 야간 자율 학습을 10시까지 한다. 담임이 직접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고, 나머지 과목은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 과제도 있고, 심지어 시험도 본다고 했다. 서윤은 지구가 초토화되었는데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담임은 그렇기에 해야 한 다고 했다. 서윤은 바깥에서 했던 것처럼 수업 시간에 딴짓도 하고, 엎드려 자기도 했다. 하지만 나머지 세 명은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수업을 들었다. 과제를 하지 않는 건 서윤뿐이다. 담임은 서윤을 불러, 왜 다른 아이들처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바깥에서 지내던 것과 똑같이 하라면서요.”
_「최후의 교실」에서“지구의 운명이 저에게 달렸다고요?”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갑자기 심장이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수이드는 내 결정에 따라 곧바로 진행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신기하게도 이제까지 살아왔던 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나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끝나는 거라면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오히려 잘됐다. 아무것도 모른 채 종말을 맞이할 새롬과 미어캣과 WHO를 생각하니 고소하다는 생각도 든다.
“결정했어요?”
수이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_「지구를 구하겠습니까?」에서
키스 바이러스
화성에 갑니다
수리 7호
완벽한 오늘
최후의 교실
지구를 구하겠습니까?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