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동지한테 마누라가 둘이라는 게 사실인가요?”
사랑하기에 멈추지 않는 조국에 대한 독설
KGB의 타깃이 된 풍자작가 보이노비치의 대표작 최초 출간
러시아 문학사에서 고골, 살티코프-셰드린을 잇는 대표적 풍자작가이자 자먀틴을 잇는 반유토피아 작가로 평가받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Войнович(1932~2018). 스탈린 체제하 소련의 부조리를 풍자한 그의 대표작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Жизнь и необычай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солдата Ивана Чонкина』(대산세계문학총서149)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사상이 개인의 삶을 옥죄던 냉전 시대는 소련의 예술가들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보이노비치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주도한 짧은 해빙기에 소련 문단의 유망주로 데뷔해 승승장구하다가, 1960년대 중반 문화예술계의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이 다시 시작되면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 우화에 등장하는 ‘바보 이반’을 차용해 스탈린 체제하 소련을 그린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하 『촌킨』)이 지하 출판에 이어 서방에서 출판되고, 보이노비치가 반체제 인사 탄압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 역시 반체제 인사로 분류됐다. 그는 감시와 협박에 시달리고 심지어 KGB의 독살 시도까지 뒤따랐으며, 끝내 국외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보이노비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펜을 꺾지 않고 부조리한 체제와 그 체제가 낳은 개인들의 위선에 끊임없이 성내고 대들며 소련 사회와 온갖 군상을 기록했다. 한 편의 부조리극 같은 현실을 코믹하지만 신랄하게 풍자한 『촌킨』은 보이노비치의 삶과 문학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건드릴 수 없는 자’-‘어쩌다’ 영웅, 이반 촌킨
1941년 독일이 침공하기 직전의 소련. 크라스노예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군비행기 U-2가 불시착한다. 군사령부는 비행기를 견인해 올 수가 없자 병영에서 다른 병사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여분(?)의 사병 이반 촌킨을 보초로 세운다.
이상적인 전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볼품없고 어리숙한 병사 촌킨은 마을로 파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박하지만 강인한 우편배달부 뉴라와 살림을 차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군에서는 촌킨과 비행기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린다. 불행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영영 잊어버렸을 노릇이다. 뉴라의 암소가 열정적인 아마추어 육종학자인 이웃 글라디셰프의 토마토-감자 잡종 식물 표본을 깡그리 먹어치우자 복수심에 불탄 이웃은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 지부에 촌킨이 탈영병이라고 음해하는 투서를 보내고, 엔카베데는 대중의 경각심에 곧장 응답해 행동을 개시하지만 탈영병을 체포하기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촌킨과 뉴라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촌킨 일당’을 체포하는 데 소련군 1개 연대가 동원되기에 이른다.
경직된 소련 사회의 패러디
“나는 촌킨을 바보로 구상하고 쓰지 않았다. 단지 그는 정상인이라도 충분히 바보가 되고야 마는 바보 같은 상황에 처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소련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_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
보이노비치는 『촌킨』에서 부조리극 같은 소련 사회를 작정하고 풍자한다. KGB의 전신인 엔카베데의 지부장 밀랴가의 우습다 못해 처연한 에피소드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비밀경찰에 대한 본격적인 풍자다. 토마토와 감자가 한 그루에서 열리는 완벽한 품종의 개발에 몰두한 아마추어 식물 육종학자 글라디셰프는 새로운 품종에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만 실제로 그가 만들어낸 것은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를 가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연변이다. 집단농장에서는 보고서의 실적을 뜯어고치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지역 당지도부는 ‘자발적 집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미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다시 모은다. 그런가 하면 ‘불을 붙인 후 던지라’는 명령이 없었기에 불 없이 날아간 소련 군대의 화염병은 맞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인물들은 읽는 이에게 실소를 자아내나 그것이 당시 소련의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독자들은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 당황하게 된다. 보이노비치는 소련 군대와 독소전쟁에서 직접 경험했거나 전해 들은 일화들에 살을 붙이고 엮어 사실적으로 소련 사회를 담아냈다. 주인공 촌킨은 작가가 군복무를 할 때 만났던 동명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러시아 우화에 등장하는 바보 이반의 이미지를 결합해 탄생한 인물이고, 작품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유대인 에피소드들은 소련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겨냥한 것이며, 개인적 원한으로 촌킨을 비밀경찰에 밀고하는 이웃의 이야기에서는 ‘스투카치(밀고자)’ 문화를 꼬집었다.
삶이 담긴 소설, 인생을 건 풍자,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의 생애
“보이노비치의 그림은 그의 산문과 닮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대상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정직하다. 그에게 타협이란 없다. 그게 그의 천성이기 때문. […] 그는 한밤 숲속에 밝혀진 등불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도덕적 본보기다.”
– 빅토리야 토카레바(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는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작가이다. 냉전 시절 소련 반체제 인사들의 동향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서 간간이 그의 이름이 발견되고, 그가 망명 중에 서방에서 출간한 소련 사회 비평서 『혁명 70년의 소련 사회』가 번역 · 출간되기도 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으로 시작된 소련 사회 해빙의 바람은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 되며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스탈린 공포정치하 소련의 부조리를 코믹하게 풍자한 『촌킨』은 1970년 집필을 마쳤으나 소련 체제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을 담고 있었기에 정식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지하 출판으로 읽히다가, 1975년에야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2권 『왕위요구자, 또는 병사 이반 촌킨의 이어지는 모험』(1979) 역시 파리에서 출간됐으며, 소련에 정식 소개된 것은 1988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서였다. 2007년에는 3권 『실향민』이 출간됐다.
소련의 인권 탄압을 기록한 『수용소 군도』의 작가 솔제니친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자 보이노비치는 동료들과 함께 솔제니친 옹호 성명을 발표하고, 그 자신마저 작가동맹에서 제명된다. 작가동맹 제명은 국내 출판이 불가능해져 작가로서 생계 수단이 끊겼음을 의미했다. 그는 강제 추방되었다가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대표작 『촌킨』에 대한 러시아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지만, 소련군 장성들 사이에서는 붉은 군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조롱했다며 분노의 소리가 높았다.
보이노비치는 『촌킨』 3부작과 『모스크바 2042』 등 여러 작품에서 유머와 경쾌함을 무기로 부조리한 체제와 위선에 가득 찬 소련을 기록했다. 2018년 여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으로 경직되어가는 러시아 사회에 대한 우려를 피력해왔다. 또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치닫던 2014년에는 전쟁, 러시아의 자기고립정책, 전체주의의 부활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에 위선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한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그의 독설도 『촌킨』의 여정처럼 아쉽게도 막을 내렸다.
1부 불시착
2부 인간의 기원
옮긴이 해설 · 사랑하기에 부조리한 조국에 던지는 독설
작가 연보
기획의 말